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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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큰 기대감 없이 몽환적 표지에 끌려 손에 잡은 책 <안녕, 긴 잠이여>, 그런데 의외로 읽는 재미가 솔솔한게 괜찮다~는 느낌이다. 일종의 사회파 하드보일드 탐정 미스터리라 하겠는데, 제법 얼개가 탄탄하여 지루하지 않고 끝까지 시선을 끌어나가는 힘이 있었다. 점층적으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사립탐정 사와자키의 까칠한 캐릭터도 나쁘지 않았으며, 일본의 사회 현상과 전통문화를 치밀하게 그려내는 서술도 무난했고, 무엇보다 그 끝을 속단하기 힘든 짜임새가 마음에 들었다. 보통 이런 류의 책들은 중반 즈음이면 그 범인과 결말이 유추되는데, 보기 좋게 나의 생각이 빗나갔다는 점에서도 후하게 평가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 반전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의표를 찌르는 반전은 있었지만 조금은 생뚱맞은 후반의 전개가 감동을 빼앗아 가버렸달까... 하여튼 흥미로운 탐정소설인건 분명하나 놀랄만한 충만함 하고는 약간 거리가 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미국 추리 작가 엘러리 퀸이 추리소설 평가를 위해 만든 10가지 관점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구성, 서스펜스, 의외의 결말, 성격묘사, 무대, 독자와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으나 해결방법의 합리성, 문장, 단서, 살인의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미흡해 보인다. 물론 "이건 미스터리 추리가 아니라 탐정소설이야~" 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추적하는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그 영역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내 생각에서 그렇다는 거다.

 

소설은 두개의 테마가 교차되면서 풀어나간다. 하나는 주인공 사와자키가 있는 탐정사무소의 전 주인이자 파트너인 전직 형사 와타나베를 쫓는 경찰과 폭력단에 얽힌 이야기가 씨줄로 전개된다. 경찰이 폭력단의 각성제(아마도 覚せい剤인 모양인데, 그냥 우리나라 표현으로 '마약'이라고 번역하였더라면...) 거래 현장을 덮치기 위해 와타나베를 미끼로 이용했는데, 이 사람이 일억 엔의 돈과 마약을 가로채 튀어버린 거다. 또 하나의 전개는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의뢰받아 추적하는 스토리가 날줄로 짜인다. 일본 고교야구로 유명한 고시엔 대회에서 승부조작 혐의를 받았던 우오즈미. 그가 조사를 받는 시점에 그의 누나가 아파트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고 하는데, 우오즈미는 이를 못 믿어 한다. 사와자키가 그 죽음의 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은 잘 짜였지만, 진실의 이면은 참 허탈하더라. 만약 클라이맥스의 내용이 조금만 더 지적이고 타이트했더라면... 아마 큰 상을 받았을 거라 혼자 생각해 본다. 그래도 이 소설을 통해 일본 최고(最古)의 전통무대예술 노(能)에 대하여 알게 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노(能 : 노가쿠能樂의 줄임말)는 절제된 춤과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종의 가면극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가 봤던 많은 이미지가 '가부키'와 관련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까운 이웃이지만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이 책의 작가 하라 료(原 りょう)는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가 창조해 낸 불멸의 캐릭터 ‘필립 말로’에 흠뻑 빠졌던 모양이다. 감정이 없는 듯 차가우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내포하고 있었던 필립 말로의 캐릭터를 그대로 탐정 사와자키에게 이입시켰다. 비열한 세상을 고독하면서도 거칠게 헤쳐 나가는, 약간 건조한 듯 냉소적이면서도 인간미가 있는 캐릭터이다. 물론 담배와 폭력은 기본이고... 뒤표지에 "당신이 기대하는 정통 하드보일드 미학의 최대치'라고 한껏 미화하여 카피를 뽑았는데, 아무리 필립 말로에 대한 오마주(hommage) _ 이 책의 제목 <안녕, 긴 잠이여>도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과 <빅 슬립>에서 차용했다고 하네... _ 라고 하지만 요즘의 거친 정서론 약간 뻥튀기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작가의 전작 사와자키 시리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정통 하드보일드의 느낌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제2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고, <내가 죽인 소녀>는 198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름과 함께 나오키상(102회)을 수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본 사와자키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배제된 무채색으로 느와르적 현실을 직설적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나가는 사와자키의 캐릭터가 아무래도 필립 말로의 느낌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두 캐릭터가 냉소적 따스함이란 면에서 비슷하지만 필립 말로의 외로운 듯 차가운 눈빛이 이 책에는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짙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고품격 미스터리" 정도는 아니고 그냥 읽을 만한, 읽고 후회하지 않을 수준의 일본형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라고 평가하면 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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