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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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킬타임용 책이 뭐 없을까 둘러보다가, 제법 찌릿~한 표지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재림>... 촌스럽고 본때 없는 글꼴과는 다르게 그 단어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의미 아닌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하셨고, 번개와 뇌성 속에 큰 지진으로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계 16:18,20) 하셨으니, 그리스도교인들은 기다림의 날일지 몰라도 그들이 말하는 불신자에겐 진노의 날이 된다는 그 재림. 그런데 표지 또한 검은 십자가가 거꾸로 물에 잠기고 있는 일러스트. 뭔가 섬뜩함이 있다. 뭐지? 종교적 미스터리물? 어쨌거나 그 음습함에 손이 안갈 수 없더라.

 

책을 잡으니 민음사의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 '황금가지' 출판이다. 뒤표지를 보니 "범인 눈에는 장부책에 적힌 사람들이 예수를 배신한 베드로였던 거죠. 감히 기독교의 신성에 도전한 사탄 종자들."이란 카피와 함께 짤막한 줄거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의문의 실종에서 비롯된 연쇄살인의 단서. 신성 모독을 핑계로 종교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광기어린 사이코패스와 그 뒤를 쫓는 세 추적자들. 완성된 플롯과 촘촘하게 쌓아올려진 긴장감.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정교한 추리까지. 드디어 만나는 한국형 본격 추리소설!
그렇다면 이 책의 성격은 거의 파악되었고,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같은 종교에 기댄 추리 미스터리를 특히 좋아하는 나의 속성상 이 책을 안 읽을 수 없더라.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요, 베드로가 네로 황제 때 붙잡혀서 십자가형을 당했다더군요. 이때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내 어찌 감히 예수님이 짊어지신 신성한 십자가 형틀에 이내 미천한 몸을 맡기리오. (중략) 베드로가 원하는 대로 십자가를 거꾸로 해줬겠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역 십자가형'을 받게 된 거예요.(129쪽)"

 

<재림>은 2개의 장으로 나눠진 탐정 소설_본격 추리소설은 아니지_인데, 1장 <재림>은 한 미술가의 실종을 종교적 갈등에 기대어 추적해 나가는 작품이고, 2장 < 만남, 그리고 시작>은 일종의 프리퀄(prequel)로 한 여대생의 실종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탐정 3총사가 어떻게 만나고 맺어지는지  알려주고 있다. 주요 탐정 캐릭터는 변호사 독고잉걸, 탐정 권민, 시간강사 강승주. 리더인 독 소장은 우연히(?) 공부를 잘해 변호사가 되고 평탄한 삶을 살고 있지만 탐정의 꿈이 마음속 불덩어리라는 걸 알고서 변호업에 탐정업을 겸하게 된다. 강승주는 중3 때 한 여성의 납치실종을 목격하고 외면해 버린 겁쟁이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다가 자기 대신 지방대학 강의 대타를 가줬던 친구가 골목길에서 뻑치기를 당해 목숨을 잃은 후 그 죄책감에 탐정이 된다. 권민은 셋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물이다. 독 소장이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려 갔을 때 만나 스카우트한 인물로, 180㎝의 서늘한 눈매를 가진 강인하면서도 이지적인 여성이다. 어릴 적 태권도를 배운 후 계속 무예수업을 취미로 삼았는데, 탐정 친구를 도우다가 탐정 일이란 것이 두뇌끼리 겨루는 새로운 형태의 무예라고 느끼고 자연스레 탐정의 길로 들어선다. _이름만 놓고 볼 때, 귄민이 남성 같고 강승주가 여성 같은데 내만 그렇게 느낀걸까? 이것도 강한 여성에 대한 일련의 장치일까?_

 

1장은 사실 조심스럽다. 작금의 일부 한국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불관용과 배타성, 그리고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해 온 스승이 오히려 예수라는 명분에 의해 파문당하고 비참하게 죽었다는 설정이나, 종교적 망상과 개인적 망상이 결합된 광신도의 정체성이 보여주는 행위는 드러내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_왠지 개신교에서 딴지를 걸 것만 같다_ 가벼움이 특징인 이런 장르소설에서 침묵하는 신을 보며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울분으로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제법 신선하더라. 그래서인지 이 <재림>을 읽으면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 민요섭과 조동팔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만. 그들이 추구한 신성(神聖)과 기독교적 신념이 이 소설에서 언뜻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비신도인 내가 어떻게 언급하긴 그렇고... 민요섭을 죽인 조동팔이 이렇게 말했지, "우리 인간은 신 안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불합리 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인간의 그릇으로 어떻게 그 분의 전체를 담을 수 있으리. 어쨌거나 베드로의 역십자가를 소재로 삼아 풀어나가는 전개가 제법 흥미로웠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우상숭배 투성입니다. 교회도 목사도 우상숭배입니다. 개신교가 탄생하며 주창했던 건 교회와 목회자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목사를 믿는 것인지 자문해 보세요.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바로 이성입니다. (중략) 제가 말하는 이성은 깨달음의 동력을 뜻합니다. 이성은 배움이고 철학이고 각성입니다. 믿음은 각성의 산물이고요. 어찌 믿음이 자각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거짓된 목회자들이 외치는 건 믿음이 아니라 맹신일 뿐입니다. 우매와 어리석음을 세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정신과 정반대인 겁니다. 예수님은 혁명가셨습니다.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반항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중략) 십일조보다 더 중한 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155~157쪽)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두어 가지 있다.
무엇보다 '한국형 본격 추리소설'이란 말이 좀 걸리더라. 무엇이 '한국형'이란 말인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추리문학은 알다시피 일본과 유럽이 우리 출판계를 휩쓸고 있다. 일본의 추리문학은 주로 미스터리하고 기발한 살인이 있고, 이를 논리적으로 추리해 나가며, 허를 찌르는 반전이 기다리는 정통추리소설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다. 다양성과 재미라는 측면에선 탁월하며, 사회파 추리로 영역을 다변화 하는 것도 그들의 능력이다. 단점으론 특유의 쪼잔한 스케일과 함께 작품들의 전개가 서로 비슷하다보니 그러려니~하는 무감각, 무감동이 자리 잡기도 한다는 거다. 이에 비해 유럽형 추리는 일단 스케일이 대륙적이고, 일견 구성이 느슨한 듯하면서도 묘한 긴박감으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특성이 있더라. 주인공과 악역이 뭔가 불분명하고 모호한 캐릭터 속에서 어떤 스타일로 연결되는 매력이 강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럼 한국형은? 솔직히 장르문학이 대접받지 못하다보니 그 수준 또한 뻔한 게 현실 아닌가? 많이 나아졌다지만 '한국형'이란 이름으로 특화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재림>의 경우를 보자.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가는 지적 대결인 '추리'에 방점을 찍을 수도 없고, 사건의 연속성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스릴러'에 무게를 더할 수도 없는 애매함이 있다.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담다보니 베드로의 역십자가를 소재로 한 종교적 신비로움도 어느 수준에서 멈추고 있고, 연쇄살인 사건을 추격하고 있음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는 그저 그랬다. 한국의 사회·종교적 문제를 담았다고 한국형 사회파 추리라 하기에도 그렇고, 얕은 수준의 암호가 있다하여 본격추리라 하기에도 애매함이 넘쳐난다. 사건을 추적하는 주된 흐름과 그 배경의 장치적 배치를 어떻게, 어느 것을 앞에 둘 것인가하는 문제에서 배경의 꾸밈에 공을 너무 들이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그러니 사건 속으로 빠져들기도 어렵고, '본격추리'와는 그 성격이 어긋나고 있는 모양새다. 그 배경 또한 너무 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섣부른 '한국형'이란 정의보다는 좀 더 장르문학이 무르익어 독자들이 스스로 찬사를 보낼 수 있도록 토대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책에 또다른 특이성을 꼽자면 작가의 문학적 어휘력이다. 이것이 '한국형'의 전형이 될 수 있을까? 애움길, 칩떠보다, 일떠서다, 검질긴, 뒤보깨다, 팃검불, 명주바람, 허핍하다, 방담, 묵새기다, 피륙 등등 장르소설에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어휘에 정말 놀랐다. 이건 작가의 뛰어난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기도 하더라.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S. S. 밴 다인의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 가지 규칙'에 의하면 "탐정 소설에는 장황한 문장이나 부차적인 논쟁거리에 관한 문학적인 묘사, 섬세하기 그지없는 성격 분석, '분위기'에 대한 경도 따위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런 일들은 범죄와 추리의 기록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줄거리의 흐름을 막고 소설의 주요 목적과는 무관한 문제들을 끌어들일 뿐이다."고 하였다. 또한 "탐정 소설은 냉철한 것이며, 독자가 그것을 찾아 읽는 것은 문학적 장식이나 문체나 아름다운 서술이나 분위기 묘사 따위가 아니라 정신의 자극 및 지적 활동을 원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참으로 옳은 지적이다. 빠르게 읽어가면서 몰입해야 하는데, 이런 미사여구가 이를 막아 재미를 반감하는 면이 있더라. 추리소설이라 하여 문학적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도 내적인 심리 흐름의 증폭에 있는 것이지 어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결론적으로 <재림>은 '본격 추리'란 타이틀을 달기엔 지적 추리나 긴박한 스릴러의 면에서 다소 부족한, 나름의 색깔을 가진 탐정소설이라고 하겠다. 그래도 이러한 것들은 그저 한 개인 독서가의 소소한 불평일 뿐,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나라에도 전문 추리소설가들이 지속적으로 등단하고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활성화되어 독자들에게 더욱 사랑 받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네가 어둠을 들여다보면 어둠도 너를 들여다본다. 니체 45쪽
냉정을 잃어버린 희망적 상상은 무능력자의 환각일 뿐이다. 214쪽
인생은 상황과 의지가 씨줄날줄로 교직된 옷감이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어떤 의지로 반응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라는 피륙의 결이 결정된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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