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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평점 :
목차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고기」
「개를 기다리는 일」
「우리가 어느 별에서」
「보통의 시절」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이 소설집 속 김금희의 세계는 인물들을 둘러싼 불안의 정조와 그들 사이를 맺고 있는 불균형적인 시소게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보여지는 필용과 양희, 「조중균의 세계」의 나와 조중균, 「세실리아」의 정은과 세실리아, 「반월」의 나와 이모, 「고기」의 사모님과 마트 남자, 「개를 기다리는 일」의 그녀와 엄마, 「우리가 어느 별에서」의 그녀와 신발을 찾는 (수녀님 닮은) 여자, 「보통의 시절」의 나와 위의 형제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모과장과 순태.
이들 중 그 누구도 삶의 중심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는 인물들은 없다. 그들은 분명 지상과 연결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또한 재밌는 것은 A와 B가 이상한 시소게임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의 경우를 보자. "천원, 이천원을 쥐여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던 양희의 사랑고백에 필용은 모욕감을 느끼지만 반면 "뭔가 양희의 관심을 절실히 원하지만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확인하고 때론 표현하고 싶은 것, 양희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양희의 감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양희가 사랑의 감정이 소멸했음을 알렸을 때 필용은 당황한다. 그 스스로 경멸해왔던 양희의 수많은 '없음'들에게 사탕발림을 하고, "돌변해 물어뜯기"까지 한다. 양희는 그렇게 떠나고 필용은 양희를 되찾지 못한다. 모든 것은 필용의 감정이고 필용의 사랑이었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랑이었다. 물론 이 또한 양희의 감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시간이 지나 가정의 가장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지금은 직급상 좌천된 필용이 양희의 연극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를 보게 되는 것도, 그래서 양희의 앞에 나서고 싶고, 나서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모두 필용의 것이다. 필용만의 무게이다. 이토록 이 소설은 필용의 무게와 양희의 무게가 비등하지 않다. 감정적인 무게가 이토록 다르다. 불균형한 시소이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은 애초에 어떤 곳에 무게를 다하여 다른 곳에 무게를 더할 수 없는 추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조중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라.) 여기에서 화자인 나는 그런 조중균의 건너편에 배치된 추이지만 그들은 무게를 겨룰 수가 없다. 조중균의 무게가 '나'와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시와 같은 곳에 자리한다. 그가 썼으나 그가 쓰지 않았다는 시. 누구나 쓴 시이며 누구도 쓰지 않은 시의 자리, 그것이 조중균의 자리이다. 그러한 까닭에 조중균의 무게추와 '나'의 무게추는 아무리 만나도 무게를 겨룰 수 없고, 결국 조중균의 세계가 퇴출됨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세실리아」속 정은과 세실리아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과거의 기억과 친구들의 발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실리아를 정은이 만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것은 사소한 자유 연상의 결과에 불과하였으며 '애국하려고'라는 이유처럼 갖다 붙이기 나름인 것, 별 거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가장 합리적인 이유라면 세실리아와 사겼다던 치운의 이혼이, 전남편인 관장의 청첩장이 정은으로 하여금 세실리아를 떠올리게 했고 세실리아를 만나게 하는 동인이었을 거라는 추측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세실리아에게 정은은 좀 다른 의미였다. 의미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혼자 울곤 하던 정은을 세실리아는 기억했다. 세실리아는 막연히 기대했다. "한 번은 말을 걸 줄 알았지. 한 번은. 넌 울 줄 아는 애니까. 도서관에서 울곤 하는 걸 내가 봤으니까." 이 말 뒤로 치운에 대한 세실리아의 고백이 이어지고, 세실리아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하며 정은의 안에서 빠져나간다.
어쩌면 대학시절의 세실리아는 정은이 알지 못하는 사이 정은을 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어긋났고, 세실리아는 여전히 "이미 버려진 것들을 별처럼" 주우며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싶지만 가장 저점의 온도에서 그러지 못하고 홀로 동결"했으며 여전히 동결할 예정이고, 나는 이제와 "별안간 모든 게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걷다가, 소리치며 걷다가, 노래를 하며" 걷다가 세실리아의 번호를 지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소로 치면 A는 앉았는 데 B는 앉지 않고, A는 일어났는데 B는 앉으려 한, 그래서 한 쪽이 빈 채 시소 게임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등을 돌린 채 스스로의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앞선 단편 세 편만 살펴보았지만 뒤로 이어지는 단편들도 비슷한 양상이 엿보인다. 김금희의 세계는 한 쪽에는 불안, 한 쪽에는 불균형에 덧대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세계에 독자로서의 내가 위태로움이나 위협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문장과 그녀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불러 일으키는 어떠한 기묘한 잔존, 기이한 안정감이 스며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 끝에 올려진 농구공, 그 농구공의 편안한 회전.
신비에 가까운 감흥이다.
"김금희의 시대가 올까.
적어도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것은 그의 다음 소설이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신형철 선생님의 말이 어쩌면 예언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김금희의 시대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