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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관계술 - 허정과 무위로 속내를 위장하는 법 ㅣ Wisdom Classic 5
김원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에피소드 1.
중국 고전의 바다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 시기가 있었다. 한자가 쉬웠고 한문 해독이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천자문을 떼자 동몽선습, 그 다음 소학과 명심보감까지는 눈물의 맛을 본 덕분일 것이다. 그때 그랬더라면……. 경영학을 전공할 것이 아니라 한문학이나 중문학을 택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오경을 시작으로 무던히 읽어 내렸다. 그냥 끌렸다. 서양철학은 틈 없이 꽉 짜인 서술이 그저 어렵기만 하는데, 중국의 사상사는 여백으로 가득 차 있어 나의 느낌으로 채울 수 있어 좋았다. 이쯤에서 나의 성정이 정순하지 못함을 고백해야겠다. 지금 나이에 사서삼경을 읽는다면 아마도 삶의 길을 지적으로 풀어내는 중용과 대학에 가장 먼저 매료되었을 거라 본다만, 젊은 시절의 내겐 유학의 향기는 너무나 답답·갑갑·타분한 하기만 하였다. 자연스레 제자백가의 사상으로 마음이 돌아갔다. 그때에 한 눈에 반한 사상가가 한비자(韓非子)이다. 그의 정치이론은 매우 현실적이며 실천적으로 다가왔다. 경영자의 길을 꿈꾸던 그 때의 나에겐 리더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지침이요 나침반과 같은 사상이었다.
2. 선거의 시즌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는 모양이다. 이 즈음이면 각종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이 중에는 제자백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왕의 통치학과 2인자들의 처세에 관한 책들이 단연 눈길을 끌게 된다. 무엇보다 실제의 사례에서 오늘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에 의한 미국의 대통령제와는 달리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강력한 힘을 발하는 제왕적 대통령(위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지금의 MB 대통령까지 막강한 파워로 자신의 의지대로 나라를 이끌어 갔다. 그런데 대부분 그 끝이 별로 였다. '민주'라는 이름을 누구나 다 존재의 이유로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지배 논리가 냉혹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사회에 발을 디딘 순간 우리는 직감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추적자'가 인기 있었던 이유도 후흑한 리더들과 정치와 경제의 검은 커넥션이 그럴 수 있겠다는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믿음이 상실한 시대에 과거의 대통령과 같은 분이 또 지도자가 된다면 마키아벨리나 한비자의 사상이 제격이다. 그러나 정말 민주적인 리더가 우리를 이끌게 된다면? 이런 마키아벨리나 한비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똘마니 사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제까지 불신과 독재의 리더에 맞는 사상을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할 게 많다.
3. 혼탁한 세상.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세상이라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나, 법치(法)와 권세(勢) 및 술(術)로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한비자의 사상이 지금의 시대에도 정말 어울린다. 특히 한비자의 생각은 경쟁, 소유권, 이기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이념과 맞아 떨어지는 면이 많다. 한비자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한비는 법가사상의 3대 축이었던 상앙의 법(法, 군주가 제정한 성문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법규), 신불해의 술(術, 수단을 말하는데 신하와 백성을 좌우하는 권술을 가리킴), 신도의 세(勢, 군주의 권세를 말하는데 군주에게 권세가 있어야만 법과 술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를 종합하여 '법치사상'을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스승인 순자에게서 배운 성악설을 바탕으로 철저히 이기적 존재인 인간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면 엄격한 법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군주는 이를 위해 수단과 도구로써 법, 술, 세를 잘 활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니 신자유주의시대의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아직도 한비자의 법치사상에 리더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인간 불신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술수 중심의 통치술을 오늘에 인정할 수 있을련지…….
4. <한비자의 관계술>를 읽었다. '허정(虛靜)과 무위(無爲)로 속내를 위장하는 법'이란 부제에 이 책의 지향점이 숨어있는데, 그의 서문에 보면 기존의 한비자 관련 책들이 주로 권력론과 군주론을 다룬 측면이 강한 반면, 이 책은 인간관계론의 입장에서 다루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전체를 4장(나를 감추고 상대를 움직이는 술, 사람을 경계하며 조정하는 술, 가까운 곳부터 살피는 자기관리의 술, 현명한 불신으로 사람을 다루는 술)으로 나누어 춘추전국시대를 주축으로 시대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고전 속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일단 재미있고 흥미로운 사례에서 오늘을 유추할 수 있는 배움이 쏠쏠하다. 험한 경쟁의 사회에서 리더에게 찍히지 않고 모시려면, 또는 리더로서 부하에게 배신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꼭 읽어두어야 할 유용한 내용들이 많다는 거다. 인간불신의 철학, 비정한 리더십을 강조한 한비는 군주가 신하를 성악설의 관점에서 보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사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틀린 현실이 아니지 않는가. 허정과 당위는 제나라 선왕이 당이자(唐易子)에게 새를 쏘아 잡는 일에 대해 묻는 고사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말의 근본은 노자의 사상이다. 무위는 자연적인 상태에 맡기고 인위적인 것은 아무 것도 더하지 않음이요, 허는 진중함을 의미하며 반드시 정(靜)한 상태로 나타난다. 한비는 무위만이 사람 속을 엿볼 수 있는 수단이라 하였는데 이 책은 이런 허정과 무위에 초점을 맞추어 풀어나가고 있다.
군주가 신하를 조종하는 일곱 가지 기술(七術) : 신하들의 말을 사실인지 알아보는 것, 반드시 벌하여 위엄을 분명히 보이는 것, 상을 꼭 주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 일일이 말을 들어 부하를 살피는 것, 그럴 듯한 명령으로 속여 일을 시켜보는 것, 아는 것을 감추고 묻는 것, 거짓을 꾸미고 일을 뒤집는 것. 189쪽
5. 이 책은 엄청나게 많은 고사로 인해 정말 재미있게 읽히는 건 분명하지만, '소통'이 화두인 이 시대에 인간불신의 철학, 비정한 리더쉽을 강조하는 한비의 견해는 일견 한물 간 논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한비자에 호의적인 지인들이 많다. 냉엄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한비의 논점이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부하의 충성심 따위가 얼마나 덧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상대의 충성에 기댈 것이 아니라 상대가 도저히 배신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카리스마의 사상이 야망의 남성들에겐 솔깃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더불어 잘되는 리더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허정과 무위로 나를 숨기는 것이 지략과 책략의 출발점'이라는 말은 이제 얕은 술수로만 여겨져 반감이 가지만, 가끔씩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면 한비자의 가르침이 깊이 와 닿는다. 부드러움과 민주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은 권위주의의 산물로 보일지 몰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의 사회에서는 무시하기 힘든 끌림이 있는 책이다. 특히 직계(Line)조직이 강한 직장인은 필독할만한 책이다. 신뢰보다 불신, 화합보다 경쟁, 정직과 성실 보다 권모술수가 앞서는 조직원은 정말 읽어야할 책이라고 본다. 나의 젊은 한 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게 했던 책 한비자.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오늘에 읽어도 괜찮기만 하다. 그런데 이번에 뽑히는 대통령은 어떤 유형의 리더일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