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토드 (2disc)
팀 버튼 감독, 조니 뎁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가 잔혹하다고들 한다. 허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팀 버튼은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베트맨에서 들어냈었다. 스위니 토드 또한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시선의 세기. 냉소에서 소가 살아진, 면도칼만큼 날카로운 시선. 팀 버튼의 날 선 시선이 펼쳐진 곳은 산업화 혁명으로 인해 세상이 곧 영국이 된, 영국에서도 산업화의 집대성인 런던이다.


 

정의와 사랑의 바다에서 해적 놀이하던 항해생활을 접고 조니 뎁은 배에서 내리며 복수를 위해 19세기 영국에 서게 된다. 토드(조니뎁)의 복수의 원인이기도 한 터핀 판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법은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단지 판사라는 힘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힘은 -토드의 아내와 딸을 빼앗은 것처럼- 그 위치보다 아래에 있는 것들을 착취한다. 법-정의의 자리에는 단지 힘이 있을 뿐이다. 법이 작용을 하지 못함으로 법-판결의 자리에 법에서 탈한 판결인 복수가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니 토드의 도착은 필연적 도착한다.

 

안소니의 조안나(토드의 딸)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토드의 복수가 실패가 되고 토드는 복수가 실현되지 못한 분노를 세상으로 돌려 이발소 손님들을 고기 파이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복수의 실패로 인한 것일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직업을 얻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자체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을 착취하게 된다. 그것이 생명이 되었던 상관없다. 단지, 그 매커니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수요만이 필요할 뿐이다. 수요와 충족.


 

토드는 광기의 소모를 위해 살인을 한다. 허나, 그 살인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러빗부인(헬레나 본햄 카터)이 수요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빗부인이 끝임없이 시체를 원하는 것은 그것으로 만든 고기파이를 사람들이 끝임없이 원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있기에 충족이 발생한다.


영화 오프닝에서 보여지는 수평구조는 고기파이 만들기 과정과 일치한다. 하늘에서 내린 피가 이발소로 그 아래 오븐이 있는 지하실로 그 아래 하수도로 흘러 바닷가로 내려가고 그 물은 증발하여 다시 구름을 생성할 것이다. 이발소에서 이발소 손님은 오븐이 있는 지하실로 떨어지고 시체가 된 이발소 손님은 고기파이가 되어 식당 손님의 입으로 들어가고 배를 체워 기분 좋아진 식당 손님은 면도를 위해 이발소로 올라간다. 착취의 순환구조.


 

영화 속에서 토드와 러빗부인과 남자아이로 유사가족같은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그 공동체 역시 착취의 순환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토드는 복수의 완성을 위한 부품으로 러빗부인고 남자아이를 대하고 러빗부인 역시,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토드를 속인다. 남자아이 역시, 계급 상승-빈민촌에서 가게점원-으로 인해 러빗부인을 따르고 자신의 계급을 위협하는 토드를 원망한다.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가족. 그것이 자본주의가 보수적으로 외쳐되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현실.


토드와 러빗부인의 시선에 인간들은 욕망의 충족과 자본적 가치일뿐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인간으로 작용할 수 없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토드와 러빗부인으로 한정 될 수 없다. 그 '그들'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토드와 러빗과 터핀판사의 죄는 어디서 오는가? 토드는 귀향 후 면도칼을 쥐면 외친다. "이제 내 팔은 완성되었다" 그 팔의 완성은 무엇인가? 가위손 시절에 대한 향수? 과거에 대한 기호로써의 만족? 그 완성은 직업의 완성이다. 그가 면도칼을 쥐고 이발사의 자리로 돌아 옮으로 복수로 내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면도칼을 쥠으로 착취(고기파이 원료)를 실행 할 수 있게 되었다. 토드와 러빗과 터핀의 죄는 직업- 그 것이 뜻하는 수익 창출효과에 있다.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착취를 해야된다. 왜 착취를 해야만 할까? 그것은 산업혁명으로 - 말 그대로 자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땅인 런던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토드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을 죽이게 된다. 착취 순환구조-의도인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중단하지 못함으로 의도는 이루지만 진정한 의도(아내)은 망각하게 된 것이다. 순환구조의 정지를 하지 못한 자의 최후는 파멸 뿐이다. 러빗 부인의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불에 타게 되고 터핀판사 역시 토드의 손에 살해된다. 토드 역시 복수에 대한 열망을 끊지 못함으로 순환 구조의 하위에 있는 남자아이 손에 죽게 된다. 허나, 중요한 것은 인육 맛과 살인으로 인한 피맛까지 본 그 아이는 정점에 서겠지만, 강조해 말하자면 순환구조에 완전히 정착한 그 아이도 결국 시체가 될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비전.


 

그 끔직하고 역겨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 그대로 순수한 사랑 뿐이다. 순수한 사랑을 지키고 순환구조에 물들지 않은 조안나(물론,안소니도)는 순환 구조의 정점에 서있는 아버지-토드와 터핀이 파멸함으로 그 악순환에서 벗어 날 수 있게된다. 순수한 사랑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 그것만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이 영화를 잔인하고 역겹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혹은 그 살육의 잔치에 열광하고 흥분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순환구조에 참여하게 되고 고기파이의 위치에 서거나 토드의 면도칼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잔인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의 시선일 뿐이다. 자본을 위한 신자유주의를 휘둘루고 무서울 것 없이 내달리는 미국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본이 꼭대기에 있음으로 모든 인간은 단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또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토드의 런던 속 풍경은 결국 우리의 풍경의 은유다.


영화가 잔인하다고? 당신은 영화에서 지금을 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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