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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뭐라고 - 거침없는 작가의 천방지축 아들 관찰기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책을 펼치면 판권면 바로 옆 페이지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이야기."
그 뒤 차례를 넘기면
"슬픈 일도 기쁜 일도 / 남을 원망하는 일도 / 짓궂은 일도 / 실컷 해보기를."
이라고 적혀 있다. 책을 읽고 나니 이 구절들이 사노 요코가 경험한 육아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 다양한 일들을, 감정들을 겪어보길 바라는 마음, 엄마로서 육아의 경험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더라는 그런 마음.
육아라는 건 '육아'라는 두 글자처럼 쉽기만 한 일이 아니다. 그 사이엔 분명 불안함, 걱정, 자책의 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러한 마이너스 감정들을 이겨나가게 할만큼의 기쁨, 즐거움, 어여쁨 역시도 함께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아기는 아이가 되고, 아이는 소년(소녀)이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성인이 된다. 그렇게 다 자란 자식은 부모가 되는 미래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게 된다는 것이며 더이상 부모가 부모로서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인) 원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이제 자식의 뒤에 서있어주는 일로 바뀐다. 그저 존재 해주는 일. 그것만으로 자식은 스스로의 뿌리를 공고히 할 수 있다. 더 튼튼히 줄기를 기르고 더 높이 가지를 뻗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사노 요코가 아들인 히로세 겐을 관찰한 에세이인데 나는 오히려 남겨진 히로세 겐이 맴돌았다. 내가 아는 누구와 너무 닮아서, 닮아서 그랬던 것 같다. 히로세 겐은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이런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될 날이 올까. 아마 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엄마였다. 나의 엄마.
엄마는 3년 전 3월 엄마를 잃었고, 올해 5월 아빠를 잃었다.
나는 손녀로서 두 차례의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엄마는 딸로서 장례식에 참여했다. 엄마는 그렇게 쉰 중후반의 나이에 고아가 됐다. 엄마의 형제들은 서로서로의 손을 잡고 울고 웃으며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그렇게 고아가 됐다.
일이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반나절 밖에 있을 수 없었다. 무안에서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쉰 중후반이 되어 고아가 된 어떤 여자에 대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서로의 손과 손을 얽으며 말 없이 고개를 떨구던 여자와 그의 형제들을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울음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곧 서른이 되는 나는 엄마가 있고 아빠도 있어서 밖에 나가면 어른이 되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가 되곤 하는데, 우리 엄마는 더는 아이로 봐 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에는 늘 어른도 아이도 산다. 나는 이러한 특성을 '어른아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어른아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선천적 속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 앞에서는 아이가 되는 일. (혹은 그것이 생물학적 부모가 아닌 경우를 포함 해서)
부모님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은 아이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순간이다.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좀 더 날 것으로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고아가 된 뒤의 엄마의 세상은 엄마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막내딸인 엄마에 대해 어떤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노 요코의 겐에 대한 기억 처럼. 그럼 엄마는 매일매일 한장한장 기억을 넘기며 지난 날을 추억하지 않았을까.
나는 엄마에 대해, 아빠에 대해 어떤 기억들을 남길 수 있을까. 엄마, 아빠의 마음 속에 장녀인 나는 어떤 딸로, 어떤 기억들로 남아 있을까.
가족에 대한 수많은 물음들이 흘러다닌다. 오늘 밤은 좀 더 이렇게 정해진 답 없는 물음들을 따라 떠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