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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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의 힘"은 무엇일까? 어디에서 올까? 항상 우리는 기대하고 꿈꾼다. 하지만 최근 그 기대와 꿈은 실망을 되돌아온다. 최근 표절 논란에서 시 또는 문학의 힘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종종  무너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기대하고 꿈을 꾼다. 그리고 그런 기대와 꿈을 여전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한 문학인이 있다. 그는 자신을 시를 썼지만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인 언저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히 겸손의 표현일까? 아니다. 이는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시의 힘을 염두에 두고 항상 경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는 여전히 자본주의 상품경제 구조를 벗어나 그 너머에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자만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희망을 전달하는가? 필자는 그에 대해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쉰의 말을 빌어 저 끝에 희망을 확신하지 않지만 시의 길을 만들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그 길을 가는 도중 어디에선가 희망을 맞닥트릴 수 있겠다고 그는 말한다.

여전히 필자 서경식이 시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탕에는 시와 사회의 연관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심미나 탐미가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 시의 목소리와 힘은 시가 사회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서경식의 믿음과 확신은 객관성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이는 과학적 객관성과 사회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핵심적인 키워드인 디아스포라가 가져온 중심을 바라보는 주변부의 시선이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 엄밀히 재일 교포로서 20세기를 살고 21세기의 글로벌리즘 시대를 사는 서경식에게 현실 속의 일본과 한국은 모두 그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그 중심으로 향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주변의 자리가 줄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삶의 가져오는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경계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기는 쉽지 않고 서경식은 분명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근원적인 본질에 대한 믿음과 천착에서 나온다.

일본에서 주로 살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버리지 않으려는 노력과 의지가 작가로서의 서경식을 낳았다. 다시 말해 그는 물리적으로는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디아스포라를 즐기고 나아가 중심을 향해 말하고 있다. 서경식의 목소리는 바로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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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늑대인간 werewolf가 있다면 일본에는 인간늑대 인랑이 있다. 늑대인간이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다면 인랑은 첨단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서양의 늑대인간은 '달'이라는 외적 자연의 기운이 충만할 때 늑대로 변하지만, 인랑은 그와는 상관없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기에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늑대, 짐승이다. 늑대인간이 늑대와 인간이라는 이중의 실체로 갈등하고 있지만 인랑은 인간의 외양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날을 쓰고 있기에 다른 인간들은 인랑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동일한 인식과 감성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인간의 착각이 인랑의 존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짐승은 짐승일 뿐 인간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속까지 인간이 될 수 없는 인랑. 철학자 레비나스 식으로 타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인랑. 현대의 과학과 인간의 탐욕, 이기심, 그리고 그로 인한 동물적 생존 본능. 이것들이 현대 사회 사람들 사이에서 인랑이라는 인간 늑대를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서양의 늑대인간은 자연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던 시기의 인간의 두려움, 공포, 나아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인랑은 현대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영화에서는 서양의 유명한 동화 [빨간 두건]의 이야기와 인랑이 중첩된다. [빨간 두건]의 늑대 또한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결말을 가진 여러 판본에도 불구하고 [빨간 두건]의 늑대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 책을 읽을 아이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인랑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본성의 산물이기에 불멸이다. 이것이 이 만화를 우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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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이다.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자가진단 기능이 있고 그 진단에 따라 항상 자신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려고 한다. 흔히 항상성(homeostasis)라는 생명체의 기능은 외부 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체온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 생명체의 강한 생존 의지는 대단하다. 어찌 보면 그와 같은 기능에는 신성성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최근 자연의 변화는 심상치 않다. 장마 기간보다 장마가 끝난 후의 강수량이 더욱 많아지면서 점점 아열대기후로 변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소나무 재선충병은 점점 북상하고 있으며 대나무의 성장한계선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와 함께 인간의 몸 또한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점점 증가하는 성인병, 정신병 등은 만성적인 자연 환경의 변화로 유발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인간의 병들의 대부분이 인간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자연 환경의 변화 또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그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 환경과 인간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생명체의 호메오스타시스 기능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는 낳는다. 경제와 환경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자연 환경의 보존과 그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슈마허는 그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신성하지 않다"고 말한다, 종교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의 창조물이라면 그 창조물에는 신성함이 존재하고 그 신성함을 설명하는 일부가 항상성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인간의 활동은 그 신성함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니 인간은 참으로 대단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갑자기 바벨탑의 신화와 인간의 비극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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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오래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 사회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의무 또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의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구 사회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한 사회의 일원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이 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현 사회를 들여다볼 때 이 말이 지니는 함의는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소위 명망과 인기를 한껏 누리고 있다는 많은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모습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치부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망각한 행동에 기인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만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인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환경 그리고 그 환경의 역습을 조금씩 체감하는 지금, 어쩌면 우리 모두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망각해 온 것은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해 왔다. 다시 말해 스스로 귀족인 양 행세하면서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열등한 존재로 내려다보았을 뿐 아니라 착취(exploit)해 왔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자연 만물에 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기억해야만 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가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나아가 그 다른 존재들에 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그 가운데 인간의 탈색된 올바름과 정의로움은 새로운 환경의 색을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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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지식을 생산해왔으며 그 지식을 학습해왔다. 심지어 지식에 대한 학습을 강요해왔다. 특히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 유명한 격언과 "지식강국"이라는 표어가 함축하고 있듯이,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심지어 국가의 운명이 바로 이 지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이 생산하고 축적해온 지식이 인간과 국가, 나아가 지구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발전시켜왔는지는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예컨대, 수많은 전쟁의 기록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의 지식은 다른 인간의 인간성을 짓밟기도 하고 심지어 그 인간 자체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법이나 도덕 등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제재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지식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인간의 지식이 인간의 운명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더라도, 인간의 지식이 가져온 문명과 그리고 과학기술 등은 다른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주변의 다른 환경을 착취 또는 남용한 결과라는 사실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유명한 성경의 지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는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정당화되고 있는가 또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의 구절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창세기의 선악과 나무를 알고 있고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지식에 관한 구절이다. 아담과 이브는 지식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지식을 금지시켰는가? 지금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성장을 가져왔는지를 의심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느님의 금지한 지식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지식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인간의 앎과 지식은 어떤 지식이어야 하는가?  이 또한 성경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나서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자신의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다. 다시 말해 인간은 금지된 지식을 알고 나서 나와 다른 사람, 나아가 나와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그 지식을 통해 그 차이를 점점 넓혀왔다. 따라서 하느님이 금지한 지식은 나와 다른 것을 구분하고 그 안에 위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하느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권리만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지식이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을 확대하고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슈마허의 "작은 것은 아름답다"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 지식의  (겉으로 보기에) 대표격인 현재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 또한 이러한 생각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생태학에서 슈마허의 글은 더욱 더 의미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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