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먹먹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책의 첫 장을 펼 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대했던 건 늙은 세탁소 주인과 아들을 대신해 자리한 로봇의 유쾌발랄한 소동 정도였었다. 다루고 있는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읽었던 책이 『위저드 베이커리』 하나 뿐이었던 나로서는 아마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구병모 작가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서 그녀가 『위저드 베이커리』 이후로 어떤 문학적 궤적을 그려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스푼의 시간』을 읽고 나니 충분히 알겠다. 이야기를 구축해내는 그녀만의 힘, 단단한 문장을 타고 흐르는 서정과 공감, 그로 인한 빛줄기는 은근하지만 꾸준하게 타올랐고 타오를 것임을 말이다.


 로봇이 등장한 영화는 많이 알고 있었다. 'A.I.'라던가 '엑스 마키나', '로보캅', '퍼시픽 림' 같은 정도. 그와 같은 이야기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인공지능 로봇들이 등장했고, 훨씬 더 액션이라던가 가족성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컸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소설을 펼치기 전엔 난 'A.I.'와 같지 않을까 했다. 아들의 죽음은 미상이고 심해 어딘가에 잠들었을 아들이 보낸 로봇이라는 점에서 그런 연상을 했던 것 같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늙은 세탁소 주인 명정은 로봇에게 죽은 아내가 둘째를 낳으면 지어주기로 했던 이름 '은결'을 준다. 명정과 은결은 아버지와 손자처럼 지내지만 여기서 중심을 갖게 되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결은 로봇, 기계의 속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결은 'A.I.'의 데이비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 데이비드는 인간 가족, 인간 엄마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그러나 은결은 수많은 데이터를 이합집산하여 이루어진 기계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간직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은결'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명정의 로봇이 된 이후 명정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의 시간. 명정의 세탁소 일을 돕고, 그러면서 만나온 시호와 준교, 세주가 성인이 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거나 아이의 엄마가 되기 까지의 모든 과정들을 은결은 지켜본다. 그들의 삶이 찬란한 희망으로 빛나고 혹은 굴곡을 맞이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화내는 순간순간들을 은결은 본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흡수한다.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될 때 마음으로 느끼고 정신으로 이해한다면 은결은 0,1의 배열로 해독한다. 그리고 그런 은결의 곁에 명정이 있었다. 로봇의 로봇됨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기계로만 대하지 않았던 주인 명정의 섬세한 배려가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내내 짙게 내려앉은 물안개에 감싸인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피부에 내려앉는 물기, 서늘하지만 축축한, 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스며 있는 것 같은 공기였다. 은결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랬다. 0,1로 이루어진 세계의 배열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감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 아이가 발장구를 치며 이불을 빨 때 다정하다, 따뜻하다, 하는 감정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은결만의 세계 역시 그랬다. 


 은결은 결코 감정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명정이 묻어났다. 후미진 동네의 작은 세탁소, 자신이 떠나는 순간까지 소년의 거취를 걱정했던 노인. 주인이 죽고 나서야 세제 한 스푼의 시간으로 명령을 거부한 소년. 떠나야 하는 이와 남아 있는, 아니 철저히 남겨질 이. 


 이 책이 많이 읽히면 좋겠다. 흐린 하늘, 습윤한 공기. 어디서부터 흘러왔을지 모를 감정의 물기. 한 스푼의 시간을 닮은 오늘의 날씨.


 - 영화화 됐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