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박한영 한시집 - 니르바나총서 7
서정주 지음 / 동국역경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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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간단한 메시지가 왔습니다. 가을 날씨가 추워지기에 흔히 보내오는 일종의 안부 연락이지요. 흘깃 보고 ‘음~ 그렇나?’ 하고 흘려버렸는데, 이상스레 마음 한 편에 그 흔적이 남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떤 서늘하면서도 선선한 기운이 저를 감싸는 느낌, 뭐 그런 거였습니다. 어떤 내용이었기에 그러냐고요? 잠시 옮겨볼까요.

 

나그네가 사립문을 열 때 / 새로이 서늘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초승달이 미세하게 생겨난다.

 

바쁜 나날인지라 그런 상태로 며칠을 보내다가 문장의 원전이 뭔지 너무 궁금하여 폭풍 검색 들어갔습니다. _친구는 좋은 문장이 있으면 자주 메시지를 보내지요_ 바로 찾아지더군요. D일보 오피니언에 실린  문태준 시인의 <가을의 둘레를 걷다. http://news.donga.com/3/all/20131011/58155163/1>란 글 첫 구절이었습니다. 이어서 조금 더 인용을 해보면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 석전 박한영 스님이 쓴 시 ‘새로운 가을밤에 앉아’의 한 부분이다. 빗장을 열 때 추풍이 유입되어 생기는 변화를 풍광뿐만 아니라 심경(心境)에 두루 걸쳐 포착한 절창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높은 고독도 있다.”...

 

석전 박한영 스님? 새로운 가을밤에 앉아?  스님도 궁금하고 시의 전문(全文)도 궁금해졌습니다. 다시 검색을 합니다.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큰스님은 20세기를 전후해 한국불교계의 가장 뛰어난 큰 인물로 시호(詩號)가 석전(石顚)이고, 법호(法號)는 ‘영호(映湖)’요 법명(法名)이 ‘정호(鼎鎬)’라고 나오네요. 금봉(錦峯)ㆍ진진응(陳震應) 스님과 함께 근대불교사의 3대 강백(三大 講伯)으로 추앙받았던 선승(禪僧)으로 당대 ‘선지식 중의 선지식’이라고 평가하고 있더군요.
오호~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더더욱 시의 전문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가을밤에 앉아’라는 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어떤 자료도 찾을 수 없더군요. 대신 미당 서정주 선생이 번역한 <석전 박한영 한시집>이 동국역경원에서 2006년에 출간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로 책을 주문했지요.

 

책의 해제(解題)를 읽어보니 서정주 선생과 석전 스님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미당 선생이 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제자로 삼아 이끌어 주신 분이 석전 스님이더군요. 그래서인지 선생은 석전 스님을 자신의 “뼈와 살을 데워준” 큰 스승으로 여겼다는군요.
어쨌거나 급하게 책을 넘기면서 ‘나그네가 사립문을 열 때~’를 찾아도 안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 이 책이 완역이 아닌 선역(選譯)이라더니 빠진 게 아냐? 순간 의심을 하면서 다시 찾아도 안보입니다. 약간 당황하면서 목차부터 살펴보니 <새 가을밤에 앉아 新秋夜坐> 가 있습니다. 얼른 펼치니 3개의 7언절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번역이 다릅니다. 문태준 시인의 글귀는 미당 선생의 번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볼까요?

 

나그네 화산서 와 판자문을 열 때 / 서늘한 바람결이 숲을 흔들고 초승달이 비치는구나

客自華山款板扉 / 新涼撼樹月生微


‘맛_느낌’이 너무 다릅니다. 일단 한시 전문을 읽어보니 그 시어의 의미가 가슴 속에서 울리는데, 정작 미당 선생이 특유의 서정성으로 번역해 놓은 문장은 도무지 가슴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짧은 한문 능력상 더 이상 언급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어떤 기대치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미당 선생 생전에 출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고(遺稿)더군요. 일종의 미완성의 작품인거지요. <영호대종사어록> 출간 당시 미당 선생이 번역을 감수한 듯했다는데, 뭔가 번역이 미진하여 이 원고를 쓰고 계셨나 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영호대종사어록>과 <석전시초>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허허 참... 대학도서관에서 <영호대종사어록> 빌렸는데...
아니 3수로 되어있는 <新秋夜坐>가 여기엔 1수만 실려 있었습니다. _이건 왜지? 대략 난감_ 뭐가 잘못인가 싶어 다시 <석전선생문집>를 빌려 찾아보니 3수가 맞네요.

 

新秋夜坐
露下涼天月始波 / 梧雲如水滿庭多 󰁚 紛然秋夢難收得 / 環海名山第幾過
雨晴祺動碧山空 / 病眼捲華秋水中 󰁚 斷壑風生明漢見 / 讀書聲自剔燈紅
客自華山款板扉 / 新涼撼樹月生微 󰁚 絶憐昨夜狂風雨 / 倒折蘭花濕不飛

 

한자를 알고 한시 구조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있어 의미는 잡힙니다만 전문가가 아니니 말을 다듬고 문자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서정주 선생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_그래도 느낌상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 그리고 석전선생문집에는 新涼撼樹로 되어있는데, 박한영 한시집에는 新凉撼樹 涼→凉으로 되어 있더군요. 뭐 약자이니 같다고 봐야죠._

 

이슬 밑 맑은 하늘 달은 밝아 물결치고 / 구름은 물과 같이 뜰에 가득하여라
어지러운 가을 꿈 거둘 길 없어 / 명산대천을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비 갠 뒤 푸른 산은 비었는데 / 눈 떠보니 가을 물 맑기도 해라
구렁에 바람 일고 은하수도 뚜렷할 때 / 글 읽는 소리소리 등잔 속을 파고드네

나그네 화산서 와 판자문을 열 때 / 서늘한 바람결이 숲을 흔들고 초승달이 비치는구나
애석하다 어젯밤 거센 풍우 / 난초꽃 꺽어놓고 젖어서 날지도 않네

 

아 참... <영호대종사어록>엔 1수의 번역을 이렇게 해 놓았네요.

이슬내린 하늘에 달빛이 구비치니 / 오동잎 그림자 뜨락에 질펀하다.
어지러운 가을 꿈을 가누기 어려워서 / 명산찾아 헤매온지 몇 번이던가?
(영호대종사어록 133쪽)

 

여하간 석전스님의 한시엔 맑은 기운이 넘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문기(文氣), 즉 선기(禪氣)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향기롭더군요. 실은 <석전 박한영 한시집>보다 석림수필, 석전시초, 불교지 게제문(佛敎誌 揭載文) 등이 실린 <영호대종사어록>에서 그런 느낌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_이 책은 1988년 비매품으로 나온거라 고서적을 뒤져도 매물로 나온 것이 없더군요._ “나그네가 사립문을 열 때 / 새로이 서늘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초승달이 미세하게 생겨난다.”라는 문장 하나에서 알게 된 석전 스님! 그 분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연이요 나의 복덕(福德)이라 생각해 봅니다.
비록 원하는(?) 문장은 찾지 못했지만 _문태준 시인 자신이 번역했을 수도 있겠지요. 나중에 물어보렵니다._ 참으로 좋은 공부가 된 시간이었습니다. 뭔가 더 적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서 이만 해야겠습니다. 모든 게 고마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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