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에코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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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은 이상스레 손이 잘 안가더라. 지적 추리 위주의 본격 탐정물을 가장 좋아하고, 범죄 심리나 사회적 현상을 중시하는 도서파(倒敍派)나 사회파 추리도 간간히 즐기긴 하나, 냉혹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비정파(非情派) 형사물은 책이든 영화든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그래도 가끔씩 북유럽쪽 경찰소설을 읽기는 한데, 잔혹한 범죄의 세밀한 묘사도 조금 부담스럽지만 사건의 저변에 흐르는 비정상적 학대나 소외, 그리고 삐뚤어진 분노와 피칠갑 복수로 이어지는 스토리에서 느껴지는 냉소와 냉기도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더라. 혹자는 이런 오싹함과 먼치킨 스타일의 형사에 짜릿함을 느낄지 모르나, 도덕적 판단이 거부된 무감정의 폭력은 나에겐 사양하고픈 영역이다. 나의 피가 식었기 때문일까? 

 

<블랙 에코 The Black Echo>를 읽었다. 수많은 추리 문학상을 휩쓸고 있다는 마이클 코넬리의 전설적인 데뷔작이라기에, 그리고 1992년 출간된 그해 에드거 상을 수상했고 현재까지 현대 크라임 스릴러(crime thriller)의 새로운 고전으로 불려온 걸작이라기에 잠시 눈길이 가더라. 회사의 프로젝트 하나를 마치느라 정신이 피곤해 골치 아픈 책을 회피하고 싶었기도 하고... 560여 쪽의 책을 오랜만에 잠을 설치면서 그냥 주욱 읽어 내렸다. 지적인 추리소설이 아니라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겠더라. 작가의 필력이 돋보이더만. 주인공 해리 보슈 형사의 캐릭터는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드 같은 존재지만 특유의 감각으로 사건을 파고드는, 영화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 같은 느낌이 들더라. 아니지. 브루스 윌리스보다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더 멋있을 거란 상상을 더하면 될 듯하다.

 

내용은 크게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이다. LA 헐리우드 근교 한 저수지의 진흙 차단장치로 사용되던 굴에서 노숙자로 보이는 시체가 발견되고... 그냥 마약 과다복용으로 처리하고픈 뉘앙스가 흐르지만, 좌천 당해 온 당직형사 해리 보슈는 직감으로 살인 사건이란 걸 느낀다. 그런데 죽은 이가 우연히도(?)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 부대원으로 한솥밥 먹던 전우일세.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쉽지 않은 살인자 추적과 땅굴쥐_Tunnel Rats, 베트콩의 주이동로인 땅굴에 폭탄을 설치하는 역할을 하는 군인_로 경험한 트라우마 같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진다. 과거 시점의 베트남 땅굴은 현 시점의 미국에서 땅굴로 뚫린 은행 강도 사건과 연결되는데, 마치 <다이하드 3>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더라. 그리고 잘 팔리는 소설이나 드라마엔 미모의 여인이 빠지면 안 되지. 해리 형사가 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같이 추적하게 되는 FBI 여자요원과 러브라인이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 줄거리가 전부는 아니고 더 짜임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빠른 스토리 전개와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영상미가 상당히 괜찮았다. 머리 아프게 생각해야 하는 지적 추리의 장면 없이도 이렇게 끌렸다는 것이 꽤 인상적인 책읽기였다. 오래전 베트남을 여행했을 때 땅굴 체험을 해 본 적이 있어 더 빠져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책을 덮은 후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책은 아니었어도 ‘괜히 읽었다’거나 ‘시간 아까웠다’ 같은 뒷맛 씁쓰레한 것은 전혀 없더라. 오히려 킬 타임용으로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는 느낌만 남았다. 이 <블랙 에코>를 시작으로 해리 보슈 시리즈가 16편까지 발표되었다고 하니 독자들도 이 고독한 형사에 제법 빠져들었는가 보다. 이제 고작 1권을 읽은 주제에 뭐라 평을 하기가 좀 그렇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해리 보슈의 캐릭터가 젊은 청춘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라는데 찬동한다. 누가 뭐래도 오랜만에 밤을 새워 읽은 책이다.^^

 

<사족>

1. 블랙 에코 : 95쪽에 이 책의 제목이 <블랙 에코>가 된 연유가 보여진다.그런데 239쪽을 보면 땅굴 입구를 검은 메아리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에겐 95쪽의 느낌이 더 와 닿았다.

2. 한줄 느낌 : 우연 속엔 필연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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