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어찰로 살펴본 '인간' 정조의 통치 기술 

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3기 한국문화편의 다섯 번째 강의는 안대회 선생님의 '정조의 비밀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조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어렸을 때부터 자기 스스로 일기를 썼던 정조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남겼고, 

최근에 새롭게 공개된 정조의 어찰첩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특히 수량(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 297통)이 많고, 이에 따라 그 안에 담긴 콘텐츠(내용, 정보)가 풍부하며, 

비밀편지로서 사료적 가치가 월등하고, 조선시대 문화의 정점기에 글씨와 문장으로 크게 인정받았던 

정조의 우수한 글씨와 문장을 두루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정조에 대해 참 다양한 면을 알 수 있었고,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도 흥미로웠으며 

강의 후반에 다뤄주셨던 '정조의 독살설'과 관련된 명쾌한 주장도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의혹이 많고,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누구나 조심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안대회 선생님께서는 상당히 자신에 찬 어조로 독살설에 대해 반박하셨습니다. 

독살설에 대한 선생님 주장의 요지를 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조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래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영남출신, 서얼, 천민 등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우대한 왕이었다. 독살설은 학술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닌 주장에 가까우며, 정조가 죽음으로써 일련의 개혁이 좌절되었고 그로 인해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급기야 일제시대를 맞게 된 조선의 치욕적인 근대사와 관련해서 주로 영남출신들이 제기한, 그저 희망사항에 가까운 주장이다.

- 정조의 독살설은 사후 2백년이 지났을 때 소설가와 팩셔니스트에 의해 주장된 가설에 불과하며, 한국사와 한국정치에 대한 혐오주의에 편승한 주장이다.

- 사도세자의 아내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고, 한중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너무나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같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정조는 물론 심환지(1730~1802)나 정순황후(1745~1805)보다도 오래 살았지만, 자신의 아들 정조의 독살에 대해 언급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 한약을 이용한 독살의 가능성 자체가 낮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역사에서 국왕의 독살이 과연 발생할 수 있는 일인가? 

물론 지금 현재로서는 그 누구도 확신하기는 어렵겠지만, 한 사람의 학자로서 이런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고 계신 

안대회 선생님께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쉽게, 자주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닌 듯하고.. 

아무튼, 국왕이면서 학자이고 문인이었던 정조. 

글쓰기 자체와 글을 통해 다른 이와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을 즐겼던, 그래서 표현 욕구의 발산이었던 정조의 어찰. 

어찰을 통해 궁궐 안에서 궁궐 밖의 모든 정보와 언론, 사회 동향을 파악했고 

주요 신료와 1대 1로 대화하고 장악했으며, 정서적 교감을 통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던 정조의 어찰 정치.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적대적 인물과도 소통했던 정조의 정치 리더십 등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정조의 개인적인 성품을 엿볼 수 있는 편지의 구체적 내용들, 예를 들면 

"(심환지에게) 경은 늙을 수록 매서운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나처럼 겁많고 부끄럼타는 사내는 그저 망양지탄을 느낄 뿐이다. 껄껄." 

"밤에 베개를 베었는데 비가 와서, 농사에 해가 될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가 개니 기뻐서 펄쩍 뛰었다." 

같은 것들을 보면서는 생각지도 못한 웃음이 나왔고, 다혈질적이며 흥분을 잘하고 조급했던 자신의 성격을 태양증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보고는 정조가 참으로 인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일 중독에 걸릴 만한 업무량을 가질 정도로 워커홀릭이었으며, 그것이 어쩌면 그의 건강을 위협한 

큰 원인 중에 하나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에서는 안타까움의 탄식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이 부분에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조는 '세종과는 다르게 실제로도' 궁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일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전기 최고의 성군 세종과 후기 최고의 성군 정조가 이런 면에서 다르답니다)

또, 정조의 문장과 글씨는 모두가 인정하듯이 뛰어난 데에 비해, 영조의 문장은 노환으로 인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많고 

그것이 사도세자의 비극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이나 정조가 자신의 고모부이자 영조의 사위였던  

추사 김정희의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도 안대회 선생님의 글들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것 같고, 

정조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멋진 강의 들려주신 안대회 선생님과 문학동네 그리고 알라딘에 정말 감사 드립니다. 

 

P.S. 안대회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정조의 이름은 '이 산'과 '이 성', 둘 다 맞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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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2010-08-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조에 관하여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에 관하여 생각해 보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뛰어난 임금이었기에 그 후에 쇠락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아쉽습니다. 강의 너무 재미났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