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외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주문하고 배송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거다!"였다. 조안나 러스를 포함해 총 15작가의 단편이 실려 있으므로 다양한 브랜드의 초컬릿이 모여 담긴 선물 상자를 받은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알고 있던 작가보다 알고 있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이 다량 실려 있었고 SF를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독자로서 알지 못해서 읽지 못해온 작가들이 많았던 터라 뭔가 새로운 발견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또한 뒤표지에 실린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SF 소설계에 페미니즘 르네상스를 이끌어온 전 세계 여성 작가"의 작품들을 그러모았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출간은 사회적으로 비추어봤을 때도 시의적인 성격을 띈다. 일전 와우북에서 진행된 포럼 <젠더 문제를 말하는 SF의 방식>에서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SF라는 장르는 그 자체로 소수자를 위한 문학적 성격이 짙고, 소수자의 자리에 있는 '여성' 작가, 그리고 그들이 쓴 페미니즘 SF 소설들의 출간이라는 점에서도 가치 있는 책이다. 



 반다나 싱,「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결혼 생활에 의문을 갖게 된 아내의 변화 양상이 무척 인상 깊었다. 또한 그녀가 지구의 중력을 반대하며 하늘을 오를 때 어떠한 사회적 제도나 관습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대리경험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수전 팰위크,「늑대여자」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판타지적 웨어울프의 개념을 순식간에 뒤흔든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말 그대로 인간과 늑대의 생을 동시에 사는 인물이다. 정신적인 나이와 육체의 나이 마저도 늑대의 생과 비례한다. 그녀가 인간 남자 조너선을 사랑해 희생하고 포기해온 모든 것들, 그리고 행복했던 일상이 점차 무너져 가는 모습들은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생애에 발맞춰 걸어왔던 사연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말 또한 마음을 저리게 한다.     



 조안나 러스,「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제목에서 '그들'로 지칭되어진 남성들의 등장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충분히 안정되어 있던 여성 사회에 침입하다시피 등장한 남성들, 여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진 사회만이 정의라는 그들의 의식, 남성 위주의 사회적 인식들을 대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잘 보여진다.   



 캐롤 엠쉬윌러,「애들」


 여성의 역할을 '어머니', 자궁으로만 한정한 채 여성의 마을, 남성의 마을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배경이다. 이곳의 남성들은 각기의 마을을 적으로 산정한채 늘 전쟁중이며, 어머니 마을에 방문해 아이를 출산 시키고 남아들을 납치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성 역할 구분은 마치 인간을 용도에 따라 나누고 있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결론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에일린 건,「중간관리자를 위한 안정화 전략」


 생물공학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 인간들은 여전히 사회구조를 간직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생물공학적으로 개조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 특이하게 보여지는 점은 기업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지점이다. 주인공인 여성이 기업문화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거치는 과정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카린 티드베크,「숙모들」


 '오렌지 온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거대한 육체를 지닌 세 숙모들과 세 소녀들 사이를 잇는 의식과 전승의 과정이 환상적인 형태로 그려진다.  



 켈리 에스크리지,「그리고 살로메는 춤을 추었다」

 

 헤로데와 살로메, 요한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올리려는 마스에게 독특한 배우 조가 오디션을 보러 온다. 요한 역에 지원했던 조는 요한이 아닌 살로메로 무대에 서게 된다. 조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며 젠더적인 구분만 흔드는 것이 아니라 마스의 인생 마저 뒤흔든다. 무대 밖과 무대 안,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 안과 구분 밖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앙헬리카 고로디스체르,「완벽한 유부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완벽해 보였던 어느 주부에게서 엿보는 그녀만의 자유로운 이중생활. 그녀에게서 보이는 이편과 저편의 간극이 흥미롭다. 



 안네 리히터,「식물의 잠」

 

 식물처럼 살길 원했던 여자가 정말 식물이 되는 이야기. 식물이 되고 싶었던 인간에서, 식충식물, 오롯한 식물이 되어가는 과정과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남들만큼만 사는 삶을 벗어나 오롯하게 자기가 살고 싶어 하는 삶을 이뤄낸 여자는 '숨 막히게 멋진 꽃'을 피워낸다.



 히로미 고토,「가슴 이야기」


 신생아를 기르는 부부의 이야기다. 모유수유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종래에 가슴을 도려내 남편에게 이식하는 상상력은 원색적이면서도 날 것의 느낌을 준다. 동아시아 전역을 휘감는 모유수유에 대한 신기할 정도의 믿음과 여성으로 하여금 엄마로서의 역할을 당연시하는 사회상에 대해 날을 세운 시선으로 비추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팻 머피,「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성」

 

 동물 세계에서의 성욕과 역할, 로봇 동물 한 쌍과 그들을 관찰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연애와 임신, 출산의 문제를 동물학적으로 비교하며 접근한다. 주인공의 세계는 허공이 붕 떠있는 것 같은 회색이다.   



 어슐러 K. 르귄,「정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문센보다 먼저 남극을 탐험했던 여성 탐사대의 이야기로 초기 남극 탐험에 대한 보고, 회고 형식을 띄고 있는 작품이다. 자연의 가혹함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간간이 등장하는 남성들이 실망할지도 모르니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된다, 라는 언급들이 등장한다. 읽는 내내 그 부분을 보고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캐서린 M. 밸런트,「시공간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성서에 등장하는 창세신화를 과학적요소로 융합해 새로운 신화를 탄생시켰다. 이 신화는 SF 작가인 여성이 태어나고 결혼과 이혼을 하고 제 심장을 심연에 던져버리는 서사와 맞물려 상호 조응한다.  



 파멜라 사전트,「공포」


 극단적인 남성지배 사회 속에서 몸을 숨긴 채 살아가는 어떤 여성의 외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성을 찾기도 드물 뿐 더러 그 존재 자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화가 된 세상을 그리며 성별의 균형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 남성들 사이에서도 트랜스한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들로의 구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물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멸과 혐오, 혹은 소유의 정서 등도 양지의 것이 되어 있다. 외출한 동안 자신이 여성임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조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엘리자베스 보나뷔르,「바닷가 집」


 인간과 인간형 인공물이 존재하며 과학적 기술이 무척이나 발달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가출했던 여성 마노우가 창조자이자 어머니인 타이코에게로 귀향하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마노우였지만 다시 만난 타이코와의 대화를 통해 화해를 하게 된다. 둘의 관계는 유사 모계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486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타이핑을 하고 있는 지금도 무어라 말을 이어야 할 지 모를 만큼, 어느 순간 시집 독서는 굉장히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이장욱의 글은 늘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시도, 소설도, 비평도, 번역도 단 한 번도 실망이라는 감정을 안겨준 적이 없다. 이장욱의 네번째 시집인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입에 굴릴 때마다 정말 그 답다는 생각을 곱씹게 했다.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이장욱은 "태어난 뒤에 일관성을"(「일관된 생애」)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런 일관성을 지닌 것 같다. 그의 문학에 대한 성실함, 삶에 대한 치열함은 어떠한 일관된 맥락으로 글 속에 드러난다. 


 나는 이번 시집에 대하여 "가능하지 않아서 영원한"이라는 부제를 달아보았다. 시집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정서가 그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다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된 이가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얼음처럼」) 녹아버리는 지점은 세계에 대한 사랑도 완성형이 아니며 견고한 침묵은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침이 가능한 것은 영원이 아니라서고 그래서 화자는 녹아버린다. 나는 이런 모습이 오히려 영원해보였다. 


 아침이 아침일 수 있는 이유는 하루의 모든 시간이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은 지구에 움직임에 따라 자리를 달리하고 그런 태양의 영향으로 아침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된다. 무르익은 밤이 지나가면 아침이 온다. 이처럼 영원하지 않은 아침 때문에 아침은 아침이 될 수 있다. 영원함이 가능하지 않아서 오히려 영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얼음이 얼음일 수 있는 건 녹을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이같은 영원, 즉 완성을 미루고 미루어 영원함을 획득하는 심상은 많은 시들에 들어나 있는데 「기린과 /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 사이에서」를 보아도 그러하다. 화자인 나가 꺼낸 "목이 긴 기린"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은 채 "도시의 골목" ,"기린과 /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 사이를" 거닌다. 가만히 섰던 나는 또다시 "당신"에 의해 꺼내어져 "내가 아닌 모든 것과 / 나의 / 명백한 사이에서" 아마도, 거닐 것이다. 


 당신과 나와 목이 긴 기린은 교묘한 삼위일체를 이룬다. 분리된 듯 분리되지 않은 관계, 나는 기린이고 당신이며, 기린은 나고 당신이며, 당신은 나고 기린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순환의 구조는 하나의 주체로서의 존재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지 않는 의도적인 구성이다. 그리고 이처럼 선언되지 않는 주체들, 순환을 반복하거나 완결되지 않은 주체들이 시들의 화자로 기능한다. 


 "임종의 얼굴"을 한 "야간근무자"(「야간근무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전화를 건다. "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처럼 "만났으므로 헤어진 연인"은 "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밤에는 역설」)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러한 역설이 끝을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완결성 없이 지속된다. 완결은 이처럼 가능하지 않기에 영원을 띈다.

 

 어쩌면 이장욱의 문학도 그와 같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문학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길 빈다. 하나의 시, 하나의 소설이 한 권의 책이 되고, 그 뒤를 꼬리 물며 수많은 작품들이 줄을 이었으면 좋겠다. 계속 그의 문학은 넓어지고 깊어져서 그 너비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그의 사유는 나날이 더해져 그이 자신도 스스로의 바닥을 알 수 없었으면 한다. 그는 완성되지 않아야 한다. 완전함이란 것의 불가능성을 영원히 간직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먹먹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의 첫 장을 펼 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대했던 건 늙은 세탁소 주인과 아들을 대신해 자리한 로봇의 유쾌발랄한 소동 정도였었다. 다루고 있는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읽었던 책이 『위저드 베이커리』 하나 뿐이었던 나로서는 아마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구병모 작가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서 그녀가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로 어떤 문학적 궤적을 그려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스푼의 시간』을 읽고 나니 충분히 알겠다. 이야기를 구축해내는 그녀만의 힘, 단단한 문장을 타고 흐르는 서정과 공감, 그로 인한 빛줄기는 은근하지만 꾸준하게 타올랐고 타오를 것임을 말이다.


 로봇이 등장한 영화는 많이 알고 있었다. 'A.I.'라던가 '엑스 마키나', '로보캅', '퍼시픽 림' 같은 정도. 그와 같은 이야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인공지능 로봇들이 등장했고, 훨씬 더 액션이라던가 가족성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컸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소설을 펼치기 전엔 난 'A.I.'와 같지 않을까 했다. 아들의 죽음은 미상이고 심해 어딘가에 잠들었을 아들이 보낸 로봇이라는 점에서 그런 연상을 했던 것 같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늙은 세탁소 주인 명정은 로봇에게 죽은 아내가 둘째를 낳으면 지어주기로 했던 이름 '은결'을 준다. 명정과 은결은 아버지와 손자처럼 지내지만 여기서 중심을 갖게 되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결은 로봇, 기계의 속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결은 'A.I.'의 데이비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 데이비드는 인간 가족, 인간 엄마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그러나 은결은 수많은 데이터를 이합집산하여 이루어진 기계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간직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은결'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명정의 로봇이 된 이후 명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의 시간. 명정의 세탁소 일을 돕고, 그러면서 만나온 시호와 준교, 세주가 성인이 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거나 아이의 엄마가 되기 까지의 모든 과정들을 은결은 지켜본다. 그들의 삶이 찬란한 희망으로 빛나고 혹은 굴곡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화내는 순간순간들을 은결은 본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흡수한다.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될 때 마음으로 느끼고 정신으로 이해한다면 은결은 0,1의 배열로 해독한다. 그리고 그런 은결의 곁에 명정이 있었다. 로봇의 로봇됨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기계로만 대하지 않았던 주인 명정의 섬세한 배려가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내내 짙게 내려앉은 물안개에 감싸인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피부에 내려앉는 물기, 서늘하지만 축축한, 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스며 있는 것 같은 공기였다. 은결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랬다. 0,1로 이루어진 세계의 배열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감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 아이가 발장구를 치며 이불을 빨 때 다정하다, 따뜻하다, 하는 감정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은결만의 세계 역시 그랬다. 


 은결은 결코 감정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명정이 묻어났다. 후미진 동네의 작은 세탁소, 자신이 떠나는 순간까지 소년의 거취를 걱정했던 노인. 주인이 죽고 나서야 세제 한 스푼의 시간으로 명령을 거부한 소년. 떠나야 하는 이와 남아 있는, 아니 철저히 남겨질 이. 


 이 책이 많이 읽히면 좋겠다. 흐린 하늘, 습윤한 공기. 어디서부터 흘러왔을지 모를 감정의 물기. 한 스푼의 시간을 닮은 오늘의 날씨.


 - 영화화 됐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감옥
찰스 스트로스 지음, 김창규 옮김 / 아작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리감옥’ 속 세계관은 아주 놀랍다. 현재에서 발전한 문명 수준이 아니라 뭔가 다른 차원의 발달된 문명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27세기 인류는 기억의 백업 프로그램으로 여러 생을 살아가며 영원히 살 수 있다. 주인공인 ‘로빈’ 역시도 한 때는 역사학자였고, 탱크였으며, ‘큐리어스 옐로우’라는 네트워크 웜과 싸운 전투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유리감옥’에 갇힌 이후의 로빈은 정규인간 여성의 형태를 갖춘 ‘리브’가 되기까지 한다. 즉 기억의 백업으로 인해 한 육체가 죽어도 다른 육체로 전승되어 새로운 생을 살 수 있으며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도, 살려두기도 할 수 있다.


 27세기의 인류는 기억을 백업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탱크와 같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남녀의 성을 바꿀 수도 있으며 팔이 네 개가 달린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머리 하나에 팔 둘, 다리 둘, 생식기로 이루어진 정규 인간만을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인간이 아닌 정신, 그리고 존재 자체로 보인다. 즉 그들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사물, 아이스 구울, 그 어떠한 육체적 형체도 아니고, 남성이나 여성과 같은 생물학적 성별도 아니다. 그저 과거를 살았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나’라는 자아 뿐이다. 내가 인간이었어도 탱크였어도, 남자였어도, 팔이 네 개가 되어도 ‘나’일 수 있는 자아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인물들에서 엿보여지는 젠더적인 성향은 소설 전체를 이루는 가장 큰 줄기가 된다.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성별을 특정하게 대하는 사회적 함의가 아니며, 소설 속 인물들이 사회가 은연중 강제하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갖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 육체적인 성적 욕망은 있어도 명시된 생물학적인 성별도, 사회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성별도 없다. 성별이 나뉘는 것 자체가 존재치 않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강제가 이루어지는 곳은 주인공과 다른 인물들이 갇히게 되는 ‘유리감옥’에서일 뿐이다. 유리감옥에서는 sex와 gender를 일치하게 보고 그에 따른 특정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27세기 인류가 사는 사회의 과학기술적인 측면은 분명 현재의 우리와 그 끝이 안보일 정도로 동떨어진 형태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확실하지만 암흑시대를 재현하고자 실사 실험을 한다는 ‘유리감옥’ 속 세계는 21세기 지구 인류의 그것이다. 소설을 읽게 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남자는 직업 세계에서 분투하고 여자는 가정을 꾸리며 사교와 양육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회, 매 주마다 충실히 교회에 나가야 하고 남성에게는 남성으로서, 여성에게는 여성으로서 입어야하는 의복이나 교양까지 지정되어 있던 사회는 1900년대 중후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몸은 암흑시대의 남녀이지만 속은 27세기의 인류라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그들도 그들에 따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나 개인의 성향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암흑시대에 충실히 젖어든 이도 있고 우리의 주인공처럼 거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이도 있고 ‘유리감옥’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지배적 욕망을 펼치려는 인물도 있다. 그런 부분들도  눈여겨 볼만 하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복합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하나의 원형, 그 휘하로 존재하는 다수의 복합체, 그리고 복합체 융합. ‘나’이지만 수천가지이며 수천가지지만 하나의 ‘나’. ‘복합체’의 사용은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에서 처음 보았었는데 찰스 스트로스도 유사한 사용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SF 분야의 소설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러한 ‘복합체’ 요소가 닳고 닳은 클리셰인지 근래 등장하기 시작한 요소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앤 레키의 소설을 워낙 즐겁게 읽었던 터라 마찬가지로 즐겁게 여겨졌다.


 인물적 측면에서 로빈(리브)을 비롯해 소설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은 2016년의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non-sexual적 젠더 성향과 고정되지 않은 육체 구조, 기억 백업 시스템을 통한 전승, 다수 개체로 이루어진 복합체 시스템을 그들 인류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리감옥’의 구성 요인들을 통해 21세기의 기관과 관습의 부조리, 아직도 변하지 않은 사회구조적 패악에 대하여 좀 더 깊숙이 숙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차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이 소설집 속 김금희의 세계는 인물들을 둘러싼 불안의 정조와 그들 사이를 맺고 있는 불균형적인 시소게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보여지는 필용과 양희, 「조중균의 세계」의 나와 조중균, 「세실리아」의 정은과 세실리아, 「반월」의 나와 이모, 「고기」의 사모님과 마트 남자, 「개를 기다리는 일」의 그녀와 엄마, 「우리가 어느 별에서」의 그녀와 신발을 찾는 (수녀님 닮은) 여자, 「보통의 시절」의 나와 위의 형제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모과장과 순태.


 이들 중 그 누구도 삶의 중심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없다. 그들은 분명 지상과 연결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재밌는 것은 A와 B가 이상한 시소게임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의 경우를 보자. "천원, 이천원을 쥐여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던 양희의 사랑고백에 필용은 모욕감을 느끼지만 반면 "뭔가 양희의 관심을 절실히 원하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확인하고 때론 표현하고 싶은 것, 양희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양희의 감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양희가 사랑의 감정이 소멸했음을 알렸을 때 필용은 당황한다. 그 스스로 경멸해왔던 양희의 수많은 '없음'들에게 사탕발림을 하고, "돌변해 물어뜯기"까지 한다. 양희는 그렇게 떠나고 필용은 양희를 되찾지 못한다. 모든 것은 필용의 감정이고 필용의 사랑이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랑이었다. 물론 이 또한 양희의 감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시간이 지나 가정의 가장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지금은 직급상 좌천된 필용이 양희의 연극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를 보게 되는 것도, 그래서 양희의 앞에 나서고 싶고, 나서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필용의 것이다. 필용만의 무게이다. 이토록 이 소설은 필용의 무게와 양희의 무게가 비등하지 않다. 감정적인 무게가 이토록 다르다. 불균형한 시소이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은 애초에 어떤 곳에 무게를 다하여 다른 곳에 무게를 더할 수 없는 추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조중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라.) 여기에서 화자인 나는 그런 조중균의 건너편에 배치된 추이지만 그들은 무게를 겨룰 수가 없다. 조중균의 무게가 '나'와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시와 같은 곳에 자리한다. 그가 썼으나 그가 쓰지 않았다는 시. 누구나 쓴 시이며 누구도 쓰지 않은 시의 자리, 그것이 조중균의 자리이다. 그러한 까닭에 조중균의 무게추와 '나'의 무게추는 아무리 만나도 무게를 겨룰 수 없고, 결국 조중균의 세계가 퇴출됨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세실리아」속 정은과 세실리아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과거의 기억과 친구들의 발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실리아를 정은이 만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것은 사소한 자유 연상의 결과에 불과하였으며 '애국하려고'라는 이유처럼 갖다 붙이기 나름인 것, 별 거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이유라면 세실리아와 사겼다던 치운의 이혼이, 전남편인 관장의 청첩장이 정은으로 하여금 세실리아를 떠올리게 했고 세실리아를 만나게 하는 동인이었을 거라는 추측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세실리아에게 정은은 좀 다른 의미였다. 의미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혼자 울곤 하던 정은을 세실리아는 기억했다. 세실리아는 막연히 기대했다.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이 말 뒤로 치운에 대한 세실리아의 고백이 이어지고, 세실리아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하며 정은의 안에서 빠져나간다. 


 어쩌면 대학시절의 세실리아는 정은이 알지 못하는 사이 정은을 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긋났고, 세실리아는 여전히 "이미 버려진 것들을 별처럼" 주우며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싶지만 가장 저점의 온도에서 그러지 못하고 홀로 동결"했으며 여전히 동결할 예정이고, 나는 이제와 "별안간 모든 게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걷다가, 소리치며 걷다가, 노래를 하며" 걷다가 세실리아의 번호를 지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소로 치면 A는 앉았는 데 B는 앉지 않고, A는 일어났는데 B는 앉으려 한, 그래서 한 쪽이 빈 채 시소 게임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등을 돌린 채 스스로의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앞선 단편 세 편만 살펴보았지만 뒤로 이어지는 단편들도 비슷한 양상이 엿보인다. 김금희의 세계는 한 쪽에는 불안, 한 쪽에는 불균형에 덧대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세계에 독자로서의 내가 위태로움이나 위협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문장과 그녀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불러 일으키는 어떠한 기묘한 잔존, 기이한 안정감이 스며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 끝에 올려진 농구공, 그 농구공의 편안한 회전.  


 신비에 가까운 감흥이다. 


"김금희의 시대가 올까. 

적어도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것은 그의 다음 소설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신형철 선생님의 말이 어쩌면 예언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김금희의 시대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