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시詩적 생각법'
황인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詩)가 어렵다. 80년대의 서정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어감의 시는 언젠가 부터 보이지 않았다. 신춘문예의 당선작들도 난해하고 서걱거리는 글들로 지면을 채운다. 시가 꼭 서정적일 필요는 없지만 시인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으니 시를 통해 느끼는 충만함과 감흥이 사라졌다. 자연스레 시집(詩集)은 멀어져 갔다. 90년대 이후 컴퓨터가 일상 속에 자리 잡으면서 시에 대한 관심은 더욱 희미해졌다. IT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느라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관조한다는 일은 점점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간간히 시집을 선물 받아 읽어보긴 했으나 두어 권을 빼고는 여전히 와 닿지 않았다. 간혹 서점에 들르면 관성에 의해 시집 코너에 발길을 옮겨보나 그다지 끌림은 없다. 이런 현상이 꼭 나만의 일은 아닌 모양이다. 한 인터넷서점의 조사에 의하면 자칭타칭 시인은 많아졌지만 시집 판매는 전체의 5%도 안된다고 한다. 시를 읽기보다는 씀으로써 위안을 느끼는 추세로 보는 분도 있다. 소수의 시인을 빼곤 자해하는 심리의 노출이나 사적 일기 수준에 머물다보니 '독자 없는 시인의 시대'라 한들 별로 틀린 말 같지 않다.


문자와 영상이 홍수처럼 떠도는 이 시대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좋은 시는 인간의 감정과 여백미를 절제하고 농축한 사유의 결정체이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본질의 문학이다. 그러기에 김연수 작가는 그의 책 <우리가 보낸 순간>에서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고 하였으리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임팩트가 약하다. 문학을 늘 가까이 하는 작가야 시를 읽음으로써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정도겠지만, 세파에 찌들리는 일상인에게 격조 높은 시는 자신의 본원적 문제에 귀착될 수 있다. 시 한 줄에서 찰나와 영겁을 오가는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정보화의 물결과 자본주의의 머니게임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힘든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때에 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멀어진 영혼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그런데 여전히 시는 어렵고 난해하며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시인이라 하기 어렵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으면 그저 공허한 시인만의 '혼자 놀기'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좋은 시를 보고도 한 마음에 이해되지 않으면 바로 내치는 독자의 성급함도 문제라면 문제다.


《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황인원 교수의 책은 조금 시각이 독특하다. 시를 통해 단순히 '감정의 대체적 정화'에 머물지 않고 경영학의 영역까지 그 활용적 접근을 시도한다. 작가의 변을 보니 대략 그 의도는 알겠는데 발상의 전환이 참 신선하다. 그는 독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를 안읽는 이유에 대해 국내 교육이 시의 표현법만 가르쳤지, '생각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시는 상상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기에 고착화된 사고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창의성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거다. 한마디로 "창조적 리더들은 시를 통한 생각법이 비즈니스 아이디어와 영감의 원천임을 안다"는 것인데 학문적 융합의 새로운 모델로 느껴지는 게 어찌 참신하지 않겠는가. 저자의 의도는 책의 목차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기존의 시 감상법처럼 듣고(問) 보고(見), 깬(覺) 후,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를 잘 엮고(編) 행(動)하라는 거다. 시 한 줄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나눠 관찰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통찰로 나아간다는 것은 '실용적 시 읽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새로운 생각의 힘을 시인들의 통찰법에서 찾고자 하는 시인의 생각이 사뭇 흥미롭다.


읽어나가다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만난다. 서정시인 박재삼 선생의 <천년의 바람>이다. 바람은 분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제도 바람은 불었고 오늘도 바람은 분다. 그런데 '분다'는 행위가 천 년 전에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점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246쪽). 작가는 시인의 남다른 관찰을 지적하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은 수없이 이뤄지는 연습을 통해 그 능력을 쌓는다고 설명한다. 바람은 천 년 전 장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지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플랫폼을 갖추지도 않았으면서 무작정 창조와 창의를 강조하며 단번에 통찰력을 키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그래서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다가 지쳐 포기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앞서 작가가 설명한 "관찰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며, 경청은 들리는 것을 듣는 게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는 것이다(151쪽)"는 말이 반복하고 또 반복함에 의한 경지임을 자각하게 한다.
시를 일컬어 '뻔히 보임에도 보지 못하는 부분'을 드러내는 예술 장르(137쪽)라고 하는 의미를 알겠다. 이 책은 이렇게 시를 통해 독자들의 감각을 깨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 지도록 '시적 생각법'을 이끌어 내고 있다. 창조와 혁신을 꿈꾸는 CEO들의 사고력과 기획력을 증진시킬련지는 모르겠으나 시에 대한 감상법을 키우기엔 제법 괜찮은 책이다.

 

천년의 바람 - 박재삼 -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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