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그 나이 먹은 당신에게 바치는 일상 공감서
한설희 지음, 오지혜 그림 / 허밍버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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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슬픈 제목이 또 있을까? 나 역시 이제 '막돼먹은 영애씨'와 제법 비슷한 처지가 되어가니 『나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가 그저 남의 얘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미혼) 남성 독자나 기혼 여성이라면 어떻게 읽을지 살짝 궁금해질 만큼 이 에세이에는 대한민국 3~40대 싱글 여성이 겪을 법한 감정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을 재촉하던 부모님은 어느새 "우리 딸은 독신이다"라고 대외적으로 발표해서 놀라게 한다거나(#2, 막상 결혼의 압박이 사라지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친구로부터 혼자 사는 게 최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거나 (#7, 다시 태어나면 누가 되고 싶어?) '유부녀 - 이혼녀 - 노처녀'의 서열에 대한 의문을 비롯해 신체 노화에 따른 당혹스러운 감정, 그리고 '그 나이에'라는 말로 모든 걸 정리하려 드는 자들에 대한 불편함까지 모두 다 담아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나이"에 대한 압박이 강하다.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고 또 강요받는 우리에게는 그 나이에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그 나이에 맞지 않는 그런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그런 머리를 해서도 안 되고, 그런 화장을 해도 안 되고, 더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그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나잇값 못하는 인간'이 되는데, 간혹 로맨틱 판타지가 더해지면 '영애씨'나 '브리짓 존스'가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한다. 물론 현실성이 떨어지는 가정이기는 해도 말이다. 




동년배가 '아무 일'을 수차례 겪는 동안, 그것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들'은 '그 나이에 왜 그러냐?'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설희 작가는 말한다. 자신처럼, 영애씨처럼, 그 나이에도 여전히 남들 다 겪는 일을 겪지 못하거나 겪지 않고 불완전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래도 느긋하게 살자고. 물론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위축되지도 않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이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나만의 페이스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평생 뭐든 남보다 느리게 살아왔다면, 남들 다 겪는 일 역시 좀 늦게 겪거나 더러는 건너뛰면 어떤가? 그게 원래 본인의 페이스인 것을.




그러니 쫄지 말고, 당당히 고개 들고 삽시다. 그리고, 옆에서도 '그 나이에 왜 그러고 사냐?'고 무안하게 말하지 맙시다. 알아서 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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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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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보다 한 해 먼저 선보인 『여전히 글쓰기가 두려운 당신에게』보다 확실히 디자인이나 편집이 더 세련돼졌다. <말·글·행>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깔끔하나 분량이 많아서인지 가슴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읽히는 글들도 종종 눈에 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적당히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어달라' 하지만, 만약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한 꼭지씩 연재된 글이었다면, '오늘 글은 좀 심심한걸'이라고 반응하는 날도 있었겠다. 





SNS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잘 말하기'와 '잘 쓰기'를 가르치는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먼저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남이 쓴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만,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남의 글을 정독할 만한 시간적 그리고 심리적 여유를 잃어가는 게 문제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 가슴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 (p. 63)'에 그렇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는 우리 가슴에 나 있는 그 커다란 구멍을 인지하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넘어 너, 그,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한다. 왜? 세상 사람 누구나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사연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질 것이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친구들, 동료 및 선후배들, 게다가 오늘 하루 나를 스쳐 지나간 이들까지도. 



『언어의 온도』에서 반복되는 몇 가지 키워드


1. 위로_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

어떤 환자와 보호자 아내의 대화를 듣고, 이기주는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 '애지욕기생愛之欲其死,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을 떠올렸다 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니 사랑만큼이나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위로인 듯하다. 위로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때로는 사랑보다 더. 




2. 어머니_신이 선사한 첫 번째 기적

『언어의 온도』에는 저자의 부모님, 좀 더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당장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더 그렇지만,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자극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잘 지내냐? 한 번 걸어봤다" 시집간 딸이 잘 지내나 궁금해 전화해 놓고 그냥 걸어봤다는 아버지의 말뜻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아버지의 "한 번 걸어봤다"는 흡사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 석원의 속을 태우던 여인의 "뭐 해요?"만큼이나 가슴을 가득 채운다. 



저자가 5월을 제일 좋아한다 했던가?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성년의 날까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주변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쁜 달이다. 미루고 미루다 5월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온도』는 여러모로 5월과 잘 어울리니까. 




3. 틈_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그것

작은 사찰 마당 한가운데에 세워진 석탑에 세월과 비바람을 견딘 흔적이 가득하다. 주지 스님이 말씀하신다. 탑이 오히려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는다고. 스님 말씀대로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틈을 만드는 일이다.



소란스러운 것에만 집착하느라, 모든 걸 삐딱하게 바라보느라 정작 가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지 말고,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그 무엇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 가지 말라 했다. 



중요한 건, 틈이요, 공백이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공백이 필요하단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것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또한 사실은 '나'를 알기 위함이라 했던가. 바쁘게 살면 살수록 '나'는 보이지 않고, 빽빽한 하루에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 그럴 때면, 잠시 쉬어가도 좋다. 너무 빽빽하게 살다 보면, 곧 지나갈 비바람에도 맥을 못 추고 쓰러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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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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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은 제목이고 그다음은 표지다. 둘이 판매에 영향을 크게 끼쳤으리라 생각될 만큼 인상적이다. 그러나 내용은 가치관이나 취향 탓인지 표지만큼 인상적이진 않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저자 소노 아야코를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의 사노 요코와 헷갈렸다. 어쩐지 읽으면 읽을수록 '이분 내가 읽었던 그분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상해 뒤늦게 확인해 보니 저자를 혼동했다. 거기서부터 일단 잘못된 만남이었다. 게다가 소노 아야코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우익 인사라고 하니, 쩝....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크게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나답게가 중요해', 2부는 '고통은 뒤집어 볼 일', 3부는 '타인의 오해', 4부는 '보통의 행복'이 제목이다. 이 책을 내게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3부 끝부분에 실린 글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약간의 거리를 둔다'로 하겠다. 무작정 남들을 따라 하지 말고 자기다움을 찾으라는 거다. 그러면 타인에게 휘둘리거나 상처받는 일도 덜 할 거고,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거니까.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서너 평짜리 텃밭에 관한 일화다. 종자 박스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씨나 뿌리는데 신기하게도 쑥갓은 쑥갓대로 청경채는 청경채대로 유채는 유채로 자란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식물보다 인간이 훨씬 비겁한 게 맞는 듯하다. 아무리 청경채를 쑥갓 사이에서 기른다고 청경채가 쑥갓으로 자라지 않는데, 과연 사람은 어떤가? 



이 책에 마음이 크게 동하지 않은 건, 2부 '고통은 뒤집어볼 일' 때문이다. 나는 '불운 속에서 축복을 발견할 테니 기꺼이 내게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역경을 헤쳐나가기도 벅찬데 어떻게 그 속에서 숨은 즐거움까지 찾나. 한두 번 읽고 지나가면 모를까 한 챕터가 다 이런 식인데다 사실 다른 챕터에도 군데군데 유사한 이야기가 섞여 있어 뭐랄까 지루하고 재미없는 도덕 선생님 수업을 받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런 부류의 에세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점은 몇몇 유사한 이야기가 재차 중복되면서 챕터 구성이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아까 지나간 귀신하고 똑같은 귀신이 잊을 만하면 또 등장하는 식이랄까? 이미 아까 놀랠 만큼 놀래서 이제 더 안 무서운데 아까 그 귀신이 자꾸 나타나는 느낌이다.   



읽으면서 든 솔직한 심정은 아래 '적당함의 미학'으로 대신하겠다. 오늘 나의 이 '리뷰 같지 않은 리뷰'는 17년 3월의 리뷰일 뿐 혹시 다른 때 다른 마음으로 읽으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거나 이 책에 위안을 받은 독자가 훨씬 많은 게 사실이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글귀도 분명 담겨 있다. 




끝으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약간의 거리를 둔다'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거리 두기는 임마누엘 칸트의 주장으로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비사교적 사교성』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어른인 이상 싫다고 무작정 피하거나 관계를 단절하지 말고 일정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좋다는 말이다.  


"깊이 뒤얽힐수록 서로 성가시러워진다. 살다보면 나를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나오게 마련이다. 이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싶다. - ‘약간의 거리를 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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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을 수 있다면 1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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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바닥을 쳤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그래, 자의든 타의든 바닥까지 내려간 이상, 남은 건 올라가는 일뿐이다. 온 힘을 다해 발뒤꿈치로 바닥을 치고 올라가면 된다. 여기 이미 바닥을 친 자와 아직 바닥에 닿지는 않았으되 바닥을 딛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겠다며 그곳을 향해 가는 자가 있다.



어두운 과거를 간직한 카미유 포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어리숙한 이웃, 필리베르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와 함께 사는 요리사 프랑크는 카미유와 비슷하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인물로 가족이라고는 폴레트 할머니뿐이다. 안나 가발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함께 있을 수 있다면』은 위태롭고 불완전한 이들 4인의 '인생의 부상자'가 더이상 물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바닥을 '탁' 치고 올라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연애 소설이자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멀찌감치 떨어진 점처럼 살아온 이들이 우연한 계기로 '함께 있게 되면서'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으로 변하듯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현실적이면서도 로맨틱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두 권 합쳐 약 800쪽에 달하는 분량인데 술술 읽힌다. 안나 가발다 스스로가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벼른 탓인지, 가끔은 능글맞고 또 느끼한 부분도 있지만, '맞아, 이런 게 사랑이었어!'라고 할 정도로 감정 묘사가 풍부하다. 혹시 지금 일(또는 꿈)에 지쳐 있거나 인간관계에 시달리거나, 지금 곁에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이 책이 당신에게 그 세 가지 측면으로 여러 질문을 던질 테니.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인물과 감정 위주로 진행되는 작품이라 아무래도 인물이 참 매력적이다. 다만 카미유는 너무 예민하고 뾰족해 위태롭고, 프랑크는 상처가 너무 많아 감당하기 버거우니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친절한 필리베르와 마마두에 더 마음이 기운다.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따돌림까지 받았던 필리베르와 시바의 여왕 마마두는 극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멜리아에>의 여주인공 오드리 도투가 카미유 역을 맡아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졌던데, 작중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다.  



필리베르는 카미유에게 프랑크를 소개하면서 '손에 닿는 것이면 뭐든 뜯어고치는 사람'이라 말했다. 낡고 망가진 것들을 죄다 고치는 사람이라던 그는 실제로 '망가진' 카미유의 거식증을 해결하고, 사랑 앞에 한껏 움츠러든 그녀를 당당히 두 발로 서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왕자님을 만나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가 더 부유하고, 남자는 가진 게 없으니. 



겨울 없이 봄이 오는 법은 없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는 영영 봄이 안 올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늘 그렇듯 봄은 조용히 어느새 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만물이 움츠러든 추운 겨울이 끝나고, 다시 새싹이 트는 봄날을 맞이하는 느낌의 소설이다.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온통 여기저기 부서지고 다친 이들이 마침내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로부터 삶의 의미를 깨닫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느 시인이 그랬다. 이유가 있어서 봄이 오는 게 아니듯, 이유가 있어서 그녀와 함께 있으면 힘이 나는 게 아니라고. 프랑크에게 딱 어울리는 그런 시인데, 애석하게도 시인이나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족에서부터 친구, 연인, 동료에 이르기까지 나를 둘러싼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돌이켜 보게 한다. 상호 간의 감정 교류와 소통이 없는 관계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더러는 위험하기까지 한지, 또 사랑 앞에서 겁을 먹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사랑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사실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랑은 나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상대가 알아듣게 표현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사실 '네가 좋아.',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같은 말이 어려운 말은 아닌데, 카미유처럼 사랑 앞에서 쭈뼛대고 머뭇거리다 놓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끝까지 기다려준 프랑크가 고맙다. 




" ‘행복하다‘는 게 뭐니?
그거, 요즘에 유행하는 새로운 말인가 보지?
행복, 좋아하네! 우리가 장난질이나 하고
개양귀비꽃이나 꺾으러 다니려고 이 세상에 온 줄 아니?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 순진한 거야, 이것아."
(1권, p. 63)

까짓것,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지, 뭐.
따지고 보면 이건 또 다른 신호야.
내가 거의 밑바닥에 닿긴 했지만,
완전히 닿은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고. 안 그래?
아직 더 힘을 내야 해.
이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을 더 버텨야 해.
그러면 바닥에 닿을지도 몰라.
(1권,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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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 - 그때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문장들 39
대니얼 클라인 지음, 김현철 옮김 / 더퀘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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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는 올해 80이 된 미국의 前 철학 교수이자 인기작가인 대니얼 클라인이 미국에서 15년도에 발표한 책인데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이 제법 흥미롭다. 그가 스무 살때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기로 막 결심하고 유명 철학자들의 문구를 적고, 그 아래에 자기 생각을 기록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은 '대니얼 클라인이 젊었을 때 그를 일으켜 세운 39개의 문장을 담은 명언집'인 셈이다. 



수십 년간 '명언 모음집'의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하나둘 옮겨 적은 문구를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부끄러웠다고 그는 전한다. 왜? 철학자들에게 삶의 지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너무 순진해서 그렇단다. 이제 80대가 된 대니얼 클라인이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조언은 정작 학창 시절에 읽었던 철학책에서는 찾기 어려웠다고.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삶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조금도 줄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고. 



시간은 흐르고, 대니얼 클라인은 약 40년 전에 자신이 작성한 명언 모음집을 다시 펼쳐 새로운 문구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로. 그는 고민했다고 한다. 격언들을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나도 읽으면서 배열 기준이 궁금했는데 기준을 세우기가 어려웠다고 그는 고백한다. 바꿔 말하면 특별히 기준이 있는 게 아니니, 마음에 드는 철학자부터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어느 날인가는 철학자 A의 문구가 눈에 더 들어오고, 또 어느 날인가는 철학자 B의 문구에 눈이 갈 터이니. 그의 말마따나 어쨌든 맛깔스러운 질문들이다. 다만, 중간중간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사무엘 베케트 또는 알베르 카뮈, 헨리 데이빗 소로우 등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반가워할 대목도 적지 않으니 겁부터 먹지는 않아도 좋다.  



젊은 대니얼 클라인의 낡은 노트에는 누구의 명언이 들어 있을까?


에피쿠로스, 아리스티포스, 데이비드 피어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알베르 카뮈, 

윌리엄 제임스, 장 폴 사르트르, 프리드리히 니체, 자코모 레오파르디, 버트런드 러셀, 

랠프 월드 에머슨, 파울 틸리히, 아리스토텔레스, 장 폴 사르트르, 데이비드 흄,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사무엘 베케트, 올더스 헉슬리, 존 바스, 존 스튜어트 밀,

피터 싱어, 니콜로 마키아벨리, 조슈아 그린, 데릭 파핏, 조지 산타야나, 

전도서(구약 성서), 샘 해리스, 프랜시스 베이컨, A. J. 에이어, 토머스 네이글,

이사야서, 블레즈 파스칼, 프랭크 클로즈,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빅터 프랭클,

애덤 필립스, 윌리엄 제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라인홀트 니부어 (등장 순)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에는 총 39개의 문장이 담겨 있다. 39개의 문장이 39인에게서 온 건지 궁금해 위와 같이 정리해 보니, 성경 문구를 두 번 가져온 걸 제외하면 오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문구만 두 번씩 등장한다. 누가 빠졌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일단, 칸트, 하이데거, 에릭 에릭슨, 키르케고르 등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2012년에 발표한(우리나라는 2013년)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을 동시에 펴들었는데, 그 책에서 인용한 철학자와 비교한 결과다. 참고로 대니얼 클라인은 비틀즈(특히 존 레넌)를 즐겨 듣고, 시나트라나 냇 킹 콜 같은 재즈 가수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듯하다.



39개의 문구 중 많은 것들이 '만약 ~라면'이란 가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현재,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맺음말에서 밝히듯, 대니얼 클라인 스스로가 언제나 그 생각에 끌렸기 때문이란다. '오늘이 네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보다 '이게 두 번째 삶인 듯, 이미 첫 번째 삶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고 살아'라는 말이 유난히 더 와 닿는 밤이다. 아래는 특별히 오래 쳐다보게 된 문구다.       


지금이 두 번째 인생인 것처럼, 

그리고 첫 번째를 잘못 살았던 것처럼 살아라.



사르트르의 이 문구는 대니얼 클라인이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뤽상부르 공원에 앉아 빅Bic 볼펜으로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가 실존적 권태를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절망을 극복하고 삶을 다시 부여잡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도. 세월이 흘러 그는 그 시절의 고민이 헛되지 않았다며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Je ne regrette rien)를 말한다. 그의 말대로 세운 옷깃, 입에 문 담배, 그리고 에디트 피아프까지 반박할 수 없게 프랑스적이다! 젊은 대니얼 클라인의 생각대로 그의 절망은 낭만적이었다. 아니면, 그 시기가 낭만적이었거나. 




대니얼 클라인이 말한 '전설적인 문구 (인생은 구리고 너는 그렇게 살다 죽는다)'가 적힌 티셔츠를 검색해 봤다. 진짜 많이 판다. 결국 이 책에서 받은 느낌도 그렇다. 파리의 어느 공원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한 대니얼 클라인처럼 누구나 삶의 허무나 실존적 권태와 싸우게 된다. 어떤 이는 자주 싸울 것이고, 어떤 이는 가끔 싸우는 그 차이밖에 없을 것이다. "Life Sucks, then you die."란 말 그대로 산다는 건 엿 같은 거고 그러다 죽는 거겠지.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결국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추하다는 게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지.

삶이 엉망일 때, 삶은 누구한테나 똑같이 추하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게 위안이 된다.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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