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모든 걸 의심했다.

등교해 교실에 앉아서는 '우리집과 부모님과 동생이 지금 사라졌을 수도 있겠구나, 지금 볼 수가 없으니...' 생각을 하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내 눈앞에 있는 것들도 환영일 수 있다. 사실 없는데, 내 눈앞에서만 어른거리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는 결론까지 내곤 했다. 영화 매트릭스도 나오기 전, 열 다섯 남짓한 어린 나이에 혼자 이런 생각들을 해냈다는 게 아직도 대견하곤 하다. 그래서인지 대학시절, 데카르트를 아주 쉽게 이해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다른 모든 것들은 환영이더라도, 우리집이 연기로 사라져버렸다 해도, 내 옆의 동료가 사실 내 눈에만 보이는 귀신이라 해도, 내가 입은 옷이 내 눈에만 녹색으로 보일 뿐 사실 투명한 그물과 같다고 해도, 이렇게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 해도, 단 하나,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으니 생각하는 '나'는 있구나. 하는 결론. 보이지 않는 걸 의심하다 못해 보이는 것까지 의심하는 날 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것, 네 친구인 나도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며 놀리던 절친 때문에 내가 이상한가보다 여기고 여러 해를 살아오다가 '네가 옳다'고 말해주는 데카르트를 만났으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물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뒷편에 펼쳐지는 '신'의 존재 증명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딱 '코기토'까지ㅎㅎ)

'나는 있다'라는 기본적인 절대 진리(사유의 전제가 되기도 하는..)는 내 안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채운 선생님의 '재현이란 무엇인가' 강의를 들으며 지금까지 절대 진리로 생각해 왔던 '나는 존재한다'를 깨부수는 게 힘들었다. (책72p에도 나와있듯, '나'라는 보편적 실체를 천명하는 데카르트는 재현의 사유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사실, 2강 수업이 끝나면 이 부분에 대해 질문할 생각이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존재한다'고 결론낸 것 자체가 오류인가요, 아니면 '나는 존재한다'를 사유의 기초, 근본으로 삼은 후 그 위에 다른 생각을 집 짓듯 올린 게 잘못인가요'하는...(다들 아시겠지만 프로이트, 과학, 의학 논란이 뜨거워 질문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수업을 마칠 때 즈음에 스스로 답변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생각한다'는 성립한대도 '나는 존재한다'는 성립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절대 진리'로 삼을 수 없는 듯하다. '나'라는 주체가 존재한다고? 피가 흐르고, 혈압이 변하고, 끝없이 숨쉬며 조금씩 늙어가면서 '나'도 계속 변하고 있는데 대체 무얼 '나'라고 일컫는가? 무엇이 '나'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가 '나는 존재한다'로 이어진다고 믿고 이를 기초 진리로 삼아 그 위로 다른 논리들을 펼쳤다니 우습다. 그러니 곧 '나는 생각한다'는 참일 수 있어도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참일 수 없다. 더 올바르게 고친다면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 속의 '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그저 '생각한다'만 참일 것이다.

이제 '나도 없다'. '나'도 없는 세상에서 '산다'. 그럼에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동안 써 오던 말을 버리고, 당연하게 여기던 개념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했던 가치를 뒤집으면서 진리가 없는 이 세상을 견뎌내야 한다. '철학을 하면서도 우울해하지 않고, 허무해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쉽지는 않다'는 채운 선생님의 말씀에 위안을 받으며, 우울하고 허무하고 쓸쓸하기 쉽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지금' '여기'를 성실히 견뎌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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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0729 2010-01-2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경험에서 뒷바침 되어나오는 깨달음의 경로를 차근차근 잘 설명해주셔서^^ 많은 배움 얻어갑니다. 앗! 저도 어렸을 적에 매번 그런생각 했었는데 ㅎㅎ 제가 못보는 사이 저희 부모님과 동생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나 내가 방금 지나쳐온 인도와 거리들이 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을 수 도있다는 생각이요! ㅎㅎㅎ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철학자인가봐요 ㅎㅎㅎ

타갸 2010-01-25 23:31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전 또 제가 유달리 철학적인 인간인 줄로 알았네요. 하하 ^^;;; 다양하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이 모인 시간이어서인지 '토론'이라기보다 '강의'형식으로 진행되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유대감이 느껴지더군요. 남은 시간들도 기대됩니다. 더 넓고 깊게 생각해 보고 싶어요.

froghong 2010-01-2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행이 책을 읽다보니까 2강이 주체에 대한 강의네요...아마 이런 고민이 해결이 될 듯합니다..아니면 더 어려워 질수도 있지만...아마 10강이 끝날때 쯤이면...고민도 늘어나겠지만 더불어 해결책도 나름 찾아가리라 여겨집니다...그나저나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능력이..부럽습니다..

타갸 2010-01-25 23:3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제 '주체란 무엇인가'를 집어 들었습니다. 어려운 주제인 것 같아 준비를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저도 아래에 froghong님께서 쓰신 후기를 잘 읽었습니다. 다양한 지점에서 고민하며 생각을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강의 후에 이렇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

알라딘공부방지기 2010-0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흐름이 저와 같으시네요. 제가 품었던 의문들이 앞부분에 나와, 그건 그런게 아닐까 홀로 생각하며 글을 따라 읽는데, 역시 저와 같은 결론을... ㅎㅎ

pattering 2010-02-0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 나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뭐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사유해 본 것은 아니지만, 종종 '순간의 나'에 이질감을 느끼고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단지 나의 상념에 불과한 것이 아닐 까 생각했더랬지요. 이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존재를 생각했었다는 것도 잊어버렸는데, 그 생각이 어느 누군가의 머릿속 한 구석에서 소멸되지 않은 채 끝나지 않은 필름처럼 계속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열성을 다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허무주의에 빠져서 삶을 비관할 정도로 깊은 사유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채운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또 게시판의 많은 글들을 보면서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만 역시 '나'에 대해 정의하고 매 순간 달라지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내일이면 주체에 대한 강의가 끝이 나겠지만 아직 한참을 더 살아도 쉽게 끝 낼 수 없는 주제인것 같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지금을 살아내야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겠지요^^ 내일도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