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 퇴계가 된 일진 羅以彦
이창훈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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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을 읽었다. 사자? 아니다. 독고라이언! 한 고등학생의 이름인데, 그 아버지가 아이 이름을 지을 때 한글, 한자, 영어로도 모두 뜻이 통하도록 지어준 이름이라네.(하긴 내 아이의 경우도 순수 한글 이름 같지만 한자의 의미도 가지게 작명했더랬다.) 羅以彦! 아름다울 라(羅), 써 이(以), 선비 언(彦)으로 우리말 뜻은 ‘선비로서 쓰이기에 아름답다’ 약간 돌려서 풀이하면 ‘아름다운 선비’라고 풀이할 수 있는 모양이다. 라이언의 아버지 직업은 변호사. 그런데 이 분의 행적이 삼류 신파 클리셰 그대로일세. 흔히 개천에서 용났다고 하는 넘들이 보여주는 너무나 이기적 작태... 천사 같은 청순 미모 고시원집 막내딸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하였건만 이넘이 결혼은 돈 많은 의류업체 사장의 외동딸과 해버렸네. 결혼식 올린 뒤에야 차버린 여인에게 아이가 들어서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 출생의 비밀...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전형적 특징이라 너무너무 왕짜증~

 

라이언 이넘아가 부부싸움 와중에 터져 나온 말에서 고만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을 알아채 버렸네. 그래서 고1까지 전교 1등이었던 이넘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기라. 공부는 때리치우고 권투와 이종격투기를 배우더니 일진 중에서도 일진짱이 되어버리네.(태산고 3학년, 교내 친목모임인 범털클럽, 일명 범클의 회장. 솔까 폭력서클 일진의 대빵) 한마디로 공부짱에서 싸움짱으로 거듭난 거지. 이렇게 밑밥을 깔고나면 뭐가 나오겠냐. 당연히 주인공을 단박 사로잡아버리는 미모의 착한 여인 등장 아니겠어. 라이딩 하다가 넘어져 다친걸 잠시 봐 준 여대생과의 운명적 만남. 그것도 연상. 그리고 이 분이 교생으로 온다는 거. 일진짱 답게 대시하다가 동영상으로 찍혀 전국구 망신을 당하지만, 이 교생 샘이 인근학교 불량고교생에게 성폭행 당하기 직전에 화려한 격투술로 구해낸다는 전개. 여기에 하나 더! 친구가 등굣길 즈음에 학교 본관의 첨탑에서 떨어지는 씬까지 더해지니 무슨 학원액션물 저질만화를 보는 듯하더라.

 

그럼 이 책을 왜 읽었을까? 그건 '퇴계 선생이 된 고교 일진'이란 부제 때문이었다. 퇴계 이황? 궁금증이 일어 출판사 리뷰를 읽어보니 "퇴계 이황과 8년에 걸쳐 사단칠정 논변을 펼친 고봉 기대승이 선계(仙界)에서 세월호 사고를 놓고 나누는 대화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첫 장부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라는 구절이 있더라. 사단칠정 논변! 이 문구를 보고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랴. 이(理)와 기(氣)의 작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기호발론, 수양철학을 중시, 주리파)과 고봉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기겸발론, 실천철학을 중시, 주기파) 논쟁은 중국의 유교철학이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지. 이 책에서 이런 이기론의 어떤 철학적 접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팍팍 생기더만. 게다가 "퇴계 필생의 역작이자 극중 빙의의 모멘텀이 되는 성학십도를 쉽고 간명하게 풀어낸 <新성학십도>는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는 인문학적 울림을 전달한다."는 말을 접하고 나니 어떻게 하든지 읽어보고 싶더라.

 

라이언이 조선시대 퇴계의 시대로 시간여행하기 전까지는 정말 대중적 키치(Kitsch) 소설에 불과하다고 봐도 무방할꺼야. 학교폭력, 가정불화, 가출, 자살 등 십대의 질풍노도를 세월호, 공무원 연금, 국민 연금 적자 등 기성 꼰대 세대의 부조리한 사회적 이슈를 적당하게 비빔한 짬뽕스타일의 가벼움이 도처에 넘친다. 그리고 그 시간여행이란 것도 언제가 드라마로 방영된 <신의>와 대동소이하여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공 라이언이 퇴계의 계당서당(도산서원의 전신)에서 보내는 3년의 시간을 그리는 장면부터는 읽는 재미가 솔솔 하더라. 도덕적 원칙주의 퇴계 선생과 풍류적 현실주의 고봉의 만남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는데 책의 성격상 그닥 철학적으론 흐르지 않아 좀 섭섭(?)하긴 했다. 하지만 아들뻘(나이차가 무려 26세) 고봉을 학문적 동지로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퇴계 선생의 큰 인품과 학문을 통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선비정신이 겨울 밤하늘의 별처럼 시리게 와 닿더라. 젊은 퇴계가 공부했다는 봉화 청량산 청량사에 다시 가보고 싶어지네. 

 

1569년(선조 2년) 3월, 퇴계가 안동으로 돌아갈 때 고봉이 지금의 강남 봉은사까지 따라가 배웅하면서 배가 떠나려 할 때 지었다는 이별시와 퇴계의 화답시나 한 수씩 감상하고 넘어가자.(압운과 대구에 유의해서 보시압~) 이 소설책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냥 옛날 본 적이 있어 찾아 적어봤다. 두 분은 이때의 이별 후 영영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이하면 붙잡으리.
모랫가에 닻줄 끌고 못 떠나게 배회할 제, 밀려오는 애간장 시름을 어떻게 할거나.
 

漢江滔滔日夜流(한강도도일야류) / 先生此去若爲留(선생차거약위유)
沙邊纜遲徊處(사변예람지회처) / 不盡離腸萬斛愁(부진이장만곡수)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名流이니, 돌아가고픈 마음 종일토록 매여 있네.
이 한강수 떠다 벼루 돌로 써서, 끝없는 작별시를 써 볼거나. 
 

列坐方舟盡勝流(열좌방주진승류) / 歸心終日爲牽留(귀심종일위견유)
願將漢水添行硯(원장한수첨행연) / 寫出臨分無限愁(사출임분무한수)

 

책의 끝부분은 무슨 추리 소설 읽는줄 알았다.(퓨젼 형태의 장르파괴 습작 같기도 하더만) 그리고 클라이맥스 부분으로  퇴계의 <성학십도>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등장하는데, 참 교훈적인 이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가 아니련지. 이건 자칫 헤살꾼이 되기 십상인지라 언급을 회피하고자 한다. 어쨌든 이 <新성학십도>가 참 마음에 들더라... 경(敬)과 신독(愼獨)을 바탕으로 퇴계 선생이 희구하신 필생의 소원은 바로 선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이루는 것으로 늘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단다(442쪽). 그리고 선인다의 소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잠언처럼 삼아야 할 네 글자가 '사해춘택(四海春澤)'이라 하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봄날의 온화한 연못처럼 되도록 하자는 뜻이란다. 탐욕과 시기, 편가르기와 증오,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는 물질·금전만능주의를 녹아내리게 하자는 게 사해춘택의 정신이라는 거지. 혼탁한 세상에 퇴계 선생처럼 넉넉하고도 인간의 마음을 간직한 선비정신이 참으로 그립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나도 외쳐보고 싶다. "퇴계처럼! 사해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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