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장르 불문하고 책 좀 읽는 잡독파에 속하지만 의외로 소설책은 읽지 않는 편이다. 생각해 보니 조병화, 박경리, 황석영, 이문열, 조정래 선생 등 나름 대작가 반열에 오른 분의 책은 거의 다 읽은 듯한데, 중견 이하 신진(?) 작가의 경우 이상 문학상 정도에서 간단히 대하는 정도... 그러다 보니 어떤 글을 보면 내용이 뭔지는 알겠는데 정작 그 작가가 누구인지 아리송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런데 김영하! 이 소설가의 이름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작년 말에 <살인자의 기억법> 리뷰를 쓰면서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한 일간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 <퀴즈쇼> 때문이다. 매일 신문소설을 읽다보니 작가 이름이 저절로 각인된 거지. 그때 참 감각적인 '젊은 글빨'을 보여준다고 느꼈더랬다. 신선하고 쌈빡하더만...

 

그 이후로도 이 소설가의 책을 몇 권 찾아 읽었는데, 대단히 트렌디하고 감각적인 필력(이런 걸 도회적 감수성이라고도 하는 모양...)으로 젊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만 그 철학적 내공은 아직 초고수의 경지가 아니라는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나서도 크게 해소되지 않았더랬다. (심드렁하든 고뇌하든) 흡입력 있는 심리적 주제를 이슈화하여 맛깔스럽게 끌고나가는 능력은 분명히 탁월하였으나 그걸 종교나 철학의 깊이로 풀어내는 맛은 완전한 토종 된장국 맛이 아니라 MSG 맛도 느껴지더라. 소설가의 체험적 삶의 깊이가 (소설가의 나이에 부응하는)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 거지... (여러 영하바라기님 너무 분개·질타 마시라. 그냥 인간 김영하를 잘 모르는 일개 독자의 감상일 뿐이다.)

 

<보다 · see · 見>,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이다. 평소 에세이집은 잘 안 읽는데 그나마 몇 안 되는 친숙한(?) 이름에 이끌려 손에 잡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보고 다루는 생각의 자유로움이 인상적이었고, '작가다운' 이색적 통찰과 지적 성찰의 세계도 엿볼 수 있더라.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으며, 김영하란 소설가의 밑바탕이 탄탄하다는 걸 (겉멋만 든 사람은 아니구나!) 느꼈다.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영화 <설국열차>에서 편집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머리칸 꼬리칸'이었다. "정치인들은 기차의 파멸을 막고 있는 게 자기들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장사꾼들 덕분에 사람들이 폭력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게 되는 거죠. 평화? 그건 장사꾼들이 만드는 거예요(37쪽)". 아~ 와 닿는다.

 

기타 여운을 남기는 문장이나 느낌은 아래에 정리하도록 하고... 작가가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26편의 글을 통해 내가 느낀 아웃라인은, 그가 쉽고 부드러운 문맥을 다루면서도 예리하게 우리의 익숙한 현상을 약간 낯설게 들여다보는 재주를 가졌구나~ 하는 거였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불평등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의 세계를 적 ·당 ·히 진보적인 사유와 또 무던한 윤리적 가치관으로 엮어낸다는 그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작가는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들여다보고 풍자는 할지언정 그 구조적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소설화할 성격이 아닌듯하다는 이야기)

 

어쨌거나 일상생활의 경험을 끊임없이 숙고하는 '작가 정신'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아마 이런 면면이 내가 이 작가에 호감을 갖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가적 역량에 의심! 하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가 흡입력 있는 소설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물이 엮이는 다중플롯의 작품, 철학이든 인문적 사상이든 어떤 흐름을 긴 호흡으로 이끌어 나가는 보다 긴 장편을 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의 이미지는 상당히 '도회적이고 시크한 (수수하면서도 빈티지한) 글꾼'인지라 그의 경험치가 그런 역량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래서 초고수로는 아직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거고... 이런 느낌은 이 산문집을 읽고서도 그닥 변하지 않았다. 아무쪼록 이 나라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기는 소설가이길 바라며 그만 마무리를 해야겠다...

 

기타 짧은 느낌을 정리해 보면...

○ 마르셀 에메의 <생존 시간 카드>를 모티브로 쓴, 시간의 상대적 불평등을 다루는 '시간도둑'편은 그렇게 새롭진 않았다. 그래도 스티브 잡스가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는 부분에 공감이 가더라. 

 

○ 자유 아닌 자유... 여기서 뭔가 생각거리가 있었는데...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20쪽)." 

 

○ 등장인물의 부와 가난을 가장 효과적으로 들어내는 방법은 뭘까? 그건 무지!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란다...(25쪽) 감탄사 터짐.

 

○ 숙련 노등자의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되고 비숙련 노동자는 기계로 다시 대체되는 현상은 이제 전 지구적 현상이 되었다(44쪽). 젊은 청춘들의 백수... 가슴 아프다.

 

○ 영화 <건축가 개론>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참 마음에 들었다. 서연은 왜 승민에게 "너와 살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지어다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는/말할 수 없는 것일까. 라캉은 히스테리자를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주체”로 정의한 바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서연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꾸는 식의 게임을 벌인다. 병든 아버지를 빌려 승민에게 접근하고 승민을 빌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서연의 진짜 욕망은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돼 있다. 은폐돼 있는 욕망이 어찌 만족을 알겠는가(73쪽)

 

○ 서연은 제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바꾸려는 여자다. 그래서 늘 자기를 속인다. 옛 남자를 찾아간 이유는 오직 아버지에게 집을 지어주려는 효심의 발로이고 옛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은 오직 그 남자가 패션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75쪽)

 

○ 영화 <마스터>를 보고 쓴 글도 마음에 든다.... 어느 날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데리고 사막으로 간다. ‘마스터’ 랭카스터는 프레디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정해진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시험을 부과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을 달리던 프레디는 반환점을 돌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버린다. 탁 트인 바다에서 제멋대로 살던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끝내 길들여지지 않은 채 아버지가 정한 선 밖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짜릿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한 어린아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부모가 우리에게 부과한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83쪽)

 

○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90~ 91쪽)

 

○ 가장 끔직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커 슈피어링, <철학 옴니버스> (93쪽)

 

○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98쪽)

 

○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115~116쪽)

 

○ '연기하기 가장 어려운 것' 편에 보면 먼로를 통해 소설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호소력이 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메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에서 조 다마지오와의 결혼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메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123쪽)

 

○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안나 카레니나>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125쪽)

 

○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입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고 다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힘이 들지요 (148쪽)

 

○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 암시가 꼭 점쟁이나 관상쟁이에게서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154쪽)

 

○ 연옥은 천국과 지옥 중간에 있다. 로마 가톨릭이 연옥을 창조해낸 것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만으로 사후세계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연옥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세계다. 지옥처럼 괴롭지도, 천국처럼 행복하지도 않다. 연옥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그곳에 머무는 기간이 얼마가 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또한 연옥에 머무는 자는 스스로 그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머무는 곳, 거기가 연옥이다. (177쪽)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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