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이야기 멈퍼드 시리즈 2
루이스 멈포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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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슬프고 절망하며 탄식한다. 그런 슬픈 꿈을 우리는 한 마디로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에덴동산이나 그리스인의 엘리시움과는 다르다. 그 곳은 어떤 의미에서 상상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곳으로 수정되거나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의 개혁과 변화의 의지는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반면 유토피아는 개혁과 변화가 가능하다. 나의 상상과 의지에 의해 유토피아는 어떠한 형태로든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우리가 거주하고 실제로 생활하는 현실세계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에서 나의 변화의 의지는 세계를 변화시키기에 역부족이며 그것은 오직 나만의 꿈 속의 공간인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세계관이 삼투되어 있지만 꿈꾼 자신만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그 공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곳이다. 즉, 유토피아는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의 저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그린 유토피아가 어떠하든간에 관심받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공간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꿈꾼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를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 항상 슬프고 음울하고 탄식을 자아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루이스 멈포드의 [유토피아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인 오우토피아(outopia)의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활이 가능한 에우토피아(eutopia)의 세계를 말한다. 멈포드는 현실 속의 가능한 유토피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유토피아다. 멈포드가 꿈꾼 세계는 미래의 현실에서 가능한 공간이다. 우리에게 희망의 미래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멈포드가 제시하고 있는 희망의 미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20세기이래 영화 등의 다양한 대중매체에서도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은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 미래는 디스토피아(distopia)이다. 어둠침침하고 눅눅하고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싫은 미래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 사회의 조건들로 인간과 기계, 인간과 자연,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대결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가들은 그들이 살아온 현실을 바탕으로 그런 미래를 상상했으리라. 그만큼 20세기 이후 인간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불확실할 뿐아니라 음울하기까지하다.

사실 멈포드가 이 글을 쓴 시기는 어찌 보면 더욱 혼란스런 시기였다. 이 책이 처음으로 출판된 1922년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이다. 한 마디로 인간과 문명 그리고 그것을 낳은 기술에 대한 회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그럼에도 멈포드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과 달리 긍정적인 미래 사회에 대한 토대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토대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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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늑대인간 werewolf가 있다면 일본에는 인간늑대 인랑이 있다. 늑대인간이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다면 인랑은 첨단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서양의 늑대인간은 '달'이라는 외적 자연의 기운이 충만할 때 늑대로 변하지만, 인랑은 그와는 상관없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에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늑대, 짐승이다. 늑대인간이 늑대와 인간이라는 이중의 실체로 갈등하고 있지만 인랑은 인간의 외양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날을 쓰고 있기에 다른 인간들은 인랑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동일한 인식과 감성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인간의 착각이 인랑의 존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짐승은 짐승일 뿐 인간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속까지 인간이 될 수 없는 인랑. 철학자 레비나스 식으로 타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인랑. 현대의 과학과 인간의 탐욕, 이기심, 그리고 그로 인한 동물적 생존 본능. 이것들이 현대 사회 사람들 사이에서 인랑이라는 인간 늑대를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서양의 늑대인간은 자연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던 시기의 인간의 두려움, 공포, 나아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인랑은 현대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영화에서는 서양의 유명한 동화 [빨간 두건]의 이야기와 인랑이 중첩된다. [빨간 두건]의 늑대 또한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결말을 가진 여러 판본에도 불구하고 [빨간 두건]의 늑대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책을 읽을 아이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인랑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본성의 산물이기에 불멸이다. 이것이 이 만화를 우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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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비밀 -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4
강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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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비밀'이라는 제목이 재미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비밀이란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이 그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의 비극이다. 그리스 신화 전문가인 저자가 그리스의 비극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는 누구이지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 대해 알기에는 우리와 그리스 비극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비극의 내용을 조금 들으면 전체적인 줄거리를 어느 정도 떠올린다.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은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 왔기에.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비밀'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한 마디로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 내막은 그리스 비극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형식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스 비극 작가 나름의 개인적인 특징이 있고 그 당시 그리스의 문화적 배경 등이 우리에게는 너무 생경하기에.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주 전문적인 사실과 내용을 부담스럽지 않은 어투로.

사실 이 비밀이란 당대 그리스 관객과도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관객들은 상연되는 비극의 내용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관객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품을 무엇 때문에 본 것일까? 이것이 또한 저자가 비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형식적 특징을 저자는 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우선 그럴 경우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이 책은 비극을 비롯한 서양 연극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위한 전문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을까?) 두번째로는 그리스 비극의 형식적인 특징은 우리가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고 당연히 그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상당히 빈약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비어있는 틈새를 메우기 위해 저자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지금도 연구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그래도 많이 알려져 있는 그리스 비극과 달리 그리스 희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이번 기회에 그리스 희극에 대해서도 좋은 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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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no (Hardcover)
Brown, Dan / Random House Inc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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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댄 브라운의 소설이 출판되었다. 지난 번에는 미국의 워싱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더니 이제는 이태리다. 다음은 어디일까?

<인디애나 존스>가 채찍과 끔찍한 모험을 통해 전세계의 다양한 고대 유물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현대의 인디애나 존스인 랜던 교수의 기호와 상징의 해석을 통해 과거를 접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참 유행한 인디애나 존스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이번에는 랭던이 어떤 활약을 할까 궁금해한다.

이번에는 단테의 유명한 [신곡](Devine Comedy)다. 댄 브라운은 아주 유명한 예술작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중심소재로 쓰고 있다. 첫 작품의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에서 이제는 단테의 신곡으로. ( 물론 그 이전 작품에서는 교황의 선출과 관련된 사건들을 소재로 하기도 했지만.) 인디애나 존스가 어두운 동굴과 같은 곳을 헤맨다면 랭던은 도시의 골목을 이리저리 헤맨다.

다빈치나 단테는 모두 아주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들이다. 이들에게는 아주 다양한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가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과 엮어져서 새로운 이야기인 듯 한 소설로 재창조된다. 많은 사실과 사실적인 내용이 소설, 허구(fiction)로 재구성된다. 이번에도 맬더스의 인구론적인 시각과 핵을 넘어선 새로운 위험으로 등장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작품을 구성하는 얼개이다.

이런 복잡성이 독자들의 흥미를 끈다. 내가 알고 있는, 또는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내용이 댄 브라운의 펜을 통해 어떻게 잘 버무려지는가를 보는 흥미. 그런 의미에서 브라운의 소설은 우리나라의 비빔밥과 다르지 않다. 얼마나 열심히 잘 버무리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재료를 집어 넣느냐에 따라 비빔밥의 맛은 달라지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비빔밥의 마무리인 참기름 또는 들기름일 것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도 단테의 유명한 구절을 소설의 실마리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표현이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강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여! 여기 아주 애매한 시의 베일 밑에  숨겨진 가르침들을 들여다보아라." 작가는 우리에게도 이런 행위를 요구하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우리는 기꺼이 이를 행하고 스스로 지성을 가진 존재라고 자부하리라.

그런데 이번 소설이 그의 이전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대인들이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세계에 대한 공포이다. 전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우리에게 세계는 그리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폭력이 난무하고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심지어 새로운 바이러스에 의해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한다. 이런 세계가 지옥이 아니면 어디가 지옥이겠는가?라고 소설의 악한인 조브리스트 그리고 작가 댄 브라운은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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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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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독특한 작품을 읽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시간이 그러하고 서술하는 형식 또한 독특하다. 우선 네 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두 여성의 삶을 일인칭으로 서로 교차해서 쓰고 있다. 1장과 3장이 정애의 의식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2장과 4장은 정애의 고향 친구인 묘자의 의식을 중심으로하고 있다. 시간상으로 각각 첫 장이 어린 시절을 두번째 장은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을 다룬다. 두번째로 최근 우리 소설에서 다루지 않는 시대를 이 작품은 다룬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 박정희 정권 말기와 전두환 정권의 초기, 새마을 운동으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시기와 5.18 광주사태로 대변되는 폭력의 역사가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이다. 과거 많은 작가들이 이 시기를 다루었다. 특히 5.18은 우리 문단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예컨대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는 독특한 서술기법을 통해 5.18이 어떻게 어린 소녀와 어른에 의해 각각 체험되고 있는가를 잘 다룬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새마을 운동과 5.18이 함께 논의되는 작품은 드물다. 또한 그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그 시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만이 중요하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표피적이고 일회적인 것만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새마을운동과 5.18은 중요하다. 두 사건은  70년대와 80년대라는 각기 다른 시기의 사건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편으로 밀접한 연관을 띠고 있다. 정애와 묘자에게 특히 그러하다. 그들에게 그 사건은 다른 사람들의 일인 동시에 자신의 일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두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고 나아가 그들의 삶은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은 역사적 시간의 도도한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급류에 휘말려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정애는 정신질환과 죽음으로 묘자는 감옥을 다녀오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독특함은 그 두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데 있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 좀 더 본질적인 것을 그 두 사건을 통해 그리고 정애와 묘자의 삶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역사와 신화를 다룬다. 정애와 묘자의 이야기는 합리적 이성의 근대가 자행하는 폭력에 망가져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물론 새마을운동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폭력은 정애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개공창 안에 살던 실지렁이, 가재, 달팽이처럼 우리도 시멘트 반죽에 갇혀서 납작해졌다. 묘자와 나는 봄 내내 시멘트 반죽 속에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근대화는 묘자와 정애 뿐아니라 주변 자연까지도 피폐하고 하였으며 근대의 시장경제논리는 마을 전체를 관통하고 거대한 힘이 되었다.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정애는 자신을 짓누르고 씻을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하는 역사의 흐름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근대의 논리는 정애를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박샌 등이 자행하는 폭력은 그녀의 육체라는 외피는 파괴했을지도 모르지만 정신은 건드리지 못한다. 정애의 정신은 근대 그리고 역사의 구조와는 다른 신화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신화는 전혀 다른 구조물이다. 역사가 구체적인 언어로 기록된다면 신화는 명확하지 않은 노래로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애에게 아버지의 말은 알아먹을 수 없는 반면에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알아먹기 쉽다. 역사의 언어, 또는 말이 공적 담론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어머니의 울음 소리, 그리고 아버지의 주문과 같은 신화의 노래는 매우 사적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알 수 없는 노래가락과 같다. 하지만 그 신화의 노래가락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들의 삶의 한 축임에 분명하다. 정애는 바로 그 한 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때문에 정애는 마을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 주변 자연사물, 예컨대 심지어는 혐오스러울 수 있는 쥐와 박쥐와 대화한다. 20세기 초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1차세계대전이라는 근대의 역사를 논하면서 신화적 시간으로 회귀했다면 21세기 초 공선옥은 새마을 운동과 5.18의 역사를 통해 신화적 시간을 노래한다. 아마도 이 작품의 제목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물음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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