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ies in the Ancient World (Paperback, Revised)
Casson, Lionel / Yale Univ Pr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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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본 : [고대 도서관의 역사 - 수메르에서 로마까지 / 르네상스 ] 

1. 고대 근동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메소피타미아, 이집트 문명에서 최초의 기록물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물은 수메르 인들이 사용한 점토판으로 점토판의 반영구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남아있지 못한 것에 반해 점토판은 현재까지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비춰 볼 수 있다.
수메르 인들은 V자 형의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형문자는 문자 습득에 많은 훈련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 되어있었다.
점토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숫자를 기억하기위한 생활용품의 수를 세기 위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공문서로 확대 사용되었고, 니푸르 근처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관련된 것으로 아마도 학교의 장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학교 도서관이 있었을 거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곳의 장서의 수가 많아질 때 그 장서를 적절히 이용하고 찾아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니푸르의 점토판에서는 문학작품의 목록이 세겨져 있는 점토판이 있으며, 히투사스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보면 판권표기가 되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판권 표기는 점토판을 전부 읽지 않아도 그 점토판의 저자와 내용, 그리고 번역자나 출처, 점토판의 수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그 시대에서도 장서의 도난과 훼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이러한 도난, 훼손 문제와 관련해서 점토판에 처벌과 관련된 내용 또는 신들의 저주에 대한 협박을 적어 놓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의 장서는 장서의 제목을 달아 각 작품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판권표기가 나타난 것, 비슷한 작품을 전집으로 묶는 것, 목록을 만드는 것, 도난과 훼손의 문제가 처음 발생한 것을 보아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다.

2. 그리스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그리스는 수준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발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는 도서관을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4~5세기에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등 문학에 많은 발전이 있었고, 이러한 문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나가다 점차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 알파벳이 생겨나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과거 설형문자보다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철자를 배우는 학교가 있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인 들은 도편을 많이 사용하였고, 도편뿐만 아니라 밀랍판, 파피루스 종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작품에는 파피루스 종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파피루스 종이를 임의로 잘라 말아놓은 것이 두루마기로 하나의 두루마기로 기록될 수 없는 긴 문학작품은 여러 개의 두루마기로 사용한다. 이것이 곧 고대의 책의 개념이다.
이러한 책을 판매하는 서적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와 관계 되어 책 수집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장서를 가진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고, 다라서 책 배열을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사와 필사를 통하면서 원본이 다소 왜곡 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되면서 아테네 정부는 희소성 있는 필사본은 보관소를 지정하라는 칙령을 내리다. 이러한 모습은 알렉산더 도서관이 발생하는 배경이 된다. 
 

3.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사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시작되어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완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뮤세이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게 걸맞게 고대의 두뇌집단을 모으기 시작한다. 또한 그리스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 돈을 들여 사오는 한편 강력한 왕권을 이용하여 가져오기도 했다. 이 대형도서관의 장서관리는 학자들이 맡아 행했다. 호메로스의 시를 정통으로 원문으로 정립한 제노도토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어 문학 분류의 체계를 세웠다. 또 다른 후대의 관장 칼리마쿠스는 문학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작가의 전기들을 기록한 방대한 문학 목록인 120권의 [목록]을 만들었다. 현재 이 목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 학자들의 기록에서 그 책에 대한 참고사항과 인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70년경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4. 도서관의 성장

기원전2세기가 시작할 즈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외에도 다른 왕립도서관이 존재하였다. 주목할 만한 도서관으로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가 창조한 도서관으로 페르가몬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의 규모는 상당히 컸으며 소장된 장서 또한 많았다. 또한 장서를 열거한 표가 작성되었는데 칼리마쿠스의 목록의 유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집트와의 상황과 결부되어 페르메네스는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종이의 수입의존을 낮추고 양피지를 더 많이 사용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리가몬도서관과의 첨예한 경쟁관계가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재관계는 학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으로 확장되었고, 페르가몬 도서관이 성공적 이였다.
그리고, 서민교육의 성행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전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문맹률이 급격히 하락하였다. 미미하기는 하지만 많은 도시에서 자랑할 만한 도서관이 있었다. 이러한 도서관은 주로 개인 기부금 에 의해 운영이 되었고, 교육시설의 부속기관 이였다.

5. 로마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그리스인의 알파벳 기록체계가 에트루리아인이 받아들이고 로마인은 라틴어를 저는데 에트루리아어를 적용하여 현대 알파벳의 선조격인 라틴 알파벳이 생겨났다. 라틴문학은 그리스 문학의 많은 영향을 받았고, 최초의 라틴 작가 플라우투스의 작품 또한 그리스 희극의 라틴 각색물이였다. 그는 극장경영주가 소유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희곡 장서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극장 경영주의 개인도서관과 고전 장서를 보유한 부유한 가문의 개인도서관이 기원전 3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까지의 로마의 도서관의 두 가지 유형이다. 기원저 1세기 중반에는 키케로와 아티쿠스 도서관을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들을 사서로 훈련시켜 필사와 정리, 복원, 목록추가와 갱신, 장서배열등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로마제국의 도서관 ; 로마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서관에 관하여”을 저술한 바로의 협력으로 대규모 공공도서관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폴리오에 의해 로마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세워지게 된다. 폴리오는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공공의 사용을 위한 그리스 도서관과 라틴 도서관 설립을 실현시켰다. 이것은 로마 도서관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두 번째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그 도서관은 ‘ 아폴론 신전의 도서관’ 또는 ‘팔라틴 도서관’이라고 불렸다. 세 번째 도서관도 지었으나 소멸되었다.
로마의 공공도서관은 공공의 소유물이였을 뿐 아니라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도서관에서도 파피루스 권자본이 자제나 표제에 따라 꼬리표가 달린 끝이 바깥을 향하도록 책꽂이나 상자에 배열되었고, 이를 가죽으로 싸거나 항아리, 대리석통 들에 넣어 보존하였다.

7. 로마제국의 도서관 : 로마시 외부

로마의 도서관은 화산폭발로 매몰되었던 폼페이의 발굴로 인해 대규모의 개인 도서관등의 유적이 발굴되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문화적으로 중요한 아테네에는 두 개의 새로운 도서관이 생겼다.그 중 하나는 하드리아누스가지은 도서관이였는데 매우 크고 화려한 도서관이였다. 점차 시간이 가면서 로마 곳곳에 여러 공공도서관, 귀족의 도서관등이 세워 졌고, 그 도서관의 대부분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 문학작품을 소장하였다.

8. 두루마리에서 양장본으로

2세기까지 도서관의 장서는 모두 두루마리 형식으로 일부는 양피지 두루마리였으나 대부분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였다. 약 500년 후, 초기 중세 시대의 막이 열리자 현대의 책 형식인양장본이 두루마리를 대체하였는데, 양장본은 주로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양장본의 사용은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변화였다. 두루마리는 바깥부분은 늘 빈 공간으로 여백이었는데, 반면 양장본의 양면은 현대의 책처럼 늘 기록물로 채워져 있었다. 보통 양장본은 오늘날의 책과 마찬가지로 종이첩을 모아 꿰매어서 만들었다. 양장본이 두루마리를 대체하기까지 약 100년부터 그 후 400년까지의 긴 세월이 걸렸다.
양장본은 도서관의 활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양장본은 서가에 깔끔하게 차곡차곡 보관되었고, 내부 종이는 표지에 의해 보호되었으며, 언제든 원하는 제목의 책을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양장본의 장점은 두루마리보다 많은 양의 내용을 담을 수 있고, 보기에도 편하다. 또한, 통상적으로 나무로 된 겉표지가 있어서 내부 종이들이 상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9. 중세를 향하여

수도원 제도의 성립은 동로마 제국의 변두리인 남부 이집트 사막에서 기원하였다. 4세기 초반에 이집트인 피코마우스가 기독교로 개종란 후 이집트 상단부에 있는 덴디라 사막 근처에 최초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수도원의 행동 지침을 작성하였다. 이 행동지침에서는 수도원의 모든 수도승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나와있다.
9세기나 그 후의 자료를 보면 수도원에는 늘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도서관들은 대개 규모도 작았고, 주로 신학과 관련된 책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카시오도루스는 도서관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상의 땅인 남부 이탈리아의 스퀼라체 부근에 전부터 구상해왔던 전형적 수도원을 지었다. 수도원의 이름은 비바리아 근처에 있던 연못의 이름을 본 따서 ‘비바리움’이라고 지었다. 작품을 필사하는 것이 수도승이 수행해야 하는 당연한 작업이었으며, 수도원 도서관이 필사본을 폭넓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성서 학문 초보’ 에 잘 나타나있다. 수도원 도서관 처음에는 작은 내부대출 도서관이었으나 ‘성서 학문 초보’의 영향으로 점차 연구 도서관으로 발전해 갔다. 수도원 도서관은 사자실을 갖추었으며, 도서관끼리의 대출을 시도하여 필요한 작품이 있는 수도원에서 책을 빌려 필사본을 만들어서 장서의 규모를 확장했다.
612년, 카시오도루스 사후 반년도 되지 않아서 성 콜룸바누스가 파비아 근처의 보비오에 사자실과 도서관을 갖춘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이때부터 사자실과 도서관은 둘 다 수도원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었다.
수도원의 장서는 필사, 선물, 판매, 절도, 약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져서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주요 도서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주요 도서관은 페트라르카와 같은 독서에 일가견이 있던 학자가 설립하였든, 메디치 일가와 같은 수집에 일가견이 있던 귀족 가문이 설립하였든 도서관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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