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감옥
찰스 스트로스 지음, 김창규 옮김 / 아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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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감옥’ 속 세계관은 아주 놀랍다. 현재에서 발전한 문명 수준이 아니라 뭔가 다른 차원의 발달된 문명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27세기 인류는 기억의 백업 프로그램으로 여러 생을 살아가며 영원히 살 수 있다. 주인공인 ‘로빈’ 역시도 한 때는 역사학자였고, 탱크였으며, ‘큐리어스 옐로우’라는 네트워크 웜과 싸운 전투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유리감옥’에 갇힌 이후의 로빈은 정규인간 여성의 형태를 갖춘 ‘리브’가 되기까지 한다. 즉 기억의 백업으로 인해 한 육체가 죽어도 다른 육체로 전승되어 새로운 생을 살 수 있으며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도, 살려두기도 할 수 있다.


 27세기의 인류는 기억을 백업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탱크와 같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남녀의 성을 바꿀 수도 있으며 팔이 네 개가 달린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머리 하나에 팔 둘, 다리 둘, 생식기로 이루어진 정규 인간만을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인간이 아닌 정신, 그리고 존재 자체로 보인다. 즉 그들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사물, 아이스 구울, 그 어떠한 육체적 형체도 아니고, 남성이나 여성과 같은 생물학적 성별도 아니다. 그저 과거를 살았고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나’라는 자아 뿐이다. 내가 인간이었어도 탱크였어도, 남자였어도, 팔이 네 개가 되어도 ‘나’일 수 있는 자아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인물들에서 엿보여지는 젠더적인 성향은 소설 전체를 이루는 가장 큰 줄기가 된다. 주의해야 할 점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성별을 특정하게 대하는 사회적 함의가 아니며, 소설 속 인물들이 사회가 은연중 강제하고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갖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 육체적인 성적 욕망은 있어도 명시된 생물학적인 성별도, 사회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성별도 없다. 성별이 나뉘는 것 자체가 존재치 않는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강제가 이루어지는 곳은 주인공과 다른 인물들이 갇히게 되는 ‘유리감옥’에서일 뿐이다. 유리감옥에서는 sex와 gender를 일치하게 보고 그에 따른 특정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27세기 인류가 사는 사회의 과학기술적인 측면은 분명 현재의 우리와 그 끝이 안보일 정도로 동떨어진 형태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확실하지만 암흑시대를 재현하고자 실사 실험을 한다는 ‘유리감옥’ 속 세계는 21세기 지구 인류의 그것이다. 소설을 읽게 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남자는 직업 세계에서 분투하고 여자는 가정을 꾸리며 사교와 양육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회, 매 주마다 충실히 교회에 나가야 하고 남성에게는 남성으로서, 여성에게는 여성으로서 입어야하는 의복이나 교양까지 지정되어 있던 사회는 1900년대 중후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이 몸은 암흑시대의 남녀이지만 속은 27세기의 인류라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그들도 그들에 따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나 개인의 성향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암흑시대에 충실히 젖어든 이도 있고 우리의 주인공처럼 거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이도 있고 ‘유리감옥’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들의 지배적 욕망을 펼치려는 인물도 있다. 그런 부분들도  눈여겨 볼만 하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복합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하나의 원형, 그 휘하로 존재하는 다수의 복합체, 그리고 복합체 융합. ‘나’이지만 수천가지이며 수천가지지만 하나의 ‘나’. ‘복합체’의 사용은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에서 처음 보았었는데 찰스 스트로스도 유사한 사용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SF 분야의 소설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러한 ‘복합체’ 요소가 닳고 닳은 클리셰인지 근래 등장하기 시작한 요소인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앤 레키의 소설을 워낙 즐겁게 읽었던 터라 마찬가지로 즐겁게 여겨졌다.


 인물적 측면에서 로빈(리브)을 비롯해 소설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은 2016년의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non-sexual적 젠더 성향과 고정되지 않은 육체 구조, 기억 백업 시스템을 통한 전승, 다수 개체로 이루어진 복합체 시스템을 그들 인류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유리감옥’의 구성 요인들을 통해 21세기의 기관과 관습의 부조리, 아직도 변하지 않은 사회구조적 패악에 대하여 좀 더 깊숙이 숙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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