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 - 서양이 저지른 기나긴 테러의 역사
노엄 촘스키.안드레 블첵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사회현상을 냉철히 바라보고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낸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지식인은 많으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이가 적은 시대에, 세계의 양심이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일컫는 노엄 촘스키나 슬라보예 지젝만큼 호소력 있고 울림이 큰, 우리 시대의 지성이 또 누가 있을까? 이 두 분과 관련되는 책은 괜히 눈이 가더라.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국제 문제에 있어 프로파간다 모델을 통해 주로 미국(또는 서양의 강대국)의 부당한 횡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반미 성향인데 비하여, 지젝은 라캉, 헤겔, 마르크스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하여 주로 자본주의의 병폐에 포괄적으로 간여하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두 분 모두 좌파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그런데 우리는 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존적이고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도 이 두 분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소통 없는 일방적 국가정책이나 완연한 기업 친화적 경제에 대한 우리의 현실적 괴리감과 고민이 투영되었기 때문은 아니련지…….

 

  촘스키나 지젝의 네임벨류가 상당하다보니 이들의 이름이 들어간 책은 제법 여러 권 읽었지 않나싶다. 촘스키의 최근 책들은 대부분 대담집(인터뷰)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이번에 읽은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 서양이 저지른 기나긴 테러의 역사> 또한 그러한 책이었다. 이런 류의 책은 대담 주인공(인터뷰이)의 견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담 진행자(인터뷰어)의 역량에 따라 흐름과 수준이 결정되는데, 이 책의 인터뷰어 '안드레 블첵'은 지구촌의 분쟁지역을 누비면서 취재·보도하는 저널리스트이자 기록영화 제작자이다. 그래서인지 현장 경험적, 실증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꽤 깊이 있는 담론을 무리 없이 이끌어나가더라. 촘스키의 미국과 서양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_'식민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참된 자유로의 갈구'라고 표현하면 될까?_, 불편한 진실을 은밀하게 가리는 프로파간다 모델의 실상을 도발적으로 파헤치는 게 제법 인상적인 인터뷰라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말을 읽으면 이 책의 요지가 바로 보인다.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침략과 전쟁, 그리고 잔혹한 분쟁은 "그 모든 비극의 거의 전부가 서구의 지정학적 혹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촉발되었고 조종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잔혹한 사건들에 관한 '정보'라는 것은 터무니없이 제한되어 있었고 왜곡되어 있었다는 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현실이 다른 이유는 뭘까? "실패로 끝난 봉건국가들이 '활기 넘치는 민주주의'로 칭송받고, 시민을 억압하는 종교적 정권이 '참을성 있고 온건한' 나라로 묘사된 반면, 국민주의 국가나 사회지향적인 국가들은 끊임없이 악마 취급을 받았고 그들 고유의 대안적 개발 모델 및 사회 모델은 혹독한 비난을 받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암울한 색채로 그려졌다(17쪽)"는 말이 이 책의 전체 흐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게다가 런던과 워싱턴의 영리한 선전원들은 지구촌 시민들을 '불편한 진실'로부터 확실히 '보호'_프로파간다와 대중매체의 속임수_했다고 하니 안 봐도 비디오인 셈이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무언가를 행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든지. (21쪽)

 

  목차만 따라가도 이 두 분의 색채가 보인다. 그 첫 번째 제목이 "식민주의의 포악한 유산"이다. 2차 대전이 끝난 이래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고매한 슬로건 아래 자행된 서구의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로_서양이 일으킨 전쟁, 친親서방 군사쿠데타, 기타 형태의 분쟁_ 인해 5,000~5,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건데, 무서운 것은 서구 민중의 대다수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은밀한, 그러면서도 잔혹한' 서양의 범죄적 이기주의를 고발하고 있는데,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서양의 문화는 어찌어찌 처벌을 모면했으며, 지금도 자신들이 일종의 도덕적 권한을 거머쥐고 있다는 확신, 자기네 조직과 미디어와 가치관을 통해서 이 세상을 좌지우지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온 세상에 심어주고" 있는 서양인들의 놀라운 성과가 어떻게 된 건지에 대해 인터뷰어는 촘스키에게 묻고 있다. 그 실례의 하나만 들어보면, 제노사이드(집단학살)협약에 "미합중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이 있다는 사실……. 음~

 

미국이 급진적인 이슬람에 반대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원리주의적인 회교국가가 바로 미국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다. (189쪽) 

미국이 그 나라들을 침공하여 파괴할 때는, 그걸 '안정'이라 부른다. 미국의 적들이 상업적·정치적 관계를 강화하려고 시도할 때는, 그게 '안정을 해치는' 요소라 부른단 말인가? 그런 것이 바로 이란의 위협이다. 
(203쪽)


  그런데 중국과 소련에 대한 촘스키와 블첵의 호의적 미화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소련(러시아)과 중국 등 공산(사회주의)권 국가에 대한 촘스키의 평가는 정말 후하다. 소련은 파시즘에 투쟁하느라 수천만 명을 희생하였으며, 동유럽에게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도와 그들보다 동유럽이 더 잘살게 하였고,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와 온갖 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들이 전 세계를 위해 행한 '해방운동'은 아주 훌륭한 일이지만, 서구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모든 선한 의도가 곡해되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드는 사례 중의 하나가 '소련이 지원하고 있을 때의 아프가니스탄엔 그나마 희망이란 게 있었다'는 거다. 쿠바가 아프리카 해방을 위해 싸운 일도 극찬하고 있다._솔직히 이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_ 중국에 대해서도 서구의 프로파간다가 헐뜯어서 그렇지 실제 방문해 보면 서양의 보도와 '너무나도 완전히 딴판인 국가'라고 평하고 있다. 우리가 프로파간다 시스템에 의해 세뇌되었다는 건데, 이건 너무 한쪽(서구권)을 내려까기 위해 다른 쪽의 좋은 면만 보려는 '착시'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면에서 나는 촘스키보다 지젝의 논지와 행동이 더 끌리게 된다.

 

블첵 : "소련이 지원하고 있었을 때의 아프가니스탄은 어땠습니까?"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교육자 : "아, 우리나라가 희망을 지닌 적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뿐이었습니다.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교사로 일할 수 있었고 남자들과 동일한 권리를 누렸으며, 그나마 나라가 국민을 위해서 발전하고 있던 때는 소련이 들어와 있었을 때뿐이었지요." 
(128쪽)


  알고 보면 모든 것이 '탐욕'에서 출발한 거라 생각해 본다. 블첵도 머리말에서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인간들의 고통을 야기하는 사건들의 대다수는 탐욕의 결과였으며, 지배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구대륙'과, 거기서 대서양의 반대편으로 건너갔던 그들의 무자비한 후손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들의 명분이야 얼마든지 다양한 이름을 달고 나타날 수 있지만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제국주의, 기업의 탐욕-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이 몰고 오는 것은 오로지 고통뿐인 것을!(14쪽)"이라고 하더만. _그러고 보면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이 제일 무섭다는 부처님 가르침이 정곡일침이여_ 주장하는 껍데기가 어떻든 '유럽과 미국은 자못 거만하고 완전히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태도로써' 뻔뻔하게 세상을 농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 일들이 어디 한 두어 가지인가. 이 책에서 느길 수 있는 촘스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좌경화 되어있다고 감안하더라도 그 원천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임을 나는 믿는다. 하여튼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 그리고 그 동맹국들이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짚어본 이 책, 촘스키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권할 만하다.(몇 권 읽어본 독자라면... 그게 그거 아닐까? 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언급도 두어군데 있더라...)

 
▒ 사족 ▒ :

  이해 안 되는 것 하나. 번역자나 편집자는 이 책에서 왜 경어체(블첵)와 반말(촘스키)로 구분했을까? 경어로 묻는데 반말로 답한다? 아무리 촘스키가 블첵보다 나이가 많고 인지도가 높다한들 건조한 반말로 인터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_다른 대담집은 서로 경어체를 쓴다_ 그리고 이런 이중적 언어의 흐름은 어떤 이질감과 독자의 몰입을 정말 방해하더라. 이해가 안되어도 한참 안되더라. 왜 그랬는지 정말 묻고 싶다.

 

참고로 촘스키와 블첵의 '서양의 테러리즘'에 관한 7분짜리 인터뷰 동영상을 소개.

http://youtu.be/Pee06rnp-s0 <Chomsky and Vltchek: ON WESTERN TERRORISM (working title) 7 min. te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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