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Paperback) - Essence, History, and Future
Kung, Hans / Continuum Intl Pub Group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위의 책을 쉽게 간추린 책의 국내 번역본 : [가톨릭교회 / 배국원 역 / 을유문화사 ]  


서문에서 저자는 가톨릭 교회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서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택한 큰 이유가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그 잘잘못을 파헤치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특히 로마가톨릭의 중심이 되는 교황제도의 인위성을 서술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이 가톨릭교회 역사에 한정되었지만 이러한 점으로 인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저자는 예수의 행적 중에서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상업 활동에 반발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일과 그 결과로 나타난 당시 정치, 종교 권력자들과의 운명적인 충돌을 이야기 한 후 과연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 앞서의 충돌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가정한다. 그리고 예수는 ‘민주적’정신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에 대한 후대의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즉, 예수는 빵으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힘 또는 돈 (지상에서의 어떠한 권력을 의미)보다 인간의 자유를 우선시 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리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이반의 대서사시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복음서를 읽어보면 권력에 대한 비판과 소수자를 보호하려는 예수의 모습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초대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삶과 말씀에 따라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는 모습이 보여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예수가 지금과 같은 위계질서가 있는 가톨릭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베드로의 위치 또한 후대에서 조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초기기독교교회와 유대교의 결별을 설명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별과 반유대교주의의 기원이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을 탄압하고 회당에서 축출한 데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독교역사를 다룬 다른 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오랜 역사에서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의 반기독교주의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이유, 이를테면 반기독교주의를 내세울만한 여론을 형성할 수 없었거나 기독교인들이 그들 삶에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유로 반유대주의가 기원했다는 것은 부족한 설명 같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하더라도 근대이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교부철학을 통한 가톨릭의역사적 과정에서 발생한 교회의 변화와 그 변화의 장단점을 논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었다. 그는 종교의 영역에서 사적 영역보다 남성지배 두드러졌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여성 차별과 또 이 차별을 공고히 하기위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확대 시킨 가톨릭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책으로 기 베슈텔이 지은 『신의 네 여자』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라는 부재로 네 여자는 창녀, 바보, 성녀, 마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시각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도 교회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것은 비단 가톨릭교회 뿐 아니라 국내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내 개신교의 경우는 유교윤리와 결합되어있는 듯하다. 
 

다시 돌아와서, 저자는 바울로의 가장 큰 업적으로 바울로 선교이전까지 존속해왔던 ‘유대 율법’ 행위의 준수에서 벗어나 율법준수와 관계없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헬라 문명의 사상과 관념과의 결합을 했다는 것으로 본다. 저자가 지적한 바울로의 업적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 교회가 크게 확장 되었고 바울로가 다닌 각 지방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장의 물음과 연결되는 교회의 탄생이다. 결국 교회는 예수가 아닌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로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다시 말해 교회는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점은 기독교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교회’라고 하는 그 공간을 신이 임재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신께 봉사하고 신도들을 인도하는 성직자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점이 역시, 국내 개식교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 로마황제를 통해서 위계질서를 확립해 갔고 이러한 위계질서를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확고해졌다. 내 생각에는 그 과정에서 교회와 교회위계질서와 성직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서 성경을 일부를 발췌하여 해석하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가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교회가 생겼고, 그 말씀을 해석하는 집단이 생겼고 결국 그 집단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단과 목적이 서로 섞여있는듯한 상황이 보인다. 결론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위계질서와 성직자의 차별적인 신분체계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만 권력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서 초기에는 성경의 선택과 이후에는 성경에 대한 비타협적인 해석이 안타깝다. 언제나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지 토론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대한 박해와 공인과 국교 이후의 가톨릭교회의 이단에 대한 박해를 이야기 한다. 피박해자가 금새 박해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 어쩌면 종교는 그 기본에 있어서 배타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또한 로마제국이라는 통일 제국에서의 통일 종교, 즉 ‘가톨릭교회’가 국가와 제휴를 하고 이론적, 사색적, 교리, 신학 등이 발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교리의 확고함과 교회 행정의 통일을 위한 공의회가 있었고, 이 시기의 공의회는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가 인정하는 초기 공의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는 신학적인 분열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굉장히 현명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개신교의 신학적 작은 차이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많은 종파로 갈라진 것을 보면 어쩌면 초기 로마제국에서의 통일 교회의 형성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만 같다. 혹은 먼 거리로 인한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서로의 차이점을 잘 몰랐다거나 혹은 그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바탕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같다.
이와 같은 공의회들을 통해서 가톨릭교회에서의 몇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생겨난다. 우선 로마교회를 격상시키고 이에 따라 로마교회의 수장이 교황이 되는 일련의 변화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교회들보다 우월한 로마 교회의 수장은 곧 전체 기독교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뜻밖에도 이 책에서는 이러한 로마교회의 위치를 잡는 것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제국시기의 타지역의 교회들은 한 교회가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교회는 여러 조작된 문서들과 ‘색다른’성경 해석과 교황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로마주교의 전체적인 우월성을 획득한 것이다. 즉,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로마 가톨릭 교황의 위치와 존경, 권력의 토대는 상당히 인위적이고 심지어는 ‘사기적’이기까지 한다. 앞으로의 교황들은 그 위치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베드로의 반석’보다는 로마가톨릭의 행위를 통해서 얻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것이 기독교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았음을 인정하고 더불어 기독교인들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구호활동과 고결한 윤리,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한 해답을 제시한 것 등이 그 요인이 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그 윤리의 대상과 구호활동의 대상이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타종교인들의 배제한다면 그것을 순수하게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행위의 의도를 보고 판단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우월성을 내비치는 것이 그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려는 의도라면 그 행위를 옳다고 말할 순 없다.
그리고 초기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의 윤리를 가지는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도 생겨났으나 기독교의 윤리가 개인의 신앙영역에서 벗어나 세속과 관계하면서 인류문화를 저해하기도 한다. 그 윤리가 늘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우리나라의 개신교인들의 윤리는 곧잘 한 국가에 관한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띄다. 그리고 인권의 영역에 있어서도 여성의 권익과 성적소수자의 권익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로마제국의 교회 시기를 지나고 그 과정 속에서의 로마교회의 위치 확보와 교부철학자들의 활약을 통해 성장한 가톨릭교회가 지금과 같은 교황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자리를 잡는 시기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그 점에서 레오1세를 최초의 진정한 교황이라고 본다. 레오1세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을 통해 베드로가 직접 말씀하신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러한 베드로 후계자, 베드로의 반석에 대한 해석이 이후의 교황무류성 주장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오1세는 교황의 영적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교황의 주장이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오랜 세월동안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라 말한다. 
 

게르만 족의 이동 이후 피핀의 왕의 임명 그리고 샤를마뉴가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과정은 왕과 황제는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즉위가 가능하다는 공식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샤를마뉴의 통일 왕국에서 기독교는 곧 가톨릭이고 가톨릭은 곧 로마라는 공식이 자리 잡게 된다. 이 시기에 라틴어예배와 재단과 청중이 소외되는 것, 성적인 도덕심에 대한 강요들이 생기게 된다. 결국 샤를마뉴 시대에 와서 기독교교회는 초기교회의 모습과 예수의 가르침과는 점점 멀어지는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중세 신앙심과 관례들, 절차들 그리고 수많은 구속과 일반인의 두려움이 이용한 기독교의 발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비판하지 않는 점이지만 이렇게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어 갈 때 교회는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력은 대체적으로 두려움을 유발 시키는 것으로 구원에 관련되거나 공동체 내에서의 배제와 소외 등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도 지적했듯이 성에 대한 과도한 부정적 평가와 죄악의 행위에서 태어난 인간과 같은 논리들이 형성된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기독교교리의 한 가운데에는 공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과 벌’이라는 타율적인 도덕률은 도덕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가장 초기단계에 속한다. 이 점에서 교회는 오히려 도덕성의 발달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또한 그들의 교리가 진리가 되는 상황은 너무나 교조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톨릭교회의 일방적인 위계질서의 확립은 실상 초기 기독교의 신약 성서에 기초한 사도전승이라기보다 위조문서와 같은 조작된 역사 증거를 토대로 형성되었고, 그 원동력은 권력을 얻기 위한 교황들의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러한 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는데 수도원이 교황의 직접 감독 하에 놓이게 되면서 교황의 주요 수입원이자 네트워크로 작동하게 되었고 로마 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을 구성하였다. 특히 교황이 모든 법의 원천이자 기준이며 그 최고의 권위이므로 다른 모든 법을 판단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어느 누구에도 판단 받지 않는다는 교황의 지상권 주장이 나오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 교황의 지상권 주장이 정교회와 가톨릭과의 화합의 유일한 걸림돌이라 지적한다. 특히 로마 가톨릭은 신에 대한 복종이 교회에 대한 복종이고 교회에 대한 복종이 교황에 대한 복종이라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결국 또 다른 커다란 교회인 동방교회를 소외시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분리된 서방교회인 로마가톨릭과 동방교회 사이에는 아직도 큰 간극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이 더욱 가깝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끊임없이 하나의 통일된 교회를 부르짖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과도한 외침이 기독교교회를 점점 분리시키는 힘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과 교황권의 확립이외에도 교회의 중앙집권화, 법제화, 정치화, 군사화, 교권주의화를 이루었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교회법과 교회법에 대한 학문을 발전시켰는데 아마도 이것이 중세 스콜라철학의 발전과 맞물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권주의화는 여성을 배제시키고 사제들의 결혼을 분리시켰다. 저자는 이 사제독신제도가 성직자와 신자들 사이를 철저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내 생각을 덧붙인다면, 성직자들의 실질적인 동거가 많았고,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성직자가 있었음이 어쩌면 일반인들의 성직자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 성직자의 결혼 금지 조항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것이 과연 사제들의 도덕적인 우월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점에 선뜻 동의를 할 수 없다. 그 우월성은 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여성에 대한 혐오에 기초해 있음을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의 개신교와 가톨릭을 본다면 가톨릭의 중앙집권화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된다. 개신교의 전도사, 주말 교사, 목사직은 어떠한 기준이 없다. 중, 고등학생의 주말 선생은 대학생이 되기도 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긴 기독교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곧장 전도사가 되고 이런저런 연줄이 잘 맞으면 목사직을 따기도 한다. 신도들이 선출하는 목사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가톨릭의 경우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서는 국내 하나뿐인 가톨릭대학을 6년간 재학하고 2년간 봉사와 구체적인 커리큘럼이 짜여있다. 결국 가톨릭 대학이 더 나은 성직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중앙집권의 장점이라 볼 수 있다.


중세시기 전반에 걸쳐서 교황권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스콜라철학으로 그 기반을 더욱더 단단히 다졌고 성직자와 일반인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넓어져갔다. 저자는 앞 장에서 가톨릭의 화려함과 구원에 대한 주장 등이 과연 기독교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관습일 뿐인가, 무엇이 진정한 내면적 소산이고 어떤 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실체인가를 묻는다.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복음과 세례 성만찬 공동체 의식은 의심할 수 없는 기독교적 실체이나 성직자의 길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6장 종교개혁에 대한 시각과 일치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으로서의 반응과 교황지상주의를 더욱 강조하던 것이 끝끝내 신교와 구교로의 결별로 이어졌다는 시각을 보여준다.
어쩌면 중세말 교회가 초기교회와 같이 성직자의 구분이 없으며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고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개혁이 이루어졌으면 개신교가 따로 분리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사후에서부터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톨릭교회 교리가 매우 세밀하게 짜여졌고 이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법이 방대해지고 그 강제력과 힘도 커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세력의 새로운 교리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거의 완성된 가톨릭의 교리가 부분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변화할 소지가 있었다고 보인다.
교황의 바빌론 유수에서부터 교회의 대분열과 공의회주의는 사실상 교황과 교회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교황무류성에 기초한 교황권에 큰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다시금 교황권과 교회에 대한 권위를 재정립하는 노력을 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종교개혁에 대한 반응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신학적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을 독점하던 가톨릭교회로서는 권력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군다나 사제의 필요성을 완강히 부인하고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예배 형식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고 단지 이단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개신교의 교리와 가톨릭의 교리 중 어떤 교리가 더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그 누구가 자신이 ‘00敎의 신자다’라고 말하기에 앞서서 그 종교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믿는 그 종교공동체의 역사와 전통, 예식을 비롯한 여러 형식들의 원천을 찾는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태껏 내 주변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지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심지어 한 목사의 딸은 내가 예정설에 대한 설명을 하자 말도 안된다며 기겁을 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저자가 가톨릭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에서부터 상당히 비판적인 역사서를 서술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당위’로 여겨지는 많은 교리들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고 그 교리의 이면에는 어떤 정치적인 사안이 놓여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 철학적으로 이성주의의 발전과 코페르니쿠스로 대표되는 과학의 발전시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앞서말한 철학적, 과학적, 사회적인 발전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특히 문제시 되는 점이 라틴어예배와 마녀재판과 성서비판이다. 그리고 개신교가 자리를 잡았고 오랫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아니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전쟁을 하였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용의 문제가 제시되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일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그야말로 현실과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발달은 가톨릭의 세계관의 오류를 보여주었고, 근대 이성주의 철학사조는 神과 종교의 영역을 도덕의 문제로 돌려버렸으며, 경험주의의 경우에는 신의 존재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프랑스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짧은 정권에서의 엄청난 변화는 현대의 정교분리의 정초가 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시기를 지나면서 가톨릭교회의 세력이 축소되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많은 부분에 대한 견해가 그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필요하며 교황무류성을 철회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사제 결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제2차 대전 기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침묵하고 일부 동조의 모습까지 보인 점을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틀어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여 자신의 주장의 기초를 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고 교회내부의 사건들을 후반부에 중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으나 역사 서술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집고 있는 저작이다. 또한 여러 대안과 희망된 모습을 후반부에 그리면서 교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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