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
박태균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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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미국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국을 한국을 도와준 은인의 나라로 인식하거나, 아니면 한국의 내정에 끊임없이 간섭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부정적인 나라로 인식하거나 간에 미국은 한국에게 있어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국가이다. 따라서 지난 역사동안 한국과 미국이 맺은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일그러진 근 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인 동시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먼저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광복이후를 서술한다.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밝혀낸 한국의 독립에 관련된 미국의 입장은 미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전쟁을 끝내고 한국에 독립을 가져다주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는다. 미국은 결코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에게 일본을 항복을 받을 권리를 주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서의 위치를 가질 뿐이지 결코 승전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전후 일본과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쌘프런씨스코 강화조약에서도 결코 한국은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후에도 미국의 대한정책은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식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한국에 민주주의를 심었다는 미국이 한국의 수반을 미군정이 임명하는 행정위원회의의 위원이 선출하게 하는 정책을 추진했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그 당시 한반도에 행했던 정책들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밖에도 미국의 입맛에 맞는 우익에게 권력을 부여하기 위해 행했던 다양한 정책들은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작용했던 미국의 힘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어지러웠던 해방이후에 있어 미국의 입김은 거의 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 했다. 하지만 저자는 우익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인해 미국의 정책이 바꾸었던 사례를 통해 미국의 힘만을 강조하는 이전의 연구 성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변부의 힘이 중심부의 정책'을 바꿀 수 있음을 주장한다.

미국의 힘과 한국의 정치상화에 의해 탄생한 이승만정부와 미국의 관계는 '원조'를 둘러싼 이해관계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미국 국무부의 케넌이 주장한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경제, 심리적 봉쇄라는 측면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적인 원조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이러한 원조를 받기위해 국가의 군사지휘권 등을 유엔에 넘긴 이승만 정부를 파악한다. 북진통일 주장 등을 통해 겉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듯이 보였지만, 사실은 국가의 경제와 안보를 미국의 손에 넘겨버린 이승만 정부는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는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원인으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 반하는 정책으로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워놓았지만,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권력을 유지시킨다. 결국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권력을 잃는다. 하지만 뒤를 이은 윤보선 정부는 군대를 앞세운 박정희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만다. 저자는 이 부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윤보선 정부가 쿠데타를 막을 의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군대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사실은 쿠데타 세력을 용인한 것이 아닐까. 또 한국의 전체병력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박정희의 세력이 손쉽게 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직간접적인 미국의 지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국의 자료가 충분히 공개되어있지 않아서 진실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저자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의심을 통해 박정희의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의심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이론적인 기반과 함께 직접 정책에도 참여했던 로스토우의 주장과 함께 더욱 증폭된다.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성장이 우선시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일시적인 민주주의의 유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전근대사회에서 자유로우며, 젊고 혁신적인 장교 그룹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박정희가 그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유신도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은 결국 박정희의 쿠데타를 용인한다. 하지만 이때부터도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큼 순탄치 않았다. 북한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하는 한국의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한일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박정희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김종필의 제거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결국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통해 박정희는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안에 집중시킨다.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 간의 갈등은 권력을 독점한 박정희와 미국이 겪는 갈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엄청난 제정적자로 주한미군을 줄이고자 했던 미국과 정권유지를 위해 그런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박정희는 베트남에 전투병을 파병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전투병이 필요했던 미국과 외화벌이와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희생할 젊은이가 있었던 한국의 이해관계가 만나 엄청난 수의 젊은이가 파병되었지만 결국 한국이 원했던 미국과의 동등한 외교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진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박정희 정부가 끝나고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설 때도 어김없이 의문을 남긴다.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은 미국에게 과연 광주사태의 책임이 있는가의 문제에서, 한국의 민주화세력을 결코 신뢰하지 못했던 미국의 입장까지 한미관계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다.

저자는 더 이상의 연구는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연구를 마친다. 결론에서 자신이 과거의 한미관계를 연구하는 목적은 '학습효과'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한 정책을 집행하는 미국의 경우 과거의 사건에서 많은 교훈을 얻고 실제로 정책을 입안하는데 있어 적용하는데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학습효과'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미국과 벌이고 있는 다양한 사건들에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베트남 파병의 교훈을 전혀 '학습'하지 않고 내려진 이라크 파병 결정, 미국과의 여러 경제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진행되고 있는 한미FTA의 문제, 한국의 여러 정치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군사지휘권문제의 역사적 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치쟁점화만 되고 있는 전시작전권 환원문제는 모두 그러한 예인 것이다.

모든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결국 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파악한다면 한미관계의 '학습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박태균의 이 책은 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 이 책을 통해 기록을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어떠한 기록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며, 그러한 기억을 통해 역사가 탄생하고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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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인터뷰 특강 시리즈 3
김동광, 정희진, 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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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거짓을 말하며 살아간다. 지각에 대한 변명으로 사고가 났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 선약이 있다고 둘러댄다. 이렇게 남에게 하는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도 있다. 자기와의 약속을 수없이 어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짓말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사실 문제될 것이 없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거짓말이라고 느끼지도 못하는 사회적인 거짓말이다.

 한겨레21의 주제로 열린 이번 강연의 주제는 바로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경험의 가진 7명의 강사가 참여하였다. 강연 내용이 물론 좋지만, 좀처럼 한자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지식인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도 이 책을 만나는 큰 기쁨 중의 하나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 자신의 직업에 근거해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거짓말을 설명한다. 사람이란 것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이면서, 아들이고, 회사원이면서 학생일 수도 있다. 이렇게 한사람은 다양한 면모가 뒤섞여서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정혜신은 사람을 자기가 가지는 편견에 따라 인식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한사람이 가지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모두 그 사람이 가지는 성향이며, 그것들을 모두 인정해야만 어떠한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어차피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의 거짓말은, 우리 사회가 거짓말을 권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싶다.

 김동광의 과학에 대한 강연은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어느 정도 없애는데 기여한다. 인문 사회과학과 다르게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었던 자연과학에 있어  일반인이 참여하는 논의가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은 건전한 과학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그의 주장은 온 나라는 거짓말의 소용돌이에 몰아놓은 황우석 사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신성한' 과학이라는 거짓에 가려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고, 그 과학이 '심지어' 국익에까지 도움이 된다는 거짓에 속아 온 나라가 열광했던 황우석 사태는 통제 없는 과학이 얼마나 위험한 거짓말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역사학자 박노자와 한홍구의 강연은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역사가 사실은 '만들어진'역사였다고 말해준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한민족이었다는 전제 자체가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역사라는 것은 사실 역사가 처음부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충실히 반영된 산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의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김두식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를 살핀다. 거짓말이라고 느끼지는 못하고 잘못이라고 느끼지도 못하면서 하고 있는 거짓말이 상당히 많으며, 그런 거짓말은 결국 우리 사회가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기존의 권력에 도전하며 '왕따'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 한다. 비록 지금은 남들과 다르다고,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겠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로 인해 사회의 거짓말이 조금씩 드러난다는 것이다.

 탈북자 출신의 김형덕은 조선에 대한 거짓말을 이야기한다. 핵실험 발표로 전 세계가 분주해진 이때에 김형덕의 강연은 특히 머리에 남는다. 그는 북한사회를 우리 사회와는 조금 다른 사회로 '이해'해줄 것을 부탁한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물론 비판받아야 하지만 북한의 극심한 경제적 요건이라는 장애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절대 개선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이 계속되어야 하고, 극심한 경제제재는 풀려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북핵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우리의 언어 속에 담겨있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며 거짓말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그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해관계를 철저히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문제는 남녀 간의 문제, 성적 소수자의 문제, 장애인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들을 규정하는 시각 속에는 그들은 '정상인'과는 다른 특이한 사람들로 보려는 주류 권력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소수자의 언어로 말할 것을 주장한다. 다양한 관점을 하나로 포장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관점이 어우러지는 사회에 대한 희망이 엿보이는 강의가 아닌가 싶다.

 인도의 평화운동가 프라풀 비드와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인도에 대한 거짓말을 이야기한다. 명상의 나라, 구도자의 나라 인도라는 허울에서 벗어나 그곳에도 결코 신성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설명에 인도를 특별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혹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본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또 세계적인 공업국가 인도라는 허울에 가려진 빈민문제는 여전히 인도가 해결해야할 경제적 난제가 산적한 국가이며 세계 여러 나라에 공통적으로 퍼져있는 신자유주의적인 빈부격차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여러 강의를 수록하였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주제는 어떤 사실을 왜곡해서 전해주는 전형적인 거짓말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힐 수 있고,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이해관계에 따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고 참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의 거대한 권력에 대한 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강연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거짓말을 의심하기 위한 적절한 처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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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용어 바로쓰기
박명림, 서중석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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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는 결코 아무런 의미 없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을 그가 사용하는 단어가 단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단어의 경우, 역사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은 물론 역사를 기억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까지도 함께 내포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 역사가 영향을 미치는 현재에 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수적인 선결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를 가진 '역사용어 바로쓰기'를 위해 각 분야의 역사학자가 글을 쓰고 그 글이 한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물론 현재 쓰이고 있는 역사용어 중에 극히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역사용어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역사용어를 바로 쓴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역사용어를 사용하는 학문의 정확성을 높힌다는데 일차적인 의의를 지닌다. 학문을 어떤 것에 대해서 개념을 잡고, 그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용어를 바로 쓰는 것은 학문의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민족문학, 민족주의 문학이라는 거의 비슷해 보이는 개념의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한 하정일의 논문, '순수문학'이라는 순수해 보이는 단어의 숨은 뜻을 파헤친 한수영의 글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의 글을 통해 학문적으로 자주 쓰이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어떠한 글을 쓰거나 읽을 때 더욱 정확한 용어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특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해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단어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동'으로 불려졌다. 그렇다면 사실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친일'이라는 단어와 '협력'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개인적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일'보다 제국주의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협력'을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이기훈의 글은 단순히 역사용어를 다시 쓰자는 학문적인 주장이 아니라 '친일파'의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는 시점에 '친일파'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정치적인 주장을 담은 글로 읽힌다. 해방 공간의 대립문제가 현재까지 첨예한 정치적 이슈가 되는 상황 하에 이 시대의 문제를 다룬 글도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반탁을 했던 우익과 찬탁을 했던 좌익이라는 도식을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박태균의 글은 좌우파의 첨예한 대립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6.25'라는 단어를 버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박명림의 글은 '한국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교정할 것을 주문한다. 전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비단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한반도 평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의 글은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가장 적극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역사와 현재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는 실상을 논한 임대식의 글은 직접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현재의 극우세력들에게 비판을 가한다.

역사를 가리키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강제로라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역사용어는 역사를 기억하는 사회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라는 단어의 사용을 비교 분석한 강정숙의 글을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보여준다. 외국 국가명의 사용을 분석한 김희교의 글은 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판한다.

역사용어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의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사실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글은 학문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 등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한수영의 글이 지적하고 있듯이 결코 '순수'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없다. 정치적 의미를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역사의 영역에서 결코 비정치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완벽하게 정치적인 의미만을 갖는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엄밀한 학문적 검증을 받지 않는다면 허울뿐인 레토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학문,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용어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죽은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는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역사용어가 사실은 엄청나게 다양한 이해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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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 2006-10-0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읽으셨군요. 전 아직 띄엄띄엄 보고 있는데...
 
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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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사건은 언제나 우리의 이목을 끈다. 식민지 시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살인 사건과 저명인사들의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숨겨진 이면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조선의 살인사건이 주의를 끈다. 식민지 시대라고 살인사건이 없었을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많았을 것 같지도 않다. 책은 조선인이 조선인을 죽인사건,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인 사건 등 4개의 살인 사건을 들려준다. 모두 잔인하고 엽기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살인 사건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죽첨정'단두 유아'사건'의 경우 근대 조선과 병존했던 미신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근대가 완성되었고 탈근대를 부르짖는 지금 과연 우리는 미신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 사건'이나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은 사법제도에 의해 희생당하는 조선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사회지도층의 문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긍정적인 의미에서나 부정적인 의미에서나 그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었지만 그와는 별개의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의 감추어진 사생활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인물에 대해 한층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다양한 사건들을 소개하면서도 사건을 읽는 자신의 견해나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을 단순히 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엽기적인 사건을 소개하는 재미있는 책으로 읽거나,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울했던 식민지 시대의 초상을 읽어내거나 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나쁘지 않지만 이 책이 근대 조선을 파악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고, 대중적인 교양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무래도 책의 약점이 될듯하다.

저자가 들려주는 사건의 숨겨진 행간을 주의해서 살핀다면 흥미와 동시에 조선의 근대를 읽는 또 하나의 시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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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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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기쁨을 충분히 나누기도 전에 한반도는 두개의 땅덩이로 분리되었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영향을 미쳤다. 팽팽한 세력다툼을 벌이던 양측은 결국 1950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시작한다. 몇 년 후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쟁을 계속하는 중에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공작원을 파견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남한으로 파견되어 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많은 경우 경찰에 체포되었고,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길고 긴 징역살이를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바꾸지 않은 그들은 '비전향 장기수'라는 이름으로 불리 운다. 만 36년을 감옥에서 보낸 허영철 선생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허영철의 삶은 마치 한국의 피맺힌 현대사를 한마디로 응축하고 있는 듯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민중의 한사람이었고,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기 때에는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전쟁 후에도 남파간첩이라는 이름으로 남에 내려와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체포된 후에는 36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사상의 자유를 짓밟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다. 온몸으로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만 허영철 선생의 삶은 결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역사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시대를 좌지우지 하던 인사들을 활동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의 삶이 대변하는 것은 역사에서 잊혀진 민중들의 삶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죽어간 이름 모를 사람들과 그들의 도운 촌로들은 허영철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등장한다.

  허영철이 기억하는 현대사는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또 한 번 깨뜨린다. 북한의 세력다툼에서 진결과 죽음을 당했다는 박헌영에 대해서 미국의 간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허영철은 주장한다. 이 밖에도 북한 정권과 현대사에 대한 그의 주장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흔든다. 어쩌면 우리의 상식 자체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허영철의 주장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을 갖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역사에 대한 인식 말고도 허영철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념은 책에서나 들어보는 말일 뿐이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온 그는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장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을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현재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며 그의 삶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모든 이들이 잊지 말아야할 삶의 모범인 것이다.  

  몇 해 전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민주화에 공을 세운 인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보수 세력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라면 광적인 반대를 보였다. 헌법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자유 민주주의'이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보장한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던 간첩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장 충실히 지킨 역설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런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영철의 사상이 옳다거나 옳지 않다는 식의 책의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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