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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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죽음을 날것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직업적인 의사나 소방관이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물성으로 만날 수 밖에 없는 직업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이 책은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경험했던, 혹은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경험들을 가공하여 적어낸 기록물이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에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어떤 점에 있어서는 팩션의 형질을 띈 가공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작가의 글은 아닌지라 여기저기 성긴 문장들이 많이 엿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잘 읽히게 쓰여진 글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그에 대한 저자의 감상들이 많이 엿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무겁기만 한 글은 아니다. 죽음은 생과 뗄 수 없으므로 어떤 이는 죽음을, 어떤 이는 생을 보장 받는다. 죽음도 생도 보장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저자는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준다. 의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생과 사는 환자 개인에 따라 다르게 찾아온다. 최선 그 이후의 순간은 의사의 손을 떠나서 움직이는 것이다.  


 책으로 묶인 38편의 글에는 저마다 다른 생과 사, 그리고 환자 개인마다 살아온 삶의 궤적들이 겹쳐든다.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하루에만 많게는 삼백명의 환자도 진찰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궤적을 한 자리에 앉아 맞이해야만 하는 삶, 직업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메스를 들이대야 하는 삶이다. 


 우리가 쉽게 바라본 의학 드라마에서는 의사인 주인공이 굵직한 에피소드를 가진 환자를 한 둘 정도 진료하고는 만다. 그래도 이야기는 이어지고 주인공의 삶은 살아진다. 그러나 실제 의사의 눈으로 본 의사의 삶은 난장 진 전쟁터와 같다. 전쟁터와 같은 응급실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고 버티게 하려고 필사적이다. 


 저자가 직접 만져야 했던 생사의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만나야 했던 몇 안되는 죽음들. 


 나를 스쳐지나간 죽음들은 직접적으로 나를 훑고 지나가진 못했다. 어렸거나 이제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나 갑작스러웠거나 거리가 있었다. 


 네 분의 조부모님 중 살아계신 분은 친할머니 한 분이 되었다. 그분들의 죽음은 아프시거나 나이가 드셨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히 맞이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같이 학교를 다녔던 아이 하나가 물놀이를 갔다가 유명을 달리했고, 고등학교 때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 하나가 고 3이 다 되어 학교에서 자살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그냥 실감이 나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는 의문만이 남았다. 며칠 전에도 복도에서 인사를 나누던 아이였으므로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극단적으로 몰고 갔을 까 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도 두 학번 위의 선배 하나가 자살을 했다. 두주 정도 수업엘 나오지 않아 의아했었는데 차를 운전해서 바다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같은 전공 선택 수업을 들었었는데 내게 음료수 캔을 건내며 수줍게 웃던 모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선배의 부모님은 먼저 간 딸이라고 장례식도 소리소문 없이 치렀다. 나는 선배의 얘길 같이 듣던 수업 시간에 들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미안하고 미안해서 내내 울었다. 


 대학원 휴학을 했을 때도 같이 수업을 들었었던 선배 하나가 자살을 했다고 했다. 학교에서였고 수업시간에서 였다고 했다. 함께 알던 지인들과 어안벙벙해진채 장례식엘 갔고 다녀와서 따로 모여 술을 마셨고 울었고 욕을 했다. 그랬던 것 같다. 속이 많이 울렁거렸다. 이야기를 많이 들어줄 걸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대체로 날 스쳐간 죽음들은 안타깝게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가 많아서 그런 일들을 맞이하게 될 때마다 마음을 다졌다. 나는 절대로 나의 생을, 나의 사람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지 말아야겠다. 나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 날까지 이루어 나가고 싶은 꿈들을 다 이룬 꿈들로 바꿀 수 있게 단단히 매듭 지은 삶을 살아야 겠다. 


 책의 『만약은 없다』는 제목 참 마음에 든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니, 살아야지. 살아내야지. 버텨내야지.


 내일이 올 것 같다. 내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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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뭐라고 - 거침없는 작가의 천방지축 아들 관찰기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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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면 판권면 바로 옆 페이지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이야기."


 그 뒤 차례를 넘기면 


 "슬픈 일도 기쁜 일도 / 남을 원망하는 일도 / 짓궂은 일도 / 실컷 해보기를."


 이라고 적혀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이 구절들이 사노 요코가 경험한 육아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다양한 일들을, 감정들을 겪어보길 바라는 마음, 엄마로서 육아의 경험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더라는 그런 마음. 


 육아라는 건 '육아'라는 두 글자처럼 쉽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그 사이엔 분명 불안함, 걱정, 자책의 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러한 마이너스 감정들을 이겨나가게 할만큼의 기쁨, 즐거움, 어여쁨 역시도 함께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아기는 아이가 되고, 아이는 소년(소녀)이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인이 된다. 그렇게 다 자란 자식은 부모가 되는 미래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게 된다는 것이며 더이상 부모가 부모로서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인) 원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이제 자식의 뒤에 서있어주는 일로 바뀐다. 그저 존재 해주는 일. 그것만으로 자식은 스스로의 뿌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 더 튼튼히 줄기를 기르고 더 높이 가지를 뻗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사노 요코가 아들인 히로세 겐을 관찰한 에세이인데 나는 오히려 남겨진 히로세 겐이 맴돌았다. 내가 아는 누구와 너무 닮아서, 닮아서 그랬던 것 같다. 히로세 겐은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이런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될 날이 올까.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엄마였다. 나의 엄마. 


 엄마는 3년 전 3월 엄마를 잃었고, 올해 5월 아빠를 잃었다. 

 

 나는 손녀로서 두 차례의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엄마는 딸로서 장례식에 참여했다. 엄마는 그렇게 쉰 중후반의 나이에 고아가 됐다. 엄마의 형제들은 서로서로의 손을 잡고 울고 웃으며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그렇게 고아가 됐다. 


 일이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반나절 밖에 있을 수 없었다. 무안에서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쉰 중후반이 되어 고아가 된 어떤 여자에 대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서로의 손과 손을 얽으며 말 없이 고개를 떨구던 여자와 그의 형제들을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울음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곧 서른이 되는 나는 엄마가 있고 아빠도 있어서 밖에 나가면 어른이 되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되곤 하는데, 우리 엄마는 더는 아이로 봐 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는 늘 어른도 아이도 산다. 나는 이러한 특성을 '어른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어른아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선천적 속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 앞에서는 아이가 되는 일. (혹은 그것이 생물학적 부모가 아닌 경우를 포함 해서)


 부모님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은 아이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순간이다.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좀 더 날 것으로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고아가 된 뒤의 엄마의 세상은 엄마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막내딸인 엄마에 대해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노 요코의 겐에 대한 기억 처럼. 그럼 엄마는 매일매일 한장한장 기억을 넘기며 지난 날을 추억하지 않았을까. 


 나는 엄마에 대해, 아빠에 대해 어떤 기억들을 남길 수 있을까. 엄마, 아빠의 마음 속에 장녀인 나는 어떤 딸로, 어떤 기억들로 남아 있을까. 


 가족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 흘러다닌다. 오늘 밤은 좀 더 이렇게 정해진 답 없는 물음들을 따라 떠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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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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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나 역시도 좋아했었던 애니메이션이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도 그랬다. 오스칼은 내게 프랑스 혁명을 가르쳤고 앤은 내게 긍정적인 태도를 알려주었다. 내 경우 워낙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들이라 이 책을 쓴 백영옥 작가처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에세이를 읽는 내내 추억과 만나는 기분이었다. 책장 사이사이 끼워져 있는 앤의 이야기들, 앤의 말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되돌려보낸 양 따뜻하고 다정했다.  


 부제로 붙어있는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 말들이 백영옥 작가의 경험들과 앤의 말과 버무려져 있다. 챕터가 많은 데 그렇게 길지도 않고,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말들은 하고자 하는 말들에 맞게 적재 적소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에세이는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타인의 말을 기준 삼아 내 인생을 꾸려나가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삶을 비추어 내 삶을 가꾸고 싶지 않아서 그러하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다.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말하고 나처럼 움직이고 싶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들이 마시는 숨에서 내뱉는 숨까지 그저 나로 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백영옥 작가의 이번 에세이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뭐랄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게 되었달까. 아무래도 내 나이도 적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가의 얘기를 들을 땐 "맞아 맞아 그렇다니까"했고 앤의 말을 들을 땐 "맞아 맞아 그랬지" 하고 있었다. 아마 이 에세이의 성격이 '~하지 말고 ~하세요'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저 친한 언니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말야, 살다 보니 이렇더라?" 하는 수다를 나누어 주는 느낌이다. 


 내게도 그와 비슷한 경험들이 많다. 앤을 좋아했고, 여자였고, 글을 쓰길 꿈꾸었고,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했어서 그런가보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동질감이라거나, 작가와 연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마 이런 삶을 산 "여성"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이 책, 무척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팔리기도 잘 팔릴 것 같다. 웃음)


 앤의 말에도, 백영옥 작가의 말에도 좋은 말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음으로써 그간 정리되지 못해 말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백영옥 작가처럼 앤에게만 집중했던 마음을 마릴라나 매튜에게 돌리게 될 지도 모른다.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 삶에 대한 독자의 주체적 태도를 자연스레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성공적이다. 에세이 잘 안 읽기로 소문난 (어디에?)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성공할 게 분명하다. (웃음) 


 이 책을 읽게 될 당신도 당신의 앤, 당신의 소년 소녀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건내게 될 것이다.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로 구슬을 꿰었던 스스로를 기억해 내게 될 테니까. 나도 이제 인사를 해야 겠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되길. 


 안녕. 나의 앤, 나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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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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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 이탈리아 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주도한 인종청소 하에 수용소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프리모 레비는 다행스럽게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책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 3 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 간의 체험을 담은 레비의 수기로 레비의 첫 책이기도 하다. 프리모 레비는 생애 총 14권의 소설, 시, 평론을 썼다.  


 당대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세세하게 서술하였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곳에서 변해가는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가지도,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인간으로 나고 자랐으나 나치들의 억압, 수용소라는 공간이 주는 현실과의 괴리 등으로 인간이 아니게 되는 인간들에 대하여 레비는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곳곳이 문학이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친구였던 사람들, 정규 교육 과정을 모두 이수하였으며 자신만의 지식,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훌륭했던 시민들은 강제로 게토로 이주해야 했고 그곳에서도 편히 살지 못한 채 수용소에 끌려와 갇히게 되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심지어 독일인까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나치의 생각을 반대한다는 것, 나치가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인이었다는 이유였다.


 홀로코스트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부록으로 실린 <독자들에게 답한다>의 2번째 질문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나? 연합군은 알고 있었나? 수백만 명의 집단 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나?"에 대한 레비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답은 짧지 않아 대답의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을 발췌해오고자 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의 독일인들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라 특징 지워진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자신의 편안함에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마음. 레비의 말마따나 "고의적인 태만함"이라는 특성말이다. 


 나는 세계 2차 대전의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후세대다. 이런 세대들에게 제 2차 세계 대전은 기록되어진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1939년-1945년, 겨우 6년에 불과했던 전쟁. 유럽에서는 독일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일으킨 전쟁. 국가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전쟁. 아직까지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독일에서는 여전히 홀로코스트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있고, 일본은 국가적 입장의 사과는 하지 않은 상태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 관련한 교육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세계사에 대한 교육이 크게 중요시 되고 있지 않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알고 있는 것은 부분부분에 불과하며 피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가 말한 "고의적인 태만함"이라는 인간의 특성은 아주 잘, 이해가 간다. 이는 은연 중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의적인 태만함과 악의 평범성의 존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독일의 나치가 우생학적 관점으로 합리화하고 이유 없는 증오로 유대인들을 절멸하고자 했던 것처럼 요즘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혐오'의 양상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의 문제(예를 들자면 가장 최근에는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총격 사건), 장애인들에 대한 문제(일본에서 일어난 장애인 시설에서의 살해사건), 힘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학대 문제(한국에서도 25세의 이모가 엄마를 잃은 3세 조카를 학대하다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폭력, 성폭력, 살해, 이슬람 권에서 흔하게 자행되는 여성 대상의 명예 살인 등의 문제(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해 한국에서만도 셀 수 없으며 파키스탄의 SNS 스타가 오빠에게 명예살인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수많은 문제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다. 나는 그것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자신보다 약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의 정서라고 본다. 이러한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다만 이들이 없다면 좀더 자신들이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이기심, 약자인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스스로의 우위를 거머쥐려는 권력욕과 쾌락, 그러한 사실들에서 귀를 막고 눈을 가림으로써 침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고의적인 태만함이 작용한다. 


 요즘 세계를 휩쓸고 있는 페미니즘의 열풍은 그러한 문제들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무장한 자들이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입으로 "그것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몰카 찍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차별하지 마세요" 하는 여성들에게, 혹은 약자들에게, 그들은 나는 직접 몰카 찍지 않았으니까, 나는 직접 때린 건 아니니까, 내가 누군갈 살해한 건 아니니까 하면서 스스로는 무죄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찬성하며 행동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는 요즘의 이런 양상들이 홀로코스트 속 유대인의 위치를 여성으로 치환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홀로코스트와 등치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적이며 젠더사이드 적인 측면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없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고의적인 태만, 그로 비롯한 무지로 인한 답변이다. 


 현 시대의 인간들은 대체로 노예 대접을 받거나 물리적인 억압을 겪거나 하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관습적으로 만들어낸 굴레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잊고 있는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공동체를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고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기로 시작한 그때를, 그를 위해 그렸던 법을, 그렇게 살고자 했던 세상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인간 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 버린 것 같다. 


 그것은 무척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슬픈 일이다. 인간 다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기억했으면,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인간 다운 인간들의 연대를 바란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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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계승자 별의 계승자 1
제임스 P. 호건 지음, 이동진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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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익숙한 건 보통 권선징악의 서사라거나 신데렐라 류의 성공기, 혹은 가난하고 힘들었던 주인공이 역경을 헤치고 성장하는 서사 같은 것들이다. 어떤 미스테리한 사건을 둘러 싼 주인공이 그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물리치고 자신의 적을 제압하거나 사건의 미스테리를 해결해 버리는 서사는 장르 소설에 있어 일반적인 포맷이기도 하다.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는 스토리 텔링의 힘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SF 소설의 일반적인 포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타의 소설과는 가장 다른 구현방식을 보여준다. 익숙한듯 낯선 서사는 친숙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 일으켜 소설을 펴는 첫 장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를 끌어당긴다. 


 소설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 달에서 5만년 전 생존했을 우주비행사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발견된 우주비행사에게 '찰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월인'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서로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이어나가며 그를 합치고 분리하며 찰리의 정체를 탐구한다. 그들의 헌신적인 연구로 월인의 수수께끼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해결에 이른다. 


 간단한 줄거리만 서술하고 나면 어떤 이들은 이 소설이 지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단언하건대 인내심을 가진채 읽기 시작한다면 외려 손을 뗄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과학소설"이라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SF 소설이구나 하는 감정을 느낄 것이다. 


 헌트, 단체커, 콜드웰,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부정하고 종합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련의 모든 연구 작업들이 이 소설에는 세세하게 드러난다. 외부로부터 제시된 '찰리(월인)'라는 사건이 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들은 무척이나 흥미로우며 그들의 의견을 따라 독자도 퍼즐 맞추듯 찰리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조각들을 채웠다 뺐다를 반복한다.


 '학회 SF'라는 장르적 분류는『별의 계승자』이전으론 존재하지 않았으며 과학소설의 주인은 과학이어야 한다는 단순한 목적의식은 그러한 과정들로 빛났다. 제임스 P. 호건은 비록 201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을 이렇게 남아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나는 이렇게 매혹당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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