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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ㅣ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나 역시도 좋아했었던 애니메이션이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도 그랬다. 오스칼은 내게 프랑스 혁명을 가르쳤고 앤은 내게 긍정적인 태도를 알려주었다. 내 경우 워낙 어린 시절에 봤던 만화들이라 이 책을 쓴 백영옥 작가처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에세이를 읽는 내내 추억과 만나는 기분이었다. 책장 사이사이 끼워져 있는 앤의 이야기들, 앤의 말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되돌려보낸 양 따뜻하고 다정했다.
부제로 붙어있는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 말들이 백영옥 작가의 경험들과 앤의 말과 버무려져 있다. 챕터가 많은 데 그렇게 길지도 않고,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말들은 하고자 하는 말들에 맞게 적재 적소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에세이는 잘 읽지 않는 편이다. 타인의 말을 기준 삼아 내 인생을 꾸려나가고 싶지 않아서, 타인의 삶을 비추어 내 삶을 가꾸고 싶지 않아서 그러하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다.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말하고 나처럼 움직이고 싶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들이 마시는 숨에서 내뱉는 숨까지 그저 나로 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백영옥 작가의 이번 에세이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뭐랄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게 되었달까. 아무래도 내 나이도 적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가의 얘기를 들을 땐 "맞아 맞아 그렇다니까"했고 앤의 말을 들을 땐 "맞아 맞아 그랬지" 하고 있었다. 아마 이 에세이의 성격이 '~하지 말고 ~하세요'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저 친한 언니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말야, 살다 보니 이렇더라?" 하는 수다를 나누어 주는 느낌이다.
내게도 그와 비슷한 경험들이 많다. 앤을 좋아했고, 여자였고, 글을 쓰길 꿈꾸었고, 친구를 만나고 연애를 했어서 그런가보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동질감이라거나, 작가와 연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마 이런 삶을 산 "여성"들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이 책, 무척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팔리기도 잘 팔릴 것 같다. 웃음)
앤의 말에도, 백영옥 작가의 말에도 좋은 말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음으로써 그간 정리되지 못해 말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떠올리며 백영옥 작가처럼 앤에게만 집중했던 마음을 마릴라나 매튜에게 돌리게 될 지도 모른다.
삶을 대하는 시선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 삶에 대한 독자의 주체적 태도를 자연스레 형성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성공적이다. 에세이 잘 안 읽기로 소문난 (어디에?)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성공할 게 분명하다. (웃음)
이 책을 읽게 될 당신도 당신의 앤, 당신의 소년 소녀에게 반가움의 인사를 건내게 될 것이다.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로 구슬을 꿰었던 스스로를 기억해 내게 될 테니까. 나도 이제 인사를 해야 겠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되길.
안녕. 나의 앤, 나의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