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민이 주인이 되어 국민을 위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제도 즉, 링컨의 그 유명한 "국민의(국민주권), 국민에 의한(국민자치), 국민을 위한(국민복지)" 정치가 이루어지는게 민주주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껍데기만 민주주의 국가일 뿐 사실상 독재정권의 형태인 국가가 어디 한둘인가. 세습적 권력승계의 북한의 정식명칭을 보더라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니 이때의 민주주의는 또 뭐람. 하긴 공산주의도 극단적 민주주의의 한 예라고 보면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보편적 민주주의의 목표가 자유와 평등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 동네도 빨리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중세시대만 하더라도 동서양 구분 없이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사회였는데 어떻게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민주사회로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일까? 중세시대야 안봤으니 뭐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현대에 들어 중동 지역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민중 봉기를 보면 민주주의란 정체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게 분명해 보인다.
학부때 배운 민주주의 정체(政體)에 대해 다시 배운다는 느낌으로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Of The People, By The People>를 읽었다. 크게 재미있는 내용이 아닌, 역사적 현실을 서술한지라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정의나 이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 시대 문화와 역사의 반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오롯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최초의 민주주의가 고대 아테네에서 태동한 이후 중세 길드와 동업 조합의 코뮌체제에 대한 귀족들의 간섭이 심해지자 13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포폴로(Popolo, 민중이란 뜻)운동이 새로운 통치형태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근대민주주의의 권력분립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까지 수평파(Levellers) 운동과 퍼트니 논쟁(Putney Debates), 권리장전으로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가 사뭇 흥미롭게 펼쳐지고, 이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청교도적 교회 공동체 문화가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역사는 참 배울게 풍성하다. 프랑스 대혁명(1789) 후에 결성된 국민의회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문'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서 '자유'에 대한 명료한 규정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데 읽어도 읽어도 마음에 드는 명문이다.
○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인민으로부터 유래한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명백히 인민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224쪽)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전쟁과 관련한 인간의 기본권, 인민주권, 공화제, 권력분립 등등은 고교시절 윤리시간에 핵심을 주워들었지만 그 이면의 과정을 몰랐는데 이 책에서 상세한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이들 나라 외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불안한 민주주의와 19세기 유럽에 있어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영향 등이 다루어지고 있으나,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사회주의적 사상이 확산되는 20세기 민주주의 편이다. 볼셰비키 세력의 선거에 대한 인식을 잠시 보면, 선거는 "억압받는 계급이 몇 년에 한 번씩 인민을 '대표하고 억압'할 유산계급 대표를 결정할 권리를 누리는 착취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를 악용해 집권야욕을 합법화하고 있으니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주창된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파괴에 혈안이 된 우파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 민주주의의 몰락을 재촉하지만, 1945년 미국과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로 탈 식민지화 과정이 시작되고 민주주의 역사의 물길이 몰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지게 된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도 읽을거리지만 <유럽 공산주의의 몰락>편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그 근원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며,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어디까지 왔는지 자문하게 하는 책이다. "민주주의는 늘 공격당하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정부뿐 아니라 뿌리 깊은 기득권층과 부유한 기업 및 개인의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어막이다. 민주주의는 무미건조한 지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뿌리내린 온갖 믿음과 가정들을 한데 묶은 것이며 그만큼 싸워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데 밑줄을 그어본다.
○ 현대 민주주의가 프로테스탄트 문화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철저히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에 국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칼뱅파와 비국교도 집단의 역할은 그 의미를 곱씹어볼 만하다. (99쪽)
○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 준 것은 상속받거나 일하지 않고 얻은 부(副 --> 富 오기)보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더 고귀하다는 믿음이었다. (196:6쪽)
책의 뒷부분(486쪽)에 보면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 EIU)에서 2008년에 발표한 ‘민주화 지수(democracy index, DI)’ 결론을 보면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민주화 추세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확산이 중단되었다."고 하였고, 2010년 판의 요약된 내용 제목은 '후퇴하는 민주주의'로 "2008년 이래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위축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EIU의 민주화 성과 기준은 무얼까? 첫째 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주의의 존중(electoral process and pluralism), 둘째 시민의 자유(civil liberties), 셋째 정부의 기능성(functioning of government), 넷째 정치 참여(political participation), 다섯째 정치 문화(political culture) 이렇게 5대 평가 부문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의 경우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평가 받는지 언급되어있지 않아 얼른 인터넷을 서핑하여 찾아본다. 한국은 2011년 평가결과 총점 8.06점/10점으로 22위(2010년도 20위)를 기록하여 '완전한 민주주의 full democracies' 국가로 분류되어있고, 북한은 2010년에 이어 총점 1.08점/10점으로 167위로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적 흐름에 뒤쳐졌니 어쩌니 선전하고 있으나 이런 권위 있는 평가로 보면 그렇게 뒤쳐지는 것이 아닌 듯하다. 물론 EIU 지수에서 최상위를 기록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덴마크 등 민주주의 선진국에 비해선 아직 부족한 것이 많겠으나 자괴감을 가지거나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룬 세계 유일의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유신체제의 잔재를 극복하며 지난 20년간 민주화를 일궈냈고, 앞으로도 잘 일구어 갈 것으로 믿어진다. 부디 한국에서 더 이상 피를 먹지 않아도 자라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길 기도하면서 책을 덮는다.
○ 민주주의 속에서 산다고 해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이 정부나 정치인들에게 반드시 만족감을 느끼리라는 보장도 없다.(493쪽)...... 갈등을 겪고 나면 합의를 바라고 그 이후에는 대안을 가져다줄 비전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더 그럴듯한 정치적 비전을 좇아 민주주의를 저버린다면 그보다 큰 실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유혹을 (대체로) 뿌리쳐왔다는 사실에 인류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껴도 될 것이다.(494쪽)
<참고> 2011년 Democracy Index
○ 2011년 DI 이 자료는 http://www.eiu.com/public/thankyou_download.aspx?activity=download&campaignid=DemocracyIndex2011 에서 pdf 파일을 내려받았다. 파일용량이 커서 올리기가 그렇고... 2010년 22위였던 일본이 2011년 21위로 우리보다 한단계 앞섰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