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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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논지 꽤 됐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떠오르는 건 처절한 죄의식과 감당하기 힘든 무기력. 장 지글러의 책을 읽고 나름 충격을 받았고 최근 w에서 아이티의 진흙쿠키에 대한 내용을 접한 후 편히 산다는 것의 죄책감에 휩싸여 있던 차에 이 책이 아예 다운을 시켰다. 모든 사례에 대해, 그 사례 속에서 버티는 이들에 대한 죄송함.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 중심적 견해로 제3세계라 불리우는 나라들이 선진국을 선진국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착취되는 모습을, 그 착취의 기반을 만드는 빈민들의 모습을 슬럼이란 곳을 중심으로 훑는다. 그 곳으로 더 파고들수록 그들의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올려질수록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고작 몇 개의 선진국(그 중심의 미국!)이 펼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는 계획에 제3세계의 국가 기반등을 차츰 차츰 해체하고 자신들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알량한 슬럼 정책을 펴지만 그로인해 제3국의 중산층은 완전 소멸하고 빈부격차는 함부로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멀어져간다.

슬럼 속에 사는 이들의 단면적 모습만으로도 ‘산다’란 말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그 속에서 지옥같은 삶을 이어간다. 도시 외곽을 두루고 있는 슬럼은 상위 계층이 높게 쌓아올린 옹벽 넘어에서, 벼랑같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곳에 집을 세우고, 언제 홍수에 휩쓸릴지 모르는 곳에서, 도시계획으란 꿈도 꿀 수 없는 식수와 하수로 같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똥과 오물과 해충이 넘쳐나는 곳에서, 배고픔을 잊기 위해 쓰레기를 뒤지고, 진흙을 버터와 소금을 섞어 쿠키로 빚고, 한정되지 않은 끝없는 노동, 당연한 매춘과 당연한 범죄와의 연계. 그 곳에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어찌 함부로 ‘산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처참한건 그 슬럼 속에서도 착취가 끝없이 이어진다. 부동산을 기반으로한 착취가.

내가 더욱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이 땅 남한에서도, 특히 내가 태어난 88년도에 세계의 슬럼 정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한 폐이지를 남기고 있었다. 88년 올림픽을 위해 75만명의 빈민을 아무 대책없이 쓸어버린 사건에 대해, 그리고 아직도 재건축이란 미명하에 빈민들을 쓸어버리는 현실에, 부동산 값을 위해 재개발이라면 버선발로 뛰어다니는 이들이 널린 현실을 막연하고 무감각했던 것에 어찌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무서운건 제3세계의 슬럼 정착 역사가 지금의 한국과 많이 겹친다는 것이다. IMF와 세계은행을 기반으로 밀려들오는 세계화는 IMF는 벌써 겪었고 더 처참하게 다가을 한미FTA. 빈민과 옹벽을 쌓고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은 하늘 높은 듯 올라가는 타워펠리스의 비현실적 모습. 슬럼의 부동산 폭등의 모습은 재개발 지역의 폭등하는 부동산 값을, 그것이 겨냥하는 거품의 모습. 많은 것들이 겹치는 터라 읽을 때마다 오싹해지곤 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자본주의란 흡혈귀가, 선진국이란 흡혈귀가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해, 다른것도 아닌 풍요로움을 위해! 다른 국가를 인질로 잡.을.수.밖.에. 없는 현실에 또 그것을 하고있고 하려는 나라에 살고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무기력감과 죄책감은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한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무기력감도 배부름의 표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이 순간에도 슬럼 속 아이들은 진흙쿠키를 먹고, 쓰레기를 뒤지고, 몸을 팔고, 살기위한 노동을 하고, 미친 세상에 마녀라 오인 받아 살해당하고, 그 아이들의 다음 세대는 걸어보지도 젓을 물어보지도 못하고 검정 비닐봉지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최근에 든 생각이지만 정말 떳떳하다는 말, 함부로 입에 담을 자신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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