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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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기쁨을 충분히 나누기도 전에 한반도는 두개의 땅덩이로 분리되었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영향을 미쳤다. 팽팽한 세력다툼을 벌이던 양측은 결국 1950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시작한다. 몇 년 후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전쟁을 계속하는 중에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공작원을 파견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남한으로 파견되어 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많은 경우 경찰에 체포되었고,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길고 긴 징역살이를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바꾸지 않은 그들은 '비전향 장기수'라는 이름으로 불리 운다. 만 36년을 감옥에서 보낸 허영철 선생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허영철의 삶은 마치 한국의 피맺힌 현대사를 한마디로 응축하고 있는 듯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민중의 한사람이었고,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기 때에는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전쟁 후에도 남파간첩이라는 이름으로 남에 내려와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체포된 후에는 36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사상의 자유를 짓밟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다. 온몸으로 역사를 증언하고 있지만 허영철 선생의 삶은 결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역사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시대를 좌지우지 하던 인사들을 활동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의 삶이 대변하는 것은 역사에서 잊혀진 민중들의 삶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죽어간 이름 모를 사람들과 그들의 도운 촌로들은 허영철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 등장한다.

  허영철이 기억하는 현대사는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또 한 번 깨뜨린다. 북한의 세력다툼에서 진결과 죽음을 당했다는 박헌영에 대해서 미국의 간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허영철은 주장한다. 이 밖에도 북한 정권과 현대사에 대한 그의 주장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흔든다. 어쩌면 우리의 상식 자체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허영철의 주장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을 갖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역사에 대한 인식 말고도 허영철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념은 책에서나 들어보는 말일 뿐이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온 그는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장 충실히 지킨 사람이었을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완성된 현재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며 그의 삶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모든 이들이 잊지 말아야할 삶의 모범인 것이다.  

  몇 해 전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민주화에 공을 세운 인물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보수 세력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라면 광적인 반대를 보였다. 헌법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자유 민주주의'이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보장한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던 간첩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장 충실히 지킨 역설이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런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허영철의 사상이 옳다거나 옳지 않다는 식의 책의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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