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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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서평을 자주 쓰진 않았지만, 한 달에 두 세 권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개중에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감겨진 눈 아래에>를 읽게 된 건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해당 소설집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부터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가부장제'라는 세계의 속박 속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여성 서사 작품집이다. 7명의 작가들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 편 한 편 읽어내려가는 게 즐거웠다. 7가지 다 맛있는 초콜릿인데 어떤 건 아몬드가 들었고 어떤 건 딸기 시럽이 들었고 어떤 건 녹차크림이 들어 있는 것처럼. 7명의 작가들의 7 작품은 하나 하나 품고 있는 이야기가 달랐고 그 이야기가 주는 마음의 울림이 달랐다.



· 정도경 「황금 비파」

정도경 작가의 「황금 비파」는 마치 전래 설화를 읽는 것 같은 매력이 있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쓰여진 점과 궂은 날씨를 여자를 잘못 태워 그렇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뱃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예전에 음악을 하는 사람을 딴따라 라고 부르며 비천히 여겼던 점이나 뱃사람들이 흔히 갖는 -바다를 여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배에 탄 여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미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 했으며, '호수의 왕' 관련한 부분에서 신부가 될 위기에 처한 여자가 비파의 줄을 풀어가며 피를 머금은 황금 비파를 켜게 되는 서사는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바탕인가도 했다. 


아무래도 가장 좋았던 점은 여자가 '호수의 왕'을 죽이고, 배에서 자기를 죽이려 했고 뭍에서 여자를 범하려 했던 뱃사공을 죽인 점이 마음에 들었고, '물 밖의 세상에서 버려진 여자들'과 함께 공생하며, 물 밖의 세상에서 버려질지도 모르는 여자들을 지켜나가는 결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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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작가는 아무리 봐도 SF존잘님인 정보라 작가님인데 왜 정도경인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 하나. 



· 김인정 「망선요」

「망선요」는 중년의 엄마와 이십대 딸의 대화를 기본 틀로 쓰여졌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엄마와 딸의 대화는 통하는 듯 통하지 않는 듯 계속해서 겉돌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딸이 공부방 자원 봉사를 통해 만난 '초희'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초희에게 자신을 덧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과거 딸에게 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도 기억하지 않는 척 하려고 노력한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나지 않는 척 하는 엄마의 말은 거짓이라는 암시가 드러나지만, 소설을 읽는 우리는 알고 있다. 망선요 속의 딸의 경험이, 그때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는 엄마의 모습이 사실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어나기도 하는 일이라는 걸. 


이렇게 소설은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절대 이를 드라마틱한 용도 혹은 재미를 더하기 위한 요소 등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반영적인 느낌조차 든다. 


 

· 이산화 「아마존 몰리」

「아마존 몰리」는 길을 가던 여성을 폭행한 생명공학자와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한 과학잡지 기자의 인터뷰를 그린다. 생명공학자가 겪은 경험은 물론 독특하며 흥미롭다.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사실은 자신을 통해 실험을 해왔다는 사실은 생명공학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여자가 생명공학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던 '단성 생식'에 대한 것은 단성 생식으로 새끼를 낳은 아나콘다도 있고 작년에 배태한 쥐의 사례도 있고 가능성이 있는 미래이기도 하다. 


생명공학자의 캐릭터는 요 근래 많이 잃어나는 범죄자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정 인물, 혹은 단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면서 해당 인물 혹은 단체에게는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던 만만한 사람에게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 또는 썸을 탄 여자가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라는 사실 때문에 기실 입은 경제적이나 육체적 피해를 입은 것은 1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연민하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합리화하는 태도 같은 것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과학기자가 생명공학자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인터뷰어로써 인터뷰이와의 거리를 확실히 유지하면서 듣고 싶은 대답을 받아 낸다. 또한 정말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었는데, 자신을 떠난 여자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혹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그 이유라도 명쾌하게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명공학자의 말 그 다음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선충에게 실험에 대해 설명해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소설 전체를 아울렀을 때 큰 의미를 갖지 않을지도 몰라도 개인적으로 치이는 문장이었다. 



· 양원영 「폐선로의 명숙 씨」

소설은 가부장적이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경상도 남자처럼 무뚝뚝하고, 거칠고, 가부장적이며 체면을 중요시하고 이기적이던 사람이다. 가족들로 하여금 가난을 걱정하게 하지 않았고 딸과 엄마의 안전을 생각했고 가족 간의 화목을 중시하며 가족 행사를 챙기는, 우리 모두가 아는 아버지의 상이다. 강이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자 남은 엄마 곁에 내려와 지내기로 한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 이후로 기찻길에서 뱀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또 다른 사람이 되는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는 것처럼 딸인 강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소와 다르게 서울말을 쓰기도 한다. 엄마의 이런 반응은 신문에 난 '해운대~송정 구간 동해 남부선 폐선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엄마의 요청에 따라 함께 가게 된 폐선로에서 강이는 엄마와 아빠의 만남 속에 실린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은 강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서울 말씨를 쓰는 엄마와, 아니 명숙 씨와 관련이 있을 터이다. 엄마는 날개옷 대신 기억을 뺏겼다. 선녀는 아이를 낳고 날개옷을 되찾아 천상으로 돌아가지만 명숙 씨는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고 평생을 명숙이되 명숙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명숙 씨와 강이의 캐릭터는 굉장히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망각이 아닌 기억의 단절로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긴 명숙 씨. 그리고 이미 모든 비밀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버림 받지 않기 위해 빛바랜 엄마의 흔적들을 변기에 흘려보내는 딸 강이. 생을 저당 잡힌줄도 모르고 빼앗긴 엄마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죄책감을 그대로 이어받는 딸의 이야기는 괜스레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 유월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

「사형 집행인 비르 길리아의 하루」는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갖고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코헨체른 백작부인과 대를 이어 사형 집행인 일을 이어가는 비르길리아의 모습을 통해 소설 속 사회는 계급제에 기반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사형집행인이 된 비르길리아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죽여 사형 선고를 받은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다. 코헨체른 백작부인은 그녀와 그녀의 두 딸을 학대한 남편을 살해했고 그 결과 비르길리아에 의해 사형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 


코헨체른 백작 부인의 처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아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올해 국감자료에 의하면 가정폭력 피해자의 75%가 여성이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여자교도소에서 살인죄로 복역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정 폭력 피해자이다. 가정 폭력을 수십 년간 견디다 못해 살기 위해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처벌의 수위 역시도 동일 범죄의 경우 남성의 처벌이 여성의 처벌보다 가벼이 책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알고 있다. 남편을 토막살해한 여성 범죄자의 신상과 얼굴은 밝혀져도 대부도 토막살해범의 신상과 얼굴은 잘 모르는 경우와 매한가지다.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 이야기한 재판의 과정도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죄인인 코헨체른 백작 부인을 제외한 재판관들, 참관인, 사제들 모두 아내를 둔 남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기에 못난 부인을 그들이 느끼기에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니다. 즉 당사자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판결이었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살인을 목격하지조차 않은 코헨체른 백작의 동생의 증언이다. 굉장히 부조리한 일이다.


비르길리아는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이 되었지만 드문 '여성' 망나니이기 때문에 사회의 야유를 받는 인물이다. 또한 "공포로 심판을 대리하고, 자비로 신성을 대리하"는 사형 집행인으로서의 직업 윤리를 지키고자 노력하는데, 이는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 겪는 부조리를 목도한 이후 대리하게 된 심판이 정녕 신성하고 정당한 심판이 맞는 지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된다. 아마도 우리의 비르길리아는 그렇게 계속해 심판을 의심하는 심판의 대행자가 될 것이다. 



· 김이삭 「애귀」

이 소설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문전성시를 이룬 평양냉면집에서 출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애귀'로 추정되는 존재의 시선이며, 소설의 주인공은 평양에는 가 본 적 없고, 평양냉면의 맛도 몰랐던 탈북 여성이다. 여성은 서울 마포에서 처음 평양 냉면을 먹어보았다. 여성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비치는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탈북 이전의 삶들을 떠올린다. 


「애귀」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실제 탈북 여성을 만난 것 같은 현존감 때문이었다. 탈북을 위해 정말로 두만강 강물을 건널 것 같았고, 소설 속 여성이 겪었을 그런 아픔들을 겪을 것만 같았다. 탈북민이 한국으로 귀화해 새터민이 되었을 때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도 생각이 났다. 개중에는 여성이기에 겪었을 일들도 많았다. 갈 곳 없는 탈북 여성이기 때문에 물건처럼 애 낳는 기계로 팔려다닌다거나 귀화는 했지만 여자 등을 처먹는 쓰레기같은 남자에게 등골을 빨아 먹힌다거나 하는 것들. 


 '애귀'는 갈 곳 없는 귀신이고 귀신들 사이에서 설 곳을 잃은 '애귀'는 늘 사람과 함께 한다는데,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인 탈북 여성의 처지가 '애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갈 곳 없던 여자가 딸인 연주를 낳아 기르고, 아들인 강웨이를 한국으로 맞아들이는 결말이 굉장히 좋았다. 갈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머무를 곳을 스스로 만들어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전혜진 「감겨진 눈 아래에」

표제작이기도 한 「감겨진 눈 아래에」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읽는 내내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의 세계가 떠올랐고, 굉장히 불쾌했다. 


주인공은 부모 세대에 프랑스로 망명을 한 한국계 프랑스인인 세실 강이다. 세실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을 떠난다. 그녀는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과 국제 엠네스티 소속으로 방문을 한 것이라는 점을 방패로 한국으로 떠났지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입대라는 명목 하에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거기에는 그녀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세실이 끌려가게 되는 계기는 그녀가 한국계이며, 국적이야 어쨌든 한국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근미래의 한국은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공항에서 세실은 해외에서 건너온 보급품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군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군사 훈련을 수행하는 군부대가 아니다. 근미래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병역은 2년 안에 한국 국적의 아이를 임신해서 그 아이를 낳거나, 그게 아니면 복무 기간을 백퍼센트 채우는 것 뿐이다. 복무 기간을 채운다는 건 말 그대로다. 성적인 착취를 강제 당하는 것이다. 그것도 인적 자원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말이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준 역시도 우습다. 모든 여자는 20대 초반, 늦어도 24세까지 이따위 병역을 수행해야 하고 모든 남자는 이 의무를 30세 까지 연기할 수 있다. 이미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는 플라코스 시스템으로 인공 자궁을 통한 임신 출산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끝까지 여성의 몸을 아이를 낳는 자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은 등급화 되기도 한다. 1등급-3등급까지. 세실은 학벌이 좋지만 처녀가 아닌데다 과체중이라 3등급을 배정 받는다. 소설 속 한국은 여성을 외적 기준으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등급화 하는 사회이다. 


「감겨진 눈 아래에」속에 그려지는 근미래 한국은 사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여성은 왜 군 복무의 의무를 지지 않느냐며 열폭하는 남자들을 본다. 자기도 총각이 아닌 주제에 '처녀'에 대한 환상에 허우적 거리는 남자들을 본다.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본다. 여성을 그저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자들을 본다. 소설 속 근미래 한국에서 여성들이 받는 취급은 현재에서 몇 발자국 더 나간 것에 진배 없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부 부처에서 가임기 여성 인구 지도를 만들었던 일은 여성을 인구 생산의 보조물로 보는 것과 다름아니다. 여성은 제 몸으로 한 임신인데도, 제 피와 살과 시간을 들여 키워낸 아기인대도 주체가 되지 못한다. 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낳을 아이가 중요하고, 아이가 중요한 이유는 국가를 유지하는 세수를 위해서일 뿐이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산모에 대한 제도나 아이 양육에 도움이 되는 제도 같은 것들은 제대로 운영하지도 않고 어딜 가나 노키즈존, 어딜 가나 맘충을 찾는 사회 분위기를 깊숙이 느끼고 있다. 게다가 리얼돌 수입이 가능해지면서, 리얼돌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성의 인권은 성적인 의미로 밖에 보이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그런 얘기가 있었다. 폭력적인 게임을 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 그런 게임들을 규제해야 한다고. 그런데 왜 리얼돌은 그렇지 않을까. 여성의 몸을 본뜬 리얼돌 뿐만 아니라 아동을 떠올리게 하는 리얼돌까지 수입이 되는데, 왜 그에 대해서는 여성과 아이를 성적으로만 취급할지도 모르니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왜 리얼돌 수입에 관한 문제가 남성의 인권과 직결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성관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어떻게 인권의 문제가 되는지 정말 알 수 없다. 


내가 「감겨진 눈 아래에」를 읽으면서 너무나도 화가 났던 건 소설 속에 그려지는 근미래의 한국 사회가 앞서 말했던 이유들과 같이 현재의 한국 사회의 거울이나 다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읽는 내내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것과는 별개로, 「감겨진 눈 아래에」는 굉장히 잘 쓰여진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다가올지도 모르는 디스토피아 미래를 미리 엿본 것만 같다. 절대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절대 이렇게 살게 두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 같은 것도 선다. 정말이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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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정의 (특별판)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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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너무도 사랑하는 라드츠 제국 시리즈가 드디어 완결, 거기다 <사소한 정의> 특별판이 나왔군요. <사소한 정의>와 그 뒤를 있는 <사소한 칼>, <사소한 자비>에 대해 한마디만 할게요. 이 시리즈를 읽으실 모든 분들은 한권만 사지 마시고 세권 모두 사세요. 한 권만 샀다가는 현기증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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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 - DNA 이중나선에서부터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까지
김홍표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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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개봉한 『가타카』를 기억하려는지 모르겠다.(한국에서는 1998년 개봉했다.)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이며 에단 호크, 우마 서먼, 주드 로 등이 등장했던 미래 SF 영화이다. 제목인 가타카는 DNA를 구성하는 염기인 아데닌, 티민, 시토신, 구아닌을 이용하여 만든 말이다. 


 영화 배경은 유전자로 신분이 결정되는 미래세계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태어난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자연적 결합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을 하층민 취급을 하는 세계다. 주인공 빈센트 프리먼(에단 호크)은 자연적으로  태어난 '신()의 아이'다.


 우주항공사가 되고 싶지만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적격자로 분류되어 꿈을 접는다. 그러다가 최고의 우주항공회사 가타카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 자신의 정해진 운명에 반발, 신분을 위장한다. 


 1997년에 개봉했던 영화는 인공수정과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발달로 선천적 질병과 장애로부터 벗어난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현재 2017년 영화 속 상상으로만 여겨졌던 유전자 조작 기술은 특정 DNA를 자르고 편집하여 다시 이어붙이는 유전자가위에 까지 도달했다. 틀린 글자를 도려내고 고치는 것처럼, 수십억 개의염기 서열 중에서 목표 지점을 실수 없이 찾고 자르고 이어붙인다. 거기다 값이 싸기 까지 하다.




 지난 8일 출간된 『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은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모르고 있던 유전자가위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는 책이다. 그리고 문과계 한 길만 걸어온 내가 읽기에도 상당히 친절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나는 '유전자 가위'가 그저 유전자를 자르고 붙이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미세한 기계가 있어 유전자를 자르고 붙이는 거라고, 어떤 형태를 갖춘, 말 그대로 가위이지 않을까라고 여겼다. 기술적 발전과 기계적 발전을 동일시해 생각했다. 


 『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은 이런 오해에 대해 상당히 친절한 책이다. 크리스퍼, 엄밀히 말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세균의 면역체계를 본뜬 것이다. 면역체계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처음 맞닥뜨린 외부 유전자는 무조건 제거하려 드는 선천성 면역계와 한 번 경험한 외부 유전자를 인지하고 그에 걸맞는 제거 여부를 선택하는 것이 적응성 면역계이다. 적응성 면역계로는 백신 예방 접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세균은 침입한 유전자를 유전자 서열로 기억하고, 기억한 유전자가 다시 세균에 침입했을 때 빠르게 인식, '제한 효소'라는 단백질을 사용하여 이를 파괴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세균의 적응성 면역계, 즉 빠르게 인식하고 제한효소로 유전자를 자르는 것에 주목해 이를 응용한다면 원하는 유전자 서열을 교정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많은 연구 끝에 현재 유전자 서열과 제한효소가 붙은 형태로 세균의 면역계를 모방한 3세대 유전자가위 크리스퍼-카스9이 등장했다.


 유전자가위를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고 하는 까닭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있던 세균의 면역계 반응을 좀더 인간이 사용하기 쉽도록 만들어낸 것이 지나지 않는다.



 『김홍표의 크리스퍼 혁명』은 제0장에서 6장에 이르는 차례를 갖고 있다.


 「제0장. 미리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에서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사전 지식들(DNA, RNA, 제한효소나 유전자 빌딩블록 등과 같은)을 설명해준다.


 「제1장. 유전체 회문구조: '소주 만 병만 주소'의 생물학」에서는 각각의 종이 DNA를 어떻게 진화시켰는지를 흥미 진진하게 설명한다. 유전자는 불멸이라지만 결코 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갖은 사례를 들어 알려주며 유전자가위 기술의 핵심이기도 한 유전체 회문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제2장. 자르고 이어 붙이기」는 본격적으로 유전자가위가 등장한다. 크리스퍼가 언제,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발견의 역사를 보여주고 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준다.  


 「제3장. 크리스퍼 연대기」는 크리스퍼의 등장과정을 순차적으로, 사건별로 상세히 정리한다. 1세대부터 현재 개발된 3.5세대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며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제니퍼 다우드나, 장펑, 김진수 박사를 소개하면서 이 기술의 현재를 기록한다.


 「제4장. 크리스퍼가 뭐길래」는 이미 중국에서 시작된 유전자 조작을 통한 모기의 박멸, 바이러스에 강한 바나나 품종 개발, 뱀의 다리를 다시 되찾아주려는 시도 등,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응용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제5장. 생명체를 향하여」에서는 유전자가위로 생명체의 생식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 유전자가 대물림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해본다.


 「제6장. 크리스퍼는 야누스인가?」를 통해서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의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짚어가며 어떻게 과학을 발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우리는 이미 유전자가위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마트에서 사서 맛있게 먹고 있는 바나나는 사실 유전자 조작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식탁에 오르지 못했을 음식이다. 영화 「옥자」에서처럼 유전자 조작을 거친 슈퍼돼지도 이미 존재하고, 이미 많은 나라에서 인간 배아 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사용을 허가했다. 에이즈, 유전질환, 암, 난치성 질환 등의 치료를 위한 유전자가위 사용도 이미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굉장히 혁명적인 기술이다. 사람들을 질병에서 해방시킬 것이고, 노화를 극복시킬 수도 있다. 식량문제를 해결해줄 훌륭한 방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타카의 세계와 같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으리라는 장담도 없다. 자본을 가진 사람들, 혹은 사회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독점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계급화가 이뤄질지도 모른다. 크리스퍼의 미래는 유토피아적인 결말에게도 디스토피아적인 결말에게도 모두 열려있다.


 하지만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즉 발전된 과학에게는 그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꼭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다만 기술일 뿐, 중요한 것은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의 6장에서 고민하였듯이 우리는 앞으로도 발전할 유전공학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발전된 기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법제적 방안들에 대해 생각하고 대응하는 제도를 간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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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플란넬 속옷
레오노라 캐링턴 외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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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 SF 선집 『혁명하는 여자들』한국어판에 미공개 되었던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다섯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는 '갇힘'에 관한 이야기로 다양한 형태의 갇힘을 제각각의 인물과 공간들로 그려내고 있다. 



  •   킷리드 「상어 섬의 어머니들」

 

 상어섬에 위치한 감옥 '만약의 성'에 갇혀 탈출을 꿈꾸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폐렴과 달리 불치병인 모성'을 앓고 있고 가정 내의 노동생명이 끝난 여인들이다. 정성을 다해 자녀를 기르고 남편을 케어했음에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치 않게 장성한 자녀들에 의해 가두어진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상어섬은 무기징역수를 위한 곳이다. 모성도 기한이 없다. _ p.27  

 모성이란 어떤 직무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모성은 종신형이다. _ p.33


 이 단편을 읽으며 존재로서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했다. 자식으로서, 딸로서의 '나'가 혹시 어머니의 모성을 인질로 그녀의 삶을 억압했던 것이 아닌가. 그녀의 희생을 너무나도 당연하게만 누렸던 건 아닌가. 



  •  L. 티멜 듀챔프 「마거릿 A.의 금지된 말」

 

 정부에 의해 사회로부터 오롯하게 격리된 여인 마거릿 A.를 만난 인터뷰이인 '나'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직접적인 만남을 갖고, 만남 이후의 이야기를 정리요약한 보고서 형식의 소설이다.  


 정부로 인해 불온한 존재라는 취급을 받은 마거릿 A.는 정부에 의해 가족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직장에서도 떼내어져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에 감금된 채 홀로 생을 살아간다. 정부는 그녀의 말을, 그녀의 존재를 사회 체제를 붕괴시킬 만큼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녀를 격리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의 말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힘을 가진, 무장한 국가 권력이 자그마한 중년 여인, 흑인, 또한 개인에 불과한 마거릿 A.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정작 마거릿 A.의 생각과 언어는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정부에 의해 이미 지워지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거릿 A.를 둘러싼 국가의 검열적 태도는 지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언론과 SNS 조작을 떠올리게 한다.  




  • 레오노라 캐링턴 「내 플란넬 속옷」

 

 이 소설은 굉장히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짧은 단편이다. 주인공인 '나'는 일단 인간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은 우주 털실을 통해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엮어 존재했으나 어느 순간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으나 그 사실을 모르는 주변에 의해 성인(聖人)이 되기를 강요 받는다. '나'는 주변에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름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제목에 등장하는 '플란넬 속옷'은 소설 초반에 언급되는 주인공의 의상이다.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여성도 아니지만 아름다움을 요구받는 존재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존재에 대한 배제가 현실 사회에서의 일처럼 엿보인다.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따르지 않은 대신 스스로 갇힘으로써 사회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추구한 주인공이 인상적이다. 


 여기 내가 앉아 있다. _ p.89




  • 네일로 홉킨슨「유리병 마술


 17세기 말 동화작가였던 사를르 페로의 <푸른 수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베아트리스는 백인과 같은 피부를 가진 흑인이며 아름답고 총명했다. 여러 남자와 연애를 즐겼지만 종래에는 안정된 구애를 해온 사무엘(흑인)과 결혼한다. 소설은 부부생활을 하는 베아트리스와 사무엘, 처녀 시절의 베아트리스와 사무엘의 구애 과정을 교차하며 담고 있다. 굉장히 긴장감이 넘치는 소설이다. 


 사무엘의 유리병은 <푸른 수염>에서 열쇠를 연상시킨다. 푸른 수염이 이 열쇠의 문만은 절대로 열지마, 라고 했던 것처럼 누가 죽으면 영혼이 담길 푸른 병을 나무에 걸어야 한다는 사무엘의 미신과 그렇기에 유리병을 손대서는 안된다는 경고는 푸른 수염의 경고와 흡사하다. 


 이 단편에서 흥미로웠던 건 사무엘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백인에 대한 동경과 흑인으로서의 낮은 자존감이 큰 폭으로 상반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스스로를 야수라고 생각할만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으며 백인과 어울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백인과 같은 피부를 가진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게 모르게 그녀의 피부색을 관리한다. 베아트리스는 임신을 한 상태로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떠올리며 사무엘과 아이와 함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유리병을 깬 베아트리스는 사무엘이 열지 말라고 했던, 그의 첫번째 아내와 두번째 아내가 죽어나갔다던 방의 문을 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들의 시신을 발견함으로써, 또한 자궁이 적출된 그녀들의 시신에 의해서 사무엘이 자신의 피를 이은 흑인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사무엘이 그녀들을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깨어진 유리병에서 아내들의 유령이 풀려나고 베아트리스는 생각한다. 유령들이 사무엘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은 베아트리스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아내들의 유령이 베아트리스를 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의 연대를 바란다.            




  • 로즈 렘버그 「'나 레'의 일곱 가지 상실」


 굉장히 시적인 단편이다. 인물의 이름에 관한 언어적 환유가 상당하다. 러시아 소설을 보면 주인공의 이름이 굉장히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라 그런가 그런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들이 쓰여진다. 또한 인물들이 겪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그로 인해 바뀌어나가는 이름들, 언어들에 대한 사유가 상당하다. 


 모든것이 녹는다. 어머니의 지하 깊숙한 건축물 마저도. 

 기억되지 않은 것만이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_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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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도시
차이나 미에빌 지음, 김창규 옮김 / 아작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소설은 현실의 한국과 북한처럼 한 나라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분리되어 제각기의 나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울코마와 베셀, 그리고 틈새에 자리한 '침범국'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울코마와 베셀의 공간 분리가 분명히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해가 잘 가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는 아마 독자인 내가 남한의, 그리고 남한의 지역 중에서도 남쪽 지역에 살았던 사적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외국에서는 분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국경이 바뀌기도 한다지 않은가.  


 남한 지역 중 전방에 속하는 지역들은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울코마와 베셀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베셀이, 혹은 울코마가 보인다. 그곳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곳의 건물이, 풍경이 보인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갈리기도 한다. 울코마와 베셀은 불분명한 분리 상태에 대응하여 그들 간의 법을 만들었는데 가장 중요히 여겨지는 것은 서로 간의 '침범' 행위를 불허한다는 것이다. 울코마인은 베셀의 사람과 풍경을 보지 않으며 베셀의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보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느껴서도 안된다. 이러한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런 법을 지킨다.  


 울코마와 베셀의 분리를 더욱더 공고히 하는 존재는 '침범국'이다. 어디에 존재하는 지 알 수 없고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양국 사이에 '침범' 행위가 일어났을 때 외부 권력이자 초월적 권력으로 모든 사태를 해결하고 책임을 무는 '침범국'. 침범국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 어디에도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형체 없는 유령이지만 그 힘만큼은 강대하며 울코마와 베셀의 양국 사람들은 침범국을 두려워하면서 복종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티아도어 볼루는 베셀의 형사로 순경인 코위와 함께 베셀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플라나' 사건을 조사한다. 시체의 신원을 알게 된 뒤 사건의 배경을 파헤치던 볼루는 이 사건이 단순한 살해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체는 베셀에서 발견되었으나 사건은 울코마와 관련이 있다. '침범'과 관련한 사건이지만 침범 행위를 증명할 수 없다. 볼루는 베셀의 형사로서 울코마로 넘어가 사건 자문이 되었다가, 종래에는 이름만으로도 공포를 갖는 침범국에 발을 걸치게 된다. 


 죽은 플라나, 아니 바이엘라 마르, 아니 사실은 마할리아 기어리가 연구했던 전설의 '오르시니'는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대한 축으로 작용한다. 점차 진실에 다가서는 볼루의 뒤를 따라 현실의 베셀과 울코마, 전설의 오르시니와 그림자와 같은 침범국의 대립각이 첨예하게 그려진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결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작가인 차이나 미에빌이 그려낸 이 거대한 세계관은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 그리고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은 '존재감'이다.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것. 물리적 형태를 띄고 있지 않으나 엄연한 힘을 발현하는 것.


 『이중도시』는 <LA. 타임스>로부터 "필립 K. 딕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프란츠 카프카가 길렀다고 생각해보라. 차이나 미에빌의 소설 <이중도시>가 바로 그 아이와 닮았을 것이다."라는 평을 들은 소설이다. 


 독자로서 이 작품을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소설은 보통 작품에 따라 인물, 사건, 세계관 중 하나가 더 크기 마련이다.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사건 자체가 흥미로워서, 세계관이 특별해서 읽게 된다. 『이중도시』는 인물, 사건, 세계관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소설이다. 여유를 가지고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잘 짜여진 세계관이 주는 안정감과 등장인물들이 어우러지며 선보이는 하모니, 주인공을 따라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는 사건이 주는 속도감에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 일단 얼마만에 서평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11월, 생활의 전반적인 것들이 바뀌었다. 직장에 들어가게 됐고 이래저래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 한 권 읽는 일도 여의치 않다. 『이중도시』의 서평은 그런 와중에서 조금씩 조금씩 읽어 마친 책에 대한 감상이다.


-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아작 출판사의 책을 좋아해 그곳에서 나온 책은 거진 다 구매한 것 같다. 대체로 차례대로 구매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을 놓치면 사지 않게 된다. 내가 알기로 아작의 책은 여태까지 20권의 책이 나왔고 나름 표지 기준으로 열 권씩 묶어 시즌1과 시즌2로 구분하는데 나는 (2016년 12월 19일 기준) 시즌1 조 월튼의『타인들 속에서』를 빼고 전부 구매했다. 


-『이중도시』는 구매의 순간을 놓쳐 출간된지 1년이 넘게 지나 구매하게 된 책이다. 구매하고도 아직 읽지 못한 책으로는 제임스 S.A. 코리『익스팬스』, 할 클레멘트 『중력의 임무』, 아작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한국 SF 소설의 첫 권인 김창규의 『우리가 추방된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조 월튼의 『타인들 속에서』를 포함해 네 작품을 빼고는 전부 읽었다는 이야기다. 

#이만하면_아작_마니아  


- 첨언하자면 개인적으로 '오르시니'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이합기에 대한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이합기와 오르시니, 고고학과 연구자들의 이야기가 스핀오프로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면 볼루와 침범국의 다음 이야기가 나와 준다거나 울코마의 다트와 베셀의 코위가 또다른 사건을 맞닥뜨려 벌이게 되는 이야기가 나와줘도 좋을 것 같다. 세계관이 탄탄하니 좀 더 꺼내줬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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