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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ㅣ 새롭게 읽는 러시아 고전 1
막심 고리키 지음, 최은미 옮김 / 써네스트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냉소. 최근 가장 고민되는 감정이다. 난 상당기간 냉소에 푹 담가져 숙성되어 눈까리가 어름 눈깔이다. 냉소를 바득바득 온몸에 채우고 세상을 보고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바득바득 얼려 삼켰다. 그것이 서울이란 숨 막히는 도시에 살면서 도시인이 갖는 합당한 감수성 내지 대세적 감수성이라 여겼다. 냉소가 대세이기에 냉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들은 촌스러웠다. 그런 것들하고 함께 살기엔 서울은 그리 풍성한 곳이 아니었다. 쿨로 일관해야 상처를 덜 받고 나 자신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여겼다. 뼈 속까지 얼얼하기에 냉소와 평생 함께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다.
위에 언급한 나와 뒤엉킨 냉소적인 모든 것들이 과거시제다. 즉 현재 나의 냉소는 조금씩 녹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 냉소적인 태도가 차츰 녹기 시작했고, 나는 쿨하게 냉소를 떨쳐낼 생각이다. 계기는 결국 책이다. 개인적으로 독서만큼 사람을 뒤집어 놓는 것도 없다고 생각이 되는 데 그 책들이 던진 질문과 텍스트들이 제 반추의 계기를 만들었고 난 질문을 시작했다.. 냉소로 일관하여 결국 뭐가 될까? 냉소가 과연 합당하기나 할까? 냉소의 반대에 위치한 감정들이 촌스러운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일까? 끔찍한 도시의 감수성이 날 얼마나 괴물로 만드는가? 질문이 물고 물수록 냉소에 대한 애정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다. 난 냉소를 유지함으로 너무 많이 잃었고 놓쳤고 외면했다. 도시적이여서 끔찍한 수많은 것들 중 단연 으뜸은 냉소다. 더 이상 진전 없어 고이고 고여 만들어진 절망의 늪이다. 아니 늪도 아니다. 늪의 위대함을 냉소의 비유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씬시티에 나오는 타르 구덩이다. 맞다. 그 타르 구덩이, 모든 썩은 것들이 모이고, 버려지는 그 타르 구덩이, 검하디 검고, 빠져나올 가망이란 일찌감치 버려야 하는 그 타르 구덩이인 것이다.
끔찍한 냉소의 구덩이에서 내가 빠져나올 희망을 던져준 수많은 책들 중 단연 최고는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다. 난 어째서 이제야 ‘어머니’를 읽은 것일까? 왜 이제야 내 손에 도착 한 것일까? ‘어머니’의 전체적 구성은 사회주의에 문외한이던 어머니가 어떻게 시스템에 대해 반추를 하고, 왜 혁명이 필요한지를 깨닫고, 혁명에 참가하고, 사회주의의 기치를 몸소 실천하는 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무지막지하게 단순히 요약하여 말하자면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는 혁명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어머니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만이 아니다. 분명 사회주의 혁명들을 자세히 스케치하여 혁명의 당위성을 설토하는 것은 동구권 붕괴란 명백한 현실로 인해 혁명의 필요성을 상실해가는 지금 굉장히 소중할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값진 것은 ‘어머니’의 눈으로 보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 혁명이다. 그 어머니가 어머니로써 생각한 혁명의 당위와 동지에 대한 고민가 앞날에 대한 고민, 그 모성애로 써 아우르는 모든 것들을 통해 물리치는 냉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혁명의 필요성에 들끓음에도 내미는 동지들의 냉소들을 물리치고 그녀는 끝없이 사랑과 희망을 끌어안는다.
도시의 감수성에 함몰되어 유행처럼 냉소가 번지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행동은 그 자체로 현재를 반추하게 한다. 시니컬이란 것을 필두로 쿨함의 기치를 내세우며 냉소를 띄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는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냉소를 띔으로 인해 많은 감정들이 버려지고 사라지는 지금 상황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냉소병에 걸려 놓치고 잃으며 저지르는 실수들을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다. 정치적 냉소에 걸려 투표권을 자의적으로 포기하고, 그로인해 원치 않던 시스템에 합류하게 되고, 그럼으로 얻는 무기력은 다시 냉소를 불러들여 실수를 반복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며 띈 냉소 탓에 삶은 비루해지고 절망스러워지고 무기력으로 도배를 하게 된다. 그 물고 물리는 절망의 연쇄, 그 타르 구덩이.
얼마나 냉소로 일관하고 살아 왔을까? 왜 냉소를 띄우는 그때 진심을 발휘하지 않고 숨었던 것일까? 냉소를 버리고 진정 사랑하고 진정 희망할 때 가능성이 오고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에서 배운 것이다. 막심 고리끼의 그 절실한 외침은 여전히 절실하다. 아니 절박하게 요구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남한에 살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냉소를 버리는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괴물을 ‘외면하고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의 선택 전에 우리는 냉소를 버려야 한다. 냉소를 버리고 냉소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촌스럽다며 무시한 것들을 지녀야 한다. 냉소의 반대편에 위치한 그 감정들. 그것들을 무시하기는 쉬울지 모른다. 허나, 정말로 그것들을 실천하고 그것들로 세상을 바라보기란 힘들 것이고 또 그것들의 값짐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완결된 것은 없다. 어머니는 혁명의 선상에 있지 종점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 힘들고 고된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작은 몸을 당당히 펴고 있는 것이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담 지금은? 진행형이다. 끝나지 않았다. 철지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열차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