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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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다윗이 시온 요새를 점령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그곳은 도시가 아니라, 자그마한 산악 요새에 불과했다. 그 땅은 훗날 가나안, 유다, 유다왕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인들의 성지,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과 같은 수많은 이름을 갖게 된다. (53쪽)
예루살렘은 만인의 도시다. 예언자들과 교부들, 아브라함, 다윗왕, 예수 그리스도, 다윗왕, 그리고 무함마드가 이 도시의 초석을 놓았다. 아브라함의 종교들은 그곳에 태어났고, 심판의 날 세계가 종말을 맞이할 곳도 그곳이다. 예루살렘은 경전의 민족들에게 봉헌된 곳이며, 성서의 도시다. (10쪽)


예루살렘! 고교시절까지 나에게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주일학교에서 이스라엘은 선한 하나님의 군사이며 팔레스타인을 포합한 아랍권은 악의 무리라는 설교를 여과 없이 들었기에 당연히 그러려니 했었다. 시편 77에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으니, 이스라엘과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가 곧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여졌다. 대학에서 여러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이 아주 무서운 편견임을 깨달았다. 종교의 색채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우리 사회가 미국의 관점에서 세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선하며 아랍권은 악이란 말인가? 이들의 싸움 이면에 존재하는 야훼의 유대·그리스도교와 알라의 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선과 악의 나눔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의한 것은 아닐련지…….


3천여년전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솔로몬 왕이 첫 성전을 건축한 이후 이스라엘 족속에겐 이곳이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되었겠지만, 약 2천여년전 로마제국에 의해 디아스포라(Diaspora)되고 난 이후 예루살렘은 이름도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뀌었고, 이스라엘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이 지역은 아랍권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발원지이기도 하지만 이슬람교의 성지가 곳곳에 존재하는 성스러움의 상징적 도시가 되었다. 분명 영광만이 있어야할 도시이건만 현실은 전쟁과 파괴, 지배가 반복되는 통곡의 도시가 되고만 예루살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을 예언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다(마23:38, 눅19:44, 합2:11)"고 하셨는데,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계시가 진실이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무함마드의 입장에서 성전의 파괴는 신이 유대인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이슬람에게 하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니 비극의 씨앗은 결국 인간의 오도된 판단에 있다 하겠다.


예루살렘 전기 Jerusalem : The Biography》. 책 제목처럼 예루살렘 땅의 모든 역사를 들춰보는 장장 964쪽 짜리 책이다. 연대기적 서술이기는 하나 백과사전식 역사책 하고는 거리가 멀다. 이 도시를 둘러싼 갈등과 지배구조의 변화에 따라 유대교, 이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이란 종교적 키워드와, 십자군, 맘루크조, 오토만제국, 제국, 시온주의 등 역사 키워드 등 9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좀 더 크게 보면 다윗, 예수, 십자군,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시대를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있었던 사실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다. 단순한 역사 나열이 아니라 시대의 삶과 지배욕망의 추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에 오히려 흥미로움이 더한다. 이스라엘이 '신과 씨름한 자'라는 뜻이라든가, 모세가 신의 본질을 물었을 때 '나는 있는 자다 I AM WHO I AM'라는 위엄서린 금기의 답변을 들어 YHWH(여기서 야훼가 되고 여호와가 된다)로 표기하되 그 이름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대신 아도나이(Adonai 주님) 또는 하심(HaShem 말할 수 없는 이름)등으로 사용한다고 하니 흥미롭기 짝이 없다. 마사다의 비극에 이르면 정말 유대인의 용기에 존경을 더하게 되며, 몽골군이 예루살렘까지 진출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이를 바이바르가 격퇴하였다는 이야기는 이슬람권 책에서 많이 읽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최근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이야기>가 제법 인기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읽어보질 않았다.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면 읽을 요량이다. 이 책에서는 십자군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 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권력과 명성의 회복을 일생의 사명이라 여겨 1905년 클레르몽에서 유력자들과 일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교회를 해방시키자고 연설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교황청을 부활시키기 위한 성전의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고 죄의 구속을 대가로 이교도 청산을 합리화 시켰다. 이는 무슬림 지하드를 그리스도교식으로 변형한 미증유의 방종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대한 대중적 숭배와 잘 들어맞았다. 종교적 광기의 시대, 기적의 증표 시대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도시였으며 최고의 성지인 동시에 천상의 왕국으로 여겨졌다(355쪽). 이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쉽게 말해 십자군들은 전사인 동시에 순례자들로,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성벽 위에서 구원을 얻을려는 신자들이었다. 언제나 종교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의 뜻이다!"라고 외치지만 대학살의 이면은 백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인간의 탐욕인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선 예루살렘! 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는 이 벽은 이스라엘이 로마군에게 멸망되면서 유일하게 남은 성전의 일부라 한다. 2천년이 흘러도 그 때를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유대인의 신앙적 성소이며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는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 통곡의 벽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면 그 끝에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가 있다고 한다. 이 길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던 고난의 길이다. 영화 <벤허>에서 십자가를 지고 힘겹게 올라가는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런 성스러운 곳이 오랜 분쟁으로 말 그대로 통곡과 갈등의 땅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인류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여 괜히 심란해 진다. 정말 '인간의 광기'말고는 어떻게 설명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영국이 독일 편에 선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터키의 통치를 받고 있던 아랍인들을 부추겨 전쟁에 끌어들이는 내용을 알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국 건설을 약속하지만(1916년 맥마흔 서한), 이러한 약속을 시오니즘 운동을 펼치던 유태인에게도 똑같이 약속(1917년 밸푸어 선언)할 뿐만 아니라, 더욱 기막힌 것은 영국-프랑스가 밀약을 맺어(사이크스-피코 협약)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둘이 나누어서 통치하자는 약속까지 해둔다. 약육강식의 세계 질서구도라지만 '위대한 아랍의 반란(Great Arab Revolt)'을 불러오는 냉소적인 배신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불행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이 떠난 자리에서 1000년 넘게 터를 닦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대인의 자치지역' 건설. 전쟁은 필연적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서기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2000여년 만에 조국을 찾은 '독립전쟁' 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몇천년 동안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유대인이 와서 자기 땅을 빼앗는 '침략전쟁' 아니겠는가. 우리의 우방이 미국이고 기독세력이 이 땅에 번성하고 있기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1,000년간 예루살렘은 배타적인 유대교 지역이었다. 400년간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다. 1,300년간은 이슬람 지역이었다. 이들의 역사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다. 두 민족 간의 증오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만 전혀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평화협정에 서명만 된다면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즈는 오슬로 협정 서문에서 "예루살렘은 두 국가의 수도가 될 것이며 아랍 교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것, 유대교외는 이스라엘인들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우 간단한 듯하지만 옛 도시의 성소가 문제다. 모두가 지신들의 성소들을 관할하려하니 쉽지 않은 난관이 있다. 그래서 국제위원회가 운영하는 비무장 상태의 바티칸처럼 관리하자는 안도 나와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강경 우파 네탄야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은 예루살렘분할에 반대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각의 바탕은 자신감이다. 이스라엘의 국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한다. 이럴 때 조금 양보하고 더불어 살려고 한다면 좋으련만,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도 예루살렘을 향한 끝없는 유대인의 욕망은 종내 성전산에서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아마겟돈 전쟁을 불러올 모양이다.


유대, 그리스도교에서는 천년왕국을 위한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땅에 더불어사는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 책이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예루살렘의 역사를 중립적이고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예루살렘을 자신의 고향인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인들이나 중동의 화약고에 대한 저변 지식을 넓히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균형 잡힌 책 꼭 한번 읽어둘 필요가 있겠다.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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