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표절 시비와 관련한 창비의 해명이 좀 많이 궁색하네.
민주화의 험난함 속에서 올곧게 걸어온 이 출판사가...
창비의 이름이 이루어 놓은 그 역사성을 아낀다면, 아무리 신 작가가 보배롭다해도 이건 아니지.

미래의 문학도를 생각한다면 정말 이건 아니지.

 

신경숙 같은 위치의 작가가 왜 그랬을까?

그 땐 지금의 네임밸류를 예측 못했을까? 아니면 독자들이 까막눈인지라 눈치 못채고 그냥 넘어갈만한 수준이라 생각했을까?
<우국>을 읽지도 않았다는 신 작자의 변명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표절이 아니라고 하기엔 어감의 싱크로율이 너무나 높다...
그냥 복-붙하여 약간 윤색만 한 글을 두고 표절이 아니라니...신작가도 상업주의의 산물에 불과한 걸까? (차라리 좋은 문장이 있어 적어두었다가 그만 출처를 잃고 활용(?)했다고 했으면 그나마 좋았으련만)
문학의 길에 들어섰다면 자신만의 색깔과 창작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야 하는게 아니겠는가. 안타깝다. 참으로 안타깝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어감의 싱크로율이 같다는 나의 생각의 꼭지는 문맥도 그렇지만 <기쁨을 아는 몸>이란 표현에 있다. 이런 느낌을 유사한 문맥에서 글로 풀어낸다는 것은 표절아닌 다른 말로 설명해 내기 어렵지 않겠는가...
아무튼 신 작가가 아무리 이름이 높다하더라도, 먼 미래의 대한민국 문학을 위해 이번에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게 맞다.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람들이 총리나 높은 자리, 좋은 명성, 부의 정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건 이제 이 시대로 그만 두자. 아니 그만 두게 하자.
아무리 아프더라도 잘못 낀 단추는 풀어서 다시 처음부터 꿰어야 바르게 된다.

 

어제 표절 시비를 접하고 별로 글 적고픈 생각이 없었는데, 창비의 해명을 읽고 괜히 마음이 분개하여 짧은 단상을 적어봤다.

대한민국이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거야...
그 참...

 

(아이든 어른이든 처음 잘못했을 때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나중에 이런 일이 꼭 벌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