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 / 모멘토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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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징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낼 때가 있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Hakenkreuz]는 나치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어쩌면 괴벨스보다 민중을 선동하는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나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집단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을 사용하며 그것을 대외적으로 드러낸다. 태극기나 무궁화와 같은 국가의 상징물도 이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의 사쿠라 꽃은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 이었다.

저자는 사쿠라 나무가 일본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부터 파헤치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극단적인 군국주의의 상징물로 변화되었는지 추적한다. 여기서 상징의 의미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 당연히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자연화'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일본의 사쿠라 나무는 원래 천황을 위한 아름다운 죽음 등 군국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를 가졌었지만 근대화와 더불어 시작된 천황제에 대한 개조, 근대적 군대의 등장, 군부의 집권 등으로 인해 언제부턴가 사쿠라 나무는 천황과 국가를 위해 '깨끗하게' 산화하는 극단적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쿠라에 대한 이미지 조작을 받아들이는 일반 민중들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사쿠라 나무처럼 산화한 대표적인 사례인 특공대원(카미가제)들을 살펴본다. 그들은 과연 군국주의적인 사고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시대의 희생양이었을 뿐인가.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도 달리 그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반대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편지와 독서목록을 통해 살펴본 그들은 죽음을 찬양하기 보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사쿠라 나무가 상징하는 '깨끗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들의 사고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이상주의라는 함정에 빠져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군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국심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루소와 칸트의 '일반의지(general will)'에 대한 동경으로 군부의 총의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국가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이상주의와 극단적 내셔널리즘은 종이 한 장 차이였던 것이다. 

일본의 사쿠라를 통해 상징이 가지는 힘과 상징이 만들어지는 '자연화과정', '오인'등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상징과 상징을 이용하는 집단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특공대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교묘히 '자연화'된 상징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언제나, 누구든지 일본의 특공대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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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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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라는 말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복잡한 역사를 지닌 단어이기에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대충 개인의 자유, 그중에서도 양심과 사상의 자유 등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심각하게 왜곡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진정한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첫 번째로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고종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그가 써온 글들이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사람답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자유'라는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악법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그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제가 동의하는 사상에 대해서는 파시스트도 공산주의자도 기꺼이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제가 증오하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너그러운 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내세우는 한국의 우익은, 헌 날개든, 새 날개든, '다른 생각'에 대한 불관용을 도덕률로 삼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정략적으로 ,빨갱이 만들기'를 일삼는다는 사실 못지않게, 생각이 다르다는 것 자체를 절멸 대상으로 여긴다는 데 있다.  - p.79 <'시청 앞 인공기' 단상>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좌파에 속하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 민주노동당의 이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야한다는 신념에 따른 결과이다.

 그때그때의 정치 환경에 변화에 따른 단기적인 정치비평 등도 실려 있다. 하지만 글을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시각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자유주의자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가진 사람이나 호감을 가진 사람이나 사실은 진정한 자유주의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잊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를 지향하는 고종석을 글들은 진짜 자유주의자의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다양한 영화와 문화에 대한 평이나 언론인으로서 그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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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한재각.강양구.김병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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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이제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2006년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황우석 사태를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과학자로,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로 더할 수 없는 찬사를 받은 그는 2006의 시작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를 '추앙'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추락을 바라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거짓말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황우석 사건은 이제 종결된 것 같아 보인다. 지원금에 얽힌 복잡한 법적 다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름을 거론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떠한 사회적 활동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어떤 사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지기 마련인지라 황우석 사태도 이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그저 기분 나쁜 일로만 기억되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정말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정리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 그저 한 과학자의 거대한 사기사건으로만 기억해도 되는 걸까.

이 책의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황우석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황우석 사태로 말미암아 세상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과학기술동맹'이라는 단어로 정리한다. 황우석의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모든 사회적 권력들이 동맹을 맺었다는 이야기이다. 동맹의 중심에는 물론 황우석 교수가 존재한다. 보통 황우석 사태는 새튼 교수가 결별을 선언하고, MBC PD수첩의 보도가 나가면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황우석을 둘러싼 과학기술동맹의 끝이었다. 황우석은 복제소가 태어나기 그 이전부터 자신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동맹을 만들었던 것이다.

언론은 동맹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언론은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할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황우석의 입만 쳐다보면 되는 것이었다. 황우석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문과 뉴스의 표제가 되었다. 그런 보도는 황우석에 대한 국민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몫을 했다. 황우석에 대한 언론의 태도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동맹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말해준다. 대표적인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한겨레>신문은 자신들의 광고에 황우석의 이름을 사용했고, <경향신문>도 황우석 띄우기에서 빠지지 않았다.

언론이 황우석 영웅만들기를 담당했다면 정부와 정계 등 권력기관들은 황우석에 대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연구에 자금을 대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건분야의 법제정에 있어서도 황우석의 입장만을 고려하였다. 황우석은 결국 과학자가 아니라 국가 과학기술을 방향을 결정하고 조언하는 지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황우석의 전략과 스타 과학자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정부의 이해관계는 과학기술동맹의 핵심중의 핵심이었다.

황우석이라는 절대적인 영향력은 그가 몸담은 과학계에서는 더욱 더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았다. 황우석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절대적 약자인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의 난자를 제공하고, 그 난자를 가지고 스스로 복제실험을 한 연구원들은 이러한 황우석의 절대적 권력행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 이었다.

저자들은 이렇게 과학기술동맹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황우석 사태를 살펴보고 이런 광범위한 동맹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과, 과학기술을 토대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정당화시키려는 노무현 정부의 이해관계가 있었다고 말한다.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결과지상주의는 분명 산업화 시기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경제성장만 하면 문제 없다는 박정희식 사고방식의 재현이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망상과 그것을 위해서는 난자채취의 윤리논란도, 실험실 내부의 권위주의적 질서도, 지원과 관계된 비리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또 황우석의 생명공학기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망상은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신자유주의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은 물론 과학기술동맹이었지만, 그를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고, 황우석 연구에 의문을 제기한 MBC PD수첩의 광고를 없애고 프로그램을 폐지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바로 과학기술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대중이었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놓치지 않는다. 대중은 애국주의에 대한 열정과 과학기술이라는 마법에 홀려 사태를 이성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과학기술은 과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고 논란이 있을 수 없는 영역이 절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학은 마치 사회제도와 같이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토론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교양이라는 것이다.

2006년은 황우석과 함께 시작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6년을 마무리 하는 이 때 황우석 사태의 진상을 알리고,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와 제발 방지를 위한 대안까지 제시하는 이 책은 2006년을 제대로 마무리하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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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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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은 미국과의 FTA체결을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FTA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넓은 시장을 얻는 것은 한국에게 많은 경제적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시장을 통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맺어지는 FTA는 그나마 존재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무참히 파괴하고 오로지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조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와 관련된 갈등은 비단 FTA만이 아니다. 날로 치솟는 부동산가격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쪽에서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 지켜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해답은 어디에 있을까.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지금의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따라서 움직여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한국도 IMF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을 받아들인바 있다. 모든 것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거스르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를 악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되었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많이 이루어지는 국가는 성공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그것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되는 정부의 규제는 가능하면 없애야 하는 것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는 재임시절 외국기업을 많이 유치했다는 업적을 자신의 가장 큰 자랑으로 내세운다. 그렇다면 과연 외국인 직접 투자가 늘어나고, 규제가 줄어들고, 시장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는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은 과연 성공적인 것일까. 과연 우리는 다른 대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장하준 교수는 단호히 신자유주의는 결코 성공적이지도, 성공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는 학문적으로도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경제활동에서는 더욱더 비참한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는 먼저 신자유주의가 오랜 학문적인 숙고에 의해 탄생한 이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지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신고전학파와, 정치적 영향력을 우선시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와의 非신성동맹을 통해 태어났다고 비판한다. 신고전학파는 오스트리아학파와의 결합을 위해 논란이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상당한 허점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무엇이 사장에 대한 개입이고 무엇이 개입이 아닌지에 대한 명백한 기준을 세우지 못한다. 또한 시장은 태초부터 존재하였다는 가설에 입각한다. '잘 작동하는 시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잘 작동하는 국가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들이 주장하는 개입 없는 자유로운 시장이 사실은 상당한 수준의 개입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자유로이 형성된 시장가격이라는 믿음은 가격이라는 것은 원래 정치적으로 결정된 제도적 범주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가장 큰 지지자이면서 수혜자인 초국적 기업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세계화 과정에서 외국인 직접투자(FDI)의 비중이 커지고, 국적이 의미를 가지지 않는 초국적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초국적기업과 자본에 개방적인 국가가 좋은 성과를 거둔다는 주장에 대해, FDI는 몇몇 선진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기업들이 주장하는 기업의 초국적화는 사실상 그다지 빠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초국적기업의 유치가 경제적 성공의 지표로 평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초국적 기업은 분명 국민국가의 이익을 위해 충분히 활용되어야 하지만, 해당 국가의 산업화 전략과 개별산업의 구체적인 요구에 따라 그 역할이 분명히 정의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국민차 선정 사업과 한국의 TGV선정을 예로 들며 초국적 기업에 끌려 다니는 국가들이 그들이 가진 협상력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한미FTA의 주요의제인 동시에 신자유주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그의 태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을 뒤엎는다. 저작자의 노고를 보상하고, 창작의지를 고취시키는 제도라는 특허제도에 대한 환상은 사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선진국들의 후진국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선진국들은 오히려 특허제도가 구비되지 못하였을 때, 발전을 이루었으며, 현재도 특허제도는 창조적 발명에 그다지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못하며, 승자독식을 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지적재산권제도와는 다른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를 피할 수 있는 개도국만의 기준, 저렴하면서도 대규모의 기술이전이 가능할 것 등을 주장한다.

 저자는 이외에도 선별적 산업정책의 필요성, 공기업에 대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비난 등을 살펴보며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는 공정하다고 믿어지고 있지만 사실 공정할 수 없는 시장의 자율성이라는 신화를 규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으로 끊임없이 국가를 강조한다. 사실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가능한 것도 국가주도의 경제라는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애초에 시장이라는 것도 국가의 개입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지금 국가개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동노동의 금지, 장기매매의 금지, 최저 임금의 보장 등도 사실은 철저한 국가개입의 산물이기에 국가의 개입을 반대하는 주장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에 대한 커다란 믿음은 특히 국가에 의한 엄청난 폭력을 경험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불안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저자도 국가의 폭력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은 유럽의 사회적 조합주의적 개입 등을 이야기하며 국가의 개입은 필연적으로 불법적인 폭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능한 대안은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국가를 철저히 감시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미 세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때 장하준의 도발적인 비판과 대안은 우리에게 분명 유익한 논란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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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1-3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일목요연하네요...책들이 몇 권 쌓여 있어서 올해 넘겨야 볼 수 있을 듯 한데 ..님의 리뷰로 살짝 열어본 듯 합니다.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한국과 독일 일상사의 새로운 만남
이상록 외 지음 / 책과함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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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이 아닌 그 중에 현재의 인간생활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지닌 일’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는 커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역사를 살필 때에는 정치, 경제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사건만을 주목하여야 하며, 그 외의 역사를 바꿀만한 힘이 없는 인간들의 일상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필연적으로 정치, 경제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를 이끌었던 몇몇의 지도자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일상사’는 바로 이러한 역사인식을 뛰어넘기 위한 시도로 평가 될 수 있다. 정치사, 사회사 중심의 역사를 탈피해 정치, 사회와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여러 모습들이 ‘일상사’의 연구주제이다. 이러한 ‘일상사’의 역사인식은 그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무가치하게 평가되었던 많은 인간들이 주목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몇몇 사람이 중심이 되는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적용에 있어 주목할 만한 효과를 가진다. ‘민족구성원’모두가 일본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고 살았다는 민족중심의 역사를 벗어던지고 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빼앗긴 설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수많은 피지배층의 일상이 드러난다. 모든 국가구성원이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하거나, 아니면 독재정권의 몰락을 위해 싸웠던 민주화세력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해되었던 권위주의 정권시기도 일상사의 시각에서는 다르게 해석된다. 하지만 일상사는 이러한 새롭고 획기적인 면과 함께 상당히 위험한 역사인식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취지는 역사학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구조적이지 못하고 체계가 없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일상사’는 일제시대를 겪었던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치의 지배를 겪었던 독일에서 먼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책도 독일의 일상사 연구 성과와 한국의 일상사 연구 성과를 교류하자는 차원에서 추진된 학술회의 결과물이다. 식민지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은 양국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허영란은 친일과 저항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근대’를 열망했던 식민지 조선의 사람들 일상을 살펴보고, 식민지는 일본이 패망하명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이 식민화 되었고 그 영향은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보다 훨씬 더 오래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私刑을 주제로 한 장용경의 글에서도 일상생활에 스며든 식민주의를 고찰한다. 私刑이 갈수록 줄어들고 그에 대한 논란도 줄어든 것은 근대성의 가장 핵심이 되는 사유재산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대한 논란이 줄어드는 것은 일본인의 사유재산에 대해서 식민지 조선이 그만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상사연구가 그동안의 역사인식을 바꿀 획기적인 기획이 될지, 아니면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작은 일탈에 해당할지는 아직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 책이 일상사에 대한 해답을 전해주지는 못하지만, 한번쯤 일상을 통해 역사를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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