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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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이드(Genocide)란 단어는 2000년대 초반, 유명한 해커의 이름 때문에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여 다시 포털사이트 사전을 찾아보니,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집단학살'을 뜻한다고 나온다. 이번에 읽은 <제노사이드> 표지를 처음 봤을 때 거기에 적힌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란 카피에서 특정 집단을 말살할 목적으로 대량 학살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루는 책인가 짐작하였는데,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지적인 신종인류의 출현과 현생인류 멸망의 가능성을 엿보는 스펙터클한 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추! 또 강추!!! 일본 서점 대상 2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65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제2회 야마다 후타로상 수상, 제145회 나오키상 후보작이란 명성이 헛말이 아닌 책이다.


련하다. 일본 SF 스릴러 문학이 이 정도까지 발전하였던가. 항상 쪼잔(좋은 말로는 치밀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스케일이라니…….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블록버스터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아프리카 콩고 정글에서의 전투 씬, F22 랩터와 긴장감 도는 공중 조우,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광에게 실제 무인정찰기 프레테터를 조종하게 하여 미국 부통령을 테러, 전산망을 해킹하여 화력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를 교란하는 초인류의 용서 없는 반격은 서스펜스를 한껏 고조시킨다. 아프리카의 내전의 잔혹한 살상 이야기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 들었지만 소설 속 그 생생한 묘사에 전율한다.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잔학성은 어디에서 온 유전자일까. 일찍이 지구상에 있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原人)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가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와 함께 작가는 인간의 폭력성을 경제활동의 에너지로 교묘하게 전환한 시스템이 자본주의라는 시각을 노출하며, 어찌 되었건 인간이란 동물은 원시적인 욕구를 지성으로 장식해서 은폐하고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거짓으로 가득찬 존재로 풀어내고 있다.


건의 핵심은 신종 인류로 추정되는 세 살 아이 '아키리'이다. 인류 사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미국은 '누스(NOUS 초월적 지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는 암호명을 부여, 말살 작전(작전명 : 네메시스)을 세운다. 아키리의 모습은 "인간의 유아와 비슷한 생물의 머리는 걸맞지 않게 비대했다. 발달된 전두부가 둥글게 튀어 나왔고, 이마에서 턱에 걸쳐서 윤곽이 급격하게 좁아져서 삼각형을 그렸다. 몸집은 세 살배기 어린애 정도였지만 얼굴은 그보다 어렸다……. 인간의 유아와 크게 다른 특징은 좌우 관자놀이 쪽으로 올라간 큰 눈이었다. 눈을 치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서 명석한 의식과 지성이 느껴졌다."고 그려진다. 현생인류의 지식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는 아키리. 그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의 짜임은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하다. 누스를 제거하려는 미국의 백악관 팀, 콩고에서 누스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보호하게 되는 4인의 용병과 인류학자, 아버지의 죽음과 신약개발의 임무를 물려받은 일본인 대학생과 한국의 유학생, 이 세 파트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장면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데 그 얼개가 정말 칭찬할 수밖에 없다. 94쪽에 딱 한번 나오는 우간다 청년 '사뉴'가 534쪽에서 다시 나타나는 연결은 그 치밀한 플롯의 한 예에 불과하다. 아버지와 불륜의 관계로 오인했던 묘령의 여인 '사카이 유리'의 캐릭터도 훌륭한 조연으로 기억된다. 인간의 잔혹성 속에서도 유전자 질환에 걸린 아이를 위해 용병으로 나서는 예거,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신약개발에 나서는 두 청년의 모험적 활약에서 훈훈한 선한 인간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도처에 깔린 암시와 복선이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칭찬을 아니할 수 없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 디자인 등 전문적 분야의 묘사를 위해 작가가 인터뷰하고 도움을 받은 분들의 면면을 보니 얼마나 준비한 작품인지를 알겠다.

 

레져 보이는 부분으로, 보통의 일본 책에서 볼 수 없는 한국 유학생이 일본의 주인공 대학원생과 호흡을 맞추며 활약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이수현(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읽은 유학생) 씨의 숭고한 정신을 담아낼 생각을 했다"고 한다. 공정하게 서술한 관동대지진이나 난징대학살 묘사 때문에 일본 우익들로 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은 모양이지만, 이런 분들이 있어 한일간 선린의 작은 밀알이 싹트지 않겠는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망자가 최소 10만 명이라고 한다. 미국을 탓하려면 일본의 과거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작가의 용기 있는 역사인식과 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SF 스릴러 속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철학적 코드를 넣은 지적 소설이다. 장르소설임에도 녹녹치 않은 여운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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