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가만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공포스런 범죄 스릴러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아니, 전혀 안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의 뜨거운 피가 식어서일까? 비인간성에 의한 폭력과 노골적인 섹스 묘사, 사이코패스 등 악마 같은 인간들의 엽기가 자아내는 스릴러 등은 많이 부담스럽다. 추리소설은 일어난 살인사건에 감춰진 사실을 찾아가는 지적 게임의 하나이기에 자주 읽지만, 별 이유 없이 잔혹하게 인간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에 좇기거나 좇는 호러 스릴러 소설은 소름과 분노만 일 뿐 정신건강에 도움되는거라곤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스릴러 소설을 손에 들었다. <알렉스>란 책인데, 책 광고의 두어 가지 카피가 흥미를 자아냈다. 첫째, "<양들의 침묵>의 클래리스 스탈링 이래 가장 놀라운 여주인공의 탄생!"이란 카피였다. 소설보다 영화가 더 알려진 양들의 침묵은 역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중 가장 잔인한 영화를 꼽힌다. 평소 즐기지 않는 장르지만 이 책과 영화는 읽고 본지라 과연 <알렉스>가 비교할만한 책일련지 관심이 갔던 것이다. 둘째,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를 뛰어넘는 유럽 사회파 스릴러의 거장!" 이란 문구에도 마음이 끌렸다. 사회파 소설은 일단 내용이 있다. 살인자에게도 안타까운 이유가 있고 분노가 있다. 유럽추리소설 대상, 코냑페스티벌 신인상, 미스터리문학 애호가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묘하게 어울려 뭔가 있을 거라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책을 읽게 한 것이다.

 

책은 530여 쪽,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체 구성(플롯)과 스케일은 확실히 신선하고 놀라웠다. 각각 별개의 내용과 결말인 듯 하면서도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마지막 한 장까지 교묘하게 짜여진 복선과 반전은 전 유럽 추리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작가의 필력을 단번에 인정하게 하였다.
1부. 미모의 여성(알렉스)이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그녀는 알몸으로 조그만 나무상자에 갇혀 새장처럼 허공에 매달리게 된다. 꼼짝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공포. 나는 여기서 문성근이 연기했던 영화 <실종>이 오버랩 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납치한 여인을 감금하고 고문하던 그 영화의 사이코패스. 알렉스는 죽음을 직감한다. 괴한은 경찰의 추격을 받고 다리 밑 고속도로 위로 떨어져 자살해 버린다. 범인은 사망했고 피해자를 구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건 해결에 나선 145cm의 단신 카미유 베르호벤 형사. 그는 너무나 사랑하던 임신한 아내가 납치되어 살해된 정신적 외상을 안고 있는데, 소설은 동종의 범죄를 맡게 하여 그의 내면 감정을 추적해 나간다. 소설은 이렇게 알렉스와 카미유의 시점에서 격자무늬를 짜듯이 교차되면서 펼쳐진다. 알렉스! 갇힌 그녀를 찾아온 것은 쥐 떼. 공포는 극대화되고 서스펜스 작렬이다. 우여곡절 끝에 경찰은 알렉스가 갇힌 곳을 찾았으나 알렉스는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다. 도대체 어떻게 탈출한 것일까? 1부는 이렇게 암시와 복선, 그리고 의문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2부. 앞서 납치의 공포로 연민을 자아낸 알렉스. 2부에서는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를 좇는 카미유는 항상 뒤처지는 형국이다. 주로 알렉스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읽게 되나, 카미유의 가족사와 관련한 내면흐름도 범상하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알렉스의 범행 방법은 일단 상대를 흉기로 내려쳐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입속에 다량의 고농축 아황산용액을 들어붓는다. 그녀는 살인현장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기도 하고 노트북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지만 잠자리는 함께 하지 않는다. 섹스가 없는 유혹. 이런 알렉스를 추적하는 카미유는 황망하다. 경찰이 발견하기도 전에 스스로 탈출한 여자의 실체를 알고 보니 아황산으로 이미 세 명의 남자를 죽게 한 연쇄 살인범이라니…….그러고도 알렉스는 계속해서 트럭 운전사를 같은 방법으로 보내버린 후 그녀의 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한다. 카미유는 예기치 않게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 한 가지를 불쑥 떠올린다. 아내 이렌의 시신과 태중에서 죽은 아기. 카미유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녹아내린다. 2부는 이렇게 암울한 비극과 절망과 상처가 흔들리는 촛불처럼 어지러이 난무한다.

 

3부. 알렉스의 일기장 등 소지품을 확보한 카미유는 알렉스의 오빠 토마스 바쇠르를 심문해 나간다. 만약 이 책이 알렉스의 자살로 허무하게 끝맺음 하였더라면 빼어난 감각과 심리묘사에도 불구하고 그저 평범한 B급 스릴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3부로 인하여 이 책은 작가의 역량이 매우 유려하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알렉스가 왜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보이던 죽은 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사건의 전말이 치밀한 안배에 의해 충격적으로 하나씩 밝혀지며 놀라운 반전과 결말이 그려지고 있다. 2부까지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졌던 카미유 반장의 캐릭터가 엄청난 포스로 살아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는 이렌의 죽음에서 생겨난 악령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자기 예술세계에 빠져 자신을 방치했던 어머니에 대한 앙금도 씻어내게 된다. 트라우마의 상흔을 팽팽히 잡아당겨 힐링 코드 승화시키는 작가의 필력에서 단순 흥미꺼리 스릴러 장르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문학적 힘을 발견한다. 정말로 프랑스가 배출한 조세프 룰르타비유, 뤼팽, 메그레 경감 등 '로망 폴리시에 Roman Policier' 캐릭터 계보에 카미유 베르호벤의 이름을 추가하여도 될 만하다.

 

여러 스릴러 작품을 읽지 않아 서투른 평가일지 모르나 이쪽 장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 상당히 괜찮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생략을 통한 모호함을 섞어 독자 스스로 상상에 의해 작품을 재해석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라든지, 격자식 교차서술로 사건의 추적과 감정의 흐름을 읽어내는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책의 말미에 참 괜찮은 구절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미덕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정의"라는 말이 와닿았다. 진실과 정의라... 이 <알렉스>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 시리즈 중 <세밀한 작업>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작가의 최신작이자 국내 첫 출간작이라고 한다. "피에르 르메트르"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작품이 나올 때마다 관심 가져봐야겠다. 의외로 마음에 든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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