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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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 이탈리아 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주도한 인종청소 하에 수용소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프리모 레비는 다행스럽게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책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제 3 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 간의 체험을 담은 레비의 수기로 레비의 첫 책이기도 하다. 프리모 레비는 생애 총 14권의 소설, 시, 평론을 썼다.  


 당대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세세하게 서술하였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곳에서 변해가는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깊숙이 들어가지도,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인간으로 나고 자랐으나 나치들의 억압, 수용소라는 공간이 주는 현실과의 괴리 등으로 인간이 아니게 되는 인간들에 대하여 레비는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곳곳이 문학이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친구였던 사람들, 정규 교육 과정을 모두 이수하였으며 자신만의 지식,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훌륭했던 시민들은 강제로 게토로 이주해야 했고 그곳에서도 편히 살지 못한 채 수용소에 끌려와 갇히게 되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심지어 독일인까지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나치의 생각을 반대한다는 것, 나치가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인이었다는 이유였다.


 홀로코스트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부록으로 실린 <독자들에게 답한다>의 2번째 질문 "독일인들은 알고 있었나? 연합군은 알고 있었나? 수백만 명의 집단 학살이 어떻게 유럽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나?"에 대한 레비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답은 짧지 않아 대답의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을 발췌해오고자 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양상은 당시의 독일인들만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특성은 '인간'이라 특징 지워진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면, 자신의 편안함에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마음. 레비의 말마따나 "고의적인 태만함"이라는 특성말이다. 


 나는 세계 2차 대전의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후세대다. 이런 세대들에게 제 2차 세계 대전은 기록되어진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1939년-1945년, 겨우 6년에 불과했던 전쟁. 유럽에서는 독일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일으킨 전쟁. 국가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전쟁. 아직까지도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독일에서는 여전히 홀로코스트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있고, 일본은 국가적 입장의 사과는 하지 않은 상태다. 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 관련한 교육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세계사에 대한 교육이 크게 중요시 되고 있지 않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알고 있는 것은 부분부분에 불과하며 피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가 말한 "고의적인 태만함"이라는 인간의 특성은 아주 잘, 이해가 간다. 이는 은연 중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의적인 태만함과 악의 평범성의 존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근래 들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독일의 나치가 우생학적 관점으로 합리화하고 이유 없는 증오로 유대인들을 절멸하고자 했던 것처럼 요즘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혐오'의 양상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의 문제(예를 들자면 가장 최근에는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총격 사건), 장애인들에 대한 문제(일본에서 일어난 장애인 시설에서의 살해사건), 힘이 없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학대 문제(한국에서도 25세의 이모가 엄마를 잃은 3세 조카를 학대하다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과 폭력, 성폭력, 살해, 이슬람 권에서 흔하게 자행되는 여성 대상의 명예 살인 등의 문제(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해 한국에서만도 셀 수 없으며 파키스탄의 SNS 스타가 오빠에게 명예살인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수많은 문제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다. 나는 그것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자신보다 약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의 정서라고 본다. 이러한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다만 이들이 없다면 좀더 자신들이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이기심, 약자인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스스로의 우위를 거머쥐려는 권력욕과 쾌락, 그러한 사실들에서 귀를 막고 눈을 가림으로써 침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고의적인 태만함이 작용한다. 


 요즘 세계를 휩쓸고 있는 페미니즘의 열풍은 그러한 문제들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고의적인 태만함으로 무장한 자들이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입으로 "그것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몰카 찍지 마세요, 때리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차별하지 마세요" 하는 여성들에게, 혹은 약자들에게, 그들은 나는 직접 몰카 찍지 않았으니까, 나는 직접 때린 건 아니니까, 내가 누군갈 살해한 건 아니니까 하면서 스스로는 무죄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찬성하며 행동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나는 요즘의 이런 양상들이 홀로코스트 속 유대인의 위치를 여성으로 치환시킨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홀로코스트와 등치시킨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 적이며 젠더사이드 적인 측면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없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고의적인 태만, 그로 비롯한 무지로 인한 답변이다. 


 현 시대의 인간들은 대체로 노예 대접을 받거나 물리적인 억압을 겪거나 하고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관습적으로 만들어낸 굴레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잊고 있는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공동체를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고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기로 시작한 그때를, 그를 위해 그렸던 법을, 그렇게 살고자 했던 세상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인간 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 버린 것 같다. 


 그것은 무척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슬픈 일이다. 인간 다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기억했으면,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인간 다운 인간들의 연대를 바란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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