책의 질문
우찬제 지음 / 열림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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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발전할수록 책의 소중함은 더 절실해진다. 어려서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지식을 얻지만 깊은 사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서뿐이다. 책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고 글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의 매력은 여전히 실재하는 가치라고 믿고 있다. 음악이나 미술이 시대 또는 양식에 구애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반면, 언어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 문단의 가장 활발한 비평가이자, 탁월한 문학 평론가인 우찬제 교수의 신작 <책의 질문>은 그의 숨 가쁜 행보의 집적체로 그의 문학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그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지식과 성찰, 특유의 사유가 담긴 문장과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이라는 주제로 수록되어 있는 명화들은 <책의 질문>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가 꺼내 든 책들은 모두 한 사회를 대표하고 한 시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위대한 책들이다. 그것은 책에 대해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의 시기를 보냈던 우찬제라는 한 사람의 삶에 새겨진 깊고 뚜렷한 흔적이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랄까, 레온 크라이츠먼과 괴테,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날카롭고 세밀한 기록들은 문학을 만들고 살아가는 인간이 공유하는 본질과 가치와 방향이 담겨 있었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일까? - 레온 크라이츠먼 <24시간 사회>

얼핏 보기에 개인의 선호를 반영하는 탄력적 시간 시스템으로 효율적인 측면도 많아 보였지만, 그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회사도, 상점도, 교실도, 병원도 24시간 문 닫지 않고 돌아가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지속되는 것 아닌가. 결국 문한 경쟁만이 더 가속화될 것 아닌가. 민족, 도시, 국가, 지역 단위에서 파워 엘리트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의 간극을 더욱 심화하지 않을까. 경쟁 이데올로기와 세계화 추세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각국의 파워 엘리트 집단의 기득권 확장에만 기여하지 않을까. 24시간 사회가 오히려 '불안한 현대사회'를 가속화하지 않을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일까? -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거듭 읽어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 하게 마련이라고 했던 대목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괴테의 삶의 궤적과 파우스트의 편력에서 우리의 최종적 관심에 값하는 것은, 바로 상승적 발전을 위한 항상적 노력이다. 대립적인 것들을 껴안고 방황하면서도 지혜롭게 노력할 때 자기 삶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항상적 노력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인간에게는 누구나 두 가지 영훈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잘 조화시켜 나가면서 지혜롭게 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하고 극복하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살찌울 수 있다는 것."

 

 

호모 사피엔스, 그 얼마나 기기묘묘한가? - 박경리 <토지>

<토지>를 읽다 보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류가 하나의 종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종차를 보이는 인간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월선이처럼 가장 선한 인간에서, 조준구나 김두수처럼 가장 약한 인간까지 아주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길상이처럼 노비의 신분에서 상전이었던 서희와 결혼해 몰락한 최씨 가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나중에는 관음탱화를 그리는 예술가로 역동적인 존재 전환을 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임이네처럼 시종일관 추악한 탐욕의 화신으로 나오는 인물도 있다. 작가 박경리는 최참판가를 중심으로 하여 주요 인물들이 성격도 잘 그렸지만, 방계의 부정적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도 웅숭깊은 장기를 보였다.

 

 

행복을 기다려야만 하는 지겨움을 어쩌면 좋을까? - 김애란 <호텔 니약따>

서리라고도 불리는 갈매나무는 비교적 추위를 잘 견딘다. 북부지방 사람들에게는 세한 시절의 벼리가 될 만한 나무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석의 화자는 "굳고 정한" 영혼의 푯대처럼 보이는 갈매나무와 그렇지 못한 자신의 차이를 반성하면서, 갈매나무의 영혼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세한의 시절을 견디려 했다. 그러나 김애란이 응시한 젊은 영혼에게는 "갈매나무"라는 장치마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갈매나무마저 품을 수 없는 처지에서 행복을 마냥 욕망해야 하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비행운만 가중되는 형국이라면, 정녕 문제가 아닐 수 없겠다.

 

 

우리, 용서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 이청준 <벌레 이야기>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느닷없이 괴한에게 유괴되어 살해된다. 당연하게도 아이의 어머니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다. 상처는 깊어지고 삶의 정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기독교 신앙에 감화되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으면서 범인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교도소에서 범인을 면회한 다음 더 절망하여 파국의 길로 치닫게 된다. 도대체 그 면회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녀는 어렵게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찾아갔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만나고 보니, 그는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였다. 교도소에는 주님을 영접하고 용서받은 범인은 놀랍도록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이창동 감독이 <밀양>으로 제목을 바꿔 영화화하기도 했던 이청준의 소설<벌레 이야기>의 줄거리다. 이 소설에서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이미 용서받고 있었기에 자신은 용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 소설은 인간의 윤리와 용서의 문제를 신앙과 실존의 측면에서 심원하게 숙고한 작품이어서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어쨌든 용서의 문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복잡한 난제임을 거듭 환기한다. 용서의 종교적 맥락만 강조되면 인간관계에서의 비인간화 및 인간적 가능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고뇌한다.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보다 창의적 질문 하나가 시대를 바꾸기도 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삶 속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질문들로 문학이라 불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 그 작가의 존재를 여미어 기리는 일, 이는 어쩌면 책을 읽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해 삶의 진리와 인간의 가치를 깨우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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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쓸모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스튜디오오드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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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으로 찍어야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아이는 비누 거품 풍선을 바라보며 마치 단 한 번뿐인 생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질주한다.

저 비누 거품 풍선은 5초 내로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소년의 저 눈빛, 저 달음박질도.

오직 한 번뿐인 반짝임을 찾아

오직 한 번뿐인 몸짓과 미소와 환희를 찾아

나는 오늘도 배낭을 꾸린다."

-정여울


마흔을 넘으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타협은 인생을 편하게 해주지만 나중에 반드시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하며, 능력보다 중요한 건 운이지만 운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멀어 보여도 달리다 보면 결국 도착한다는 것. 물론 그 도착 지점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그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런 것도 알게 된다. 아무리 좋고 멋진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사랑하는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여행은 현실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일상에서 탈출해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결혼 전에 내가 원했던 여행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휴식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란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눌 수 있는 여행, 나와 그들 모두가 동등하게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만나는 여행, 의미 있는 소비가 가능한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유튜브와 각종 매체 덕분에 다른 나라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듣는 시대라지만,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던 나에게 정여울 작가의 신작 에세이 <여행의 쓸모>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정여울 작가의 글이 처음인 나에게 그녀의 첫 이미지란 무척이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프랑스 파리와 뉴욕,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뉴욕, 영국의 런던을 거쳐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에서의 사진과 그녀의 따뜻한 글은 나 자신이 직접 여행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곁에 있던 누군가와의 다툼이 사라지고 아무런 고통이 없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무엇인가에 집중하거나, 한껏 놀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없다는 건 아주 가학적인 일이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있는 여행이었을테니까.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에서 정작 찾아낸 것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장소의 수집 욕구'를 뛰어넘는 더 깊은 욕망의 차원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장소를 수집하고 싶지 않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다. 인증 숏을 전혀 남기지 않아도 좋다. 그때 그곳에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감성의 근육'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깨달음, 지극히 사소한 미소, 어쩌면 단 한 번뿐일 안타까운 스쳐감만으로도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선물한다는 것을."- 정여울

 


우리는 여행이라는 낯선 길 한가운데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간다.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의 순간,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자신에게 많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스스로가 온몸으로 겪어낸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찾고 싶어 하는 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기까지는 저마다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마도 그건 신의 선물일 것이다. 정답을 너무 쉽게 알아버린다면, 언제 우리가 스스로와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을 갖겠는가. 우리는 결국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답을 위해, 멀리 여행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더 많이 만나고, 겪고, 사랑해야 겨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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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B컷 문학동네 청소년 64
이금이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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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아이폰이 출시되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아이폰의 보급은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아이폰 앱에 포함되어 있던 유튜브의 화려한 영상들은 우리 문화 전반에 자리 잡으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정점에 다다른 지금,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아이들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아이들의 장래희망 1순위를 차지하던 교사가 밀려나고 유튜버가 1위를 차지했다. 그럴 만도 한 게 한국은 돈 버는 유튜버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다. 2020년 말 기준 한국 국민 529명당 1명이 수익을 내는 전업 크리에이터로 통계가 났을 정도이니 아이들의 장래 희망 1위가 된 것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 것이다. 문제는 낮은 진입장벽 탓에 경쟁이 심화된 1인 미디어는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콘텐츠에 몰두하는 양상으로 이 같은 유해 콘텐츠의 최대 피해자는 청소년이었다.

영상 편집에 흥미를 가진 선우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서빈의 부탁으로 유튜브 편집을 도와준다. 포카리스로 불리는 서빈과 3명의 친구들은 성적, 외모, 운동 모두 눈에 띄는 아이들이었다. 선우는 그들의 영상의 장점만을 골라 매력적인 영상으로 편집한다. 선우는 어떤 것도 자신의 뜻처럼 되지 않은 현실과는 달리 영상 편집에 있어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서빈에게서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친형에게 무시당하며 구타당하는 서빈의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고 현실의 화려한 생활 이면의 생각지도 못한 삶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뜻밖의 사건으로 선우와 포카리스 멤버들은 평화로웠던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사건의 진실이 담겨 있던 선우가 잘라낸 B컷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데...

"현실과 편집된 세계 사이에는 누더기 차림의 신데렐라와 마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신데렐라의 차이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된 듯하다고 느끼는 게 인간의 심리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유독 예민하다.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만 심신이 안정되고 자신의 가치도 확인된다. 어쩌면 인생의 목표 자체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되어버린 오늘날, 개인의 행복이나 삶의 의미는 뒷전이 되고 만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삶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을 편집하여 자신의 SNS에 올려 검증받는다. 화려한 영상을 위해 잘린 무수한 B컷의 영상들 속에 담겨진 삶의 조각들은 어쩌면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지 않을까? 잘리고 버려진 B컷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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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미완성 교향곡 - 문화는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만드는가
케빈 랠런드 지음, 김준홍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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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종류의 식물로 뒤옆여서, 덤블에는 새가 지저귀고, 다양한 곤충이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 위로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얼기설기 얽힌 강 둔덕을 관찰하다가, 이처럼 서로 다르며 복잡하게 상호 의존하는 정밀하게 구성된 형태들이 모두 우리 주변에서 작용하는 법칙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그리하여 자연의 전쟁 및 기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상, 즉 고등동물의 탄생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 찰스 다윈 [종원 기원]

 

 

 

진화는 적응과 자연 선택이라는 확고한 인과율에 의해 진행된다. 그렇게 단순한 법칙의 반복을 통해 생명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오랜 세월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들을 창조해 냈다. 그런데 가장 적응적인 개체가 자연 선택되는 과정을 통해 생물이 진화한다라고 한다면 39억 년이라는 엄청난 진화 역사를 거쳐 온 결과인 현재의 생물들은 거의 완벽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런 오해를 가지고 보면 자연에는 우리의 추측에 맞지 않는 비합리적이고 설명하기 힘든 수수께끼들이 널려 있고, 생명의 진화는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로 생각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진화론과 관련하여 진행되고 있는 주요 논의들과 일반적인 궁금증에 대해 대부분을 다루면서 진화에 대해 일반인, 그리고 생물학자들까지도 잘못 알고 있는 많은 오해들을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인간의 특이성을 다른 동물들의 형질과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고 인간의 인지와 문화를 탐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비교는 인간 종의 성취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인류에 이르는 진화적 경로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아마도 독자들, 아니 모든 인류가 가장 궁금해 하는 내용이 실려있는 유전자 문화 공진화 챕터에서의 내용 중 흥미로웠던 점은 모든 사람이 오른손잡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기후와 주위 동식물과에 의한 유전적 변형(예를 들어 HbS대립형질)이 선호되는 조건을 구성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생존을 위한 유전자 본능, 인간 식이의 변화에 따른 유전적 반응, 그리고 가장 매력적이었던 내용은 문화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인류의 유전자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예술 작품이나 공연을 즉흥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운동 조절 능력은 다른 어떤 동물에게도 없다. 인터넷에는 예술적인 동물들에 대한 사례와 유튜브 영상들이 넘쳐나지만, 이는 동물 행동 전문가의 면밀한 검토를 거친 것이 아니다. 반려묘나 반려견에게 그림 도구를 건네면, 그 동물들에게는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예술적인 작품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붓을 쥐어준 다른 동물들처럼, 개와 고양이게는 재현 예술을 생산할 정도의 의향과 운동 조절 능력이 없다. 색색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어떤 추상적인 아름다움은 오직 애완동물의 주인에게만 보일 것이다."

 

 

인간을 뛰어 넘어 예술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동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지속적인 훈련으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인간처럼 음악의 박자에 동조화 할 수 있는 동물들의 소개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조련사에게 훈련 받아 촉각으로 감각을 입력받고 그에 대응되는 동작으로 출력하는 교차 감각 신경망을 구축해 그림을 그리는 코끼리와 유튜브에서 춤추는 새들 중 스타가 된 '큰유황 앵무 스노볼'이 스스로 음악의 박자에 동조화하는 앵무새도 모두 유전자가 갖고 있는 신비한 힘인 것이다.

 

 

다윈은 유전자 선택이 결코 완벽을 만들어 내지 못하며 단지 현존하는 조건에 대한 적응에 따라 달라질거라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의 동물과 식물은 서로에게 적응하도록 선택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동물과 식물이 뉴질랜드에 도입되자 '완벽'하지 못했던, 칩입자들에게 적응하지 못한 뉴질랜드의 토착종들은 절멸해 버렸다. 인류는 매우 성공적인 종이지만 아직도 네발보행에서 두발보행으로의 신체 구조의 전이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간 역시 완벽하지 못하다.

 

 

해마다 적어도 한 권 이상 신간이 제목에 다윈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고 있다.그중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생명의 탄생과 진화의 신비를 설명하는 책으로서 생물학적 설명만이 아닌 문화의 진화적 기원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설득력 있는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책으로서 케빈 랠런드의 <다윈의 미완성 교향곡>은 일반인을 비롯한 전문가에게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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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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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들떠있는 마음도 과장된 언어들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상의 아름다운 말들이 많지만 인생에 잘 물든 말의 빛깔은 더욱 아름답다. 그 빛깔 속에는 분명 삶의 빛깔을 충분히 머금은 시간이 들어 있다. 나이 듦은 소멸이 아니라 고요한 열정으로 일구어낸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젊었을 때 끓는 열정으로 살아간 그는 오래도록 숙성되어 빚어지는 고요한 열정으로 느껴졌다.

그의 산문집 <이적의 단어들>을 펼쳤을 때의 느낌이다. 그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 묻어나는 삶의 다채로운 빛깔들은 우리네 인생 한구석을 관통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경이로운 순간들, 소름 끼치는 순간들, 공포스러운 순간들은 그가 고른 101개의 낱말에서 파생되는 놀라울 정도로 재치 있는 위트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어폰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한 등산객 목에 걸린 휴대전화 스피커에서 음악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보기 싫은 건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듣기 싫은 건 고개를 돌려봐야 피할 방도가 없다. 혹시 이어폰이란 게 발명된 걸 아직 모르나 싶어 가방 속 내 것이라도 건네줄까 하다가, 이어폰 끼면 경적 소리를 못들어 위험하다며 음악을 스피커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고 달리던 자전거 라이더가 생각나, 그냥 살포시 내 귀에 꽂기로 한다. 이럴 때 이어폰은 귀마개이지 마스크. 유해한 것들로부터 내 몸은 내가 지킬 수밖에.


눈사람

A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눈물

오래전, 정말 즐거운 술자리에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던 친구가 있었다. 다들 놀라 우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했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언제 또 올수 있을까, 다시 오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걱정도 팔자다." "우리 인생, 시작에 불과하다." 소리치면서 건배를 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눈물에 일리가 있었음을. 20대 젊은이를 감상에 빠지게 한 것은 취기였겠지만, 그 너머엔 삶의 유한성에 대한 정신 번쩍 나는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을.




일상의 순간 속에서 마주친, 그 경이로운 이야기들

이적의 노래, 소설, 사설, 지금의 산문까지 읽다 보면 그의 관점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게 된다. 어떻게 이런 사유가 가능한 걸까? 소름 돋을 만큼 놀라운 상상력과 생각이 깊이를 느끼게 된다.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의 기록들은 이적 고유의 리듬과 특별한 상상력이 제약 없이 발휘되어 매력적이다. 그리고 예술계에 몸담아온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어떤 것에서 영감을 얻고 창조력을 키웠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산문집인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기록물들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관찰법과 사유 방법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산문집에 담긴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얻어지는 인생의 이야기로 하나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경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일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적의 단어들> 속에 녹아 있는 인생의 흔적들이 담고 있는 통찰과 위트를 즐기고 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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