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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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본문에서..)

한 총명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총애를 한몸에 다 받으면서 그 뛰어난 능력으로 마울브론 수도원의 초급 신학교에 당당히-그러나 자신으로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을 법한-2등으로 입학하게 된다. 이제 이곳에서 충실하게 학식을 쌓아 나가기만 한다면 평생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경애를 받으며 돈 걱정 따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이 초급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있는 마을 소식지를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가하게 낚시를 다닐 때만 해도 이 아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순수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는 기대했던 어떤 것들의 예상치 않은 빗나감으로 인해 남은 삶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기도 한다. 그 잃어버린 삶은 누구에게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인연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떠나버리고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순간의 달콤함은 결국엔 한갓 나른한 오후의 짧은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 한스 기벤라트는 헤르만 하일너라는 범상치 않은 인간을 통해 변화와 시련의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한 일상과 자유롭게 날아오르고자 하는 깨끗한 영혼의 날개짓을 방해하는 낡아빠지고 냄새나는 시선들을 하일너라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고 동시에 상처받는다. 그 충격은 도대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이럴 때면 어린 시절 깨끗한 창문 너머로 보이던 파란 강물과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마을의 목사와 구둣방 아저씨 플레이크의 인자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은 그대로이지만 자꾸만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며 신경쇠약 증세에 빠져버리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서 더없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한스는 결국 지나친 신경쇠약으로 어렵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입학한 신학교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영혼이 받은 상처를 그 누가 치료해줄 수 있을까.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장장이 견습공이 되겠다던 결심은 상처받은 영혼의 자기 치유를 위한 첫걸음이었을까. 그것이 과연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마지막 7장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어린 아이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건 정말이지 우울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그가 기어이 일으켜내려고 했던 삶에의 의지와 진정한 자아 찾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헤세의 소설은 이런 식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안겨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뿌리의 근처에서 다시 자라난 새싹은-비록 나무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잘려지기 이전의 나무를 굳건히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 속에 내정되어 있는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헤세의 소설을 세 편 이상 읽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사귈 필요도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난다. 자아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타인에 대한 존엄성, 생명의 고귀함, 그 사이에서 움터 나오는 삶의 숨 가쁜 절정. 헤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내가 고귀하고 총명한 영혼을 가진 완벽한 삶을 다시 한 번 산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 안에는 예술가의 타고난 본성과 생애 첫 키스의 후덥지근한 느낌과 서로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스며 있다. 

한스는 자아가 강한 아이였다. 자아가 강하다는 얘기는 그가 더 이상은 어떠한 관계로든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상처받기 두려워한다는 뜻이리라. 그것은 곧 잘려나간 나무로의 회귀, 일상적 삶과의 불협화음, 어떤 방법을 써도 활짝 열리지 않는 마음과 시작부터 예감하는 실패에 대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스스로를 깊이 감추고자 하는 연약한 자아의 소유자만이 강인하고자 하는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레바퀴와도 같은 세상의 힘겨운 시선을 등에 짊어진 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이상과 그 바깥에 존재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고 상처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삶의 본질이며 인간이 생을 다 바쳐 극복해야 할 무게다. 그런 점에서 헤세는 절망보다는 절망의 극복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에겐 아직도 한스의 절망에 가득 찬 흥얼거림이 귀에 선하게 들려온다.

"아, 나는 피곤합니다.
아, 나는 지쳤습니다.
지갑에는 돈 한 푼 없고,
주머니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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