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차일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3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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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완벽한 가정, 행복한 가족이었다. 일년 전 쌍둥이 여동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엄마와 다정한 아빠, 이란성이지만 자신과 꼭 닮은 쌍둥이 여동생까지 조니의 삶은 무엇하나 부족한게 없어보였다. 그들은 늘 행복했고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던 행복한 일상은 동생 앨리사의 실종으로 철저히 붕괴된다. 사라진 동생은 남겨진 가족들의 웃음과 삶에 대한 의지도 함께 가져가버렸다. 차가운 공기로 둘러싸인 집은 더이상 어린 조니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다. 어린 딸의 실종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버린 엄마, 이 모든 상황들로부터 도망친 아빠.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조니 가족이 처한 불행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난도질하는 켄까지...이 모든 상황이 어린 조니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켄은 조니 아버지의 동료였다. 조니 가족에게 아직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 켄은 더없이 친절한 이웃이자 조력자였다. 상냥한 이웃의 표본과도 같았던 그는 앨리사가 실종된 후 감춰둔 본성을 드러낸다. 딸의 실종에 대한 비난과 책망을 견디지 못한 조니의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자 더이상 조력자가 아닌 약탈자로 조니의 가정에 침범한 것이다. 나약해진 조니의 엄마를 마약에 의지하게 만든 후, 약에 취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힘없는 모자의 삶에 멋대로 침입해 위협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모든 상황을 무마시킨다. 조니 엄마에 대한 켄의 집착은 날로 심해져 결국에는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조니는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가족이 돌아오고, 엄마가 약을 끊게 해달라고, 그리고 켄이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게 해달라고 매일밤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린 소년의 간절한 소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 기도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순간 조니는 기도를 멈췄다. 그리고 결심한다. 기도를 이뤄줄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동생만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조니는 엄마를 지키고 가족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차를 몰고 멀리 떨어진 가게로 가 장을 보고, 아침을 준비한다. 또, 엄마와 자신을 떨어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 처럼 보이는 사회복지사에게 자신이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엄마의 약병을 감추고 집 안을 청소한다. 그리고 매일 동생을 찾아나선다. 너무도 위험해 보이는 지도 한 장을 들고.... 어린 소년의 손에 들린 지도는 이 마을의 추악한 범죄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어린 소녀들을 상대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소아성애자들. 조니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며 혹시나 저들의 집 어딘가에 동생 앨리사가 갇혀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기도해도 이 가여운 가족에게 자비란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이건 정말 너무하다 싶다. 고난에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거늘 고작 열세 살 밖에 안된 이 어린 소년이 감내하기에 이 모든 일들은 너무도 가혹하고 잔인하기 짝이없다. 조니의 내면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너무도 빨리 어른이 되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켄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묵인하는 자신의 삼촌도, 동생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찰도, 조니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아닌 거추장스러운 참견일 뿐이었다. 무엇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 엄마를 지켜 줄 사람도, 잃어버린 동생을 찾을 사람도 오로지 조니 자신 뿐임을 진작에 깨달았다. 그럼에도 이 가여운 소년은 스스로를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고 믿는 조니는 매번 자신을 향해 명함을 건네며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헌트 경찰의 손을 뿌리친다. 이미 그는 일 년 전 동생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경찰에게 되찾아야할 가족의 행복을 맡길 수는 없다고 조니는 생각한다.

 

결국 조니는 앨리사를 데려간 범인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소아성애자의 집을 훔쳐보다 위험에 처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사건으로 조니의 엄마 캐서린은 자신에게 지켜야 할 아이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잃어버린 딸 앨리사에 대한 절망으로 자신을 놓아버리고 어린 조니를 방치했던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아들 조니를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 조니와 캐서린을 도우려는 헌트 경찰은 조니가 그동안의 관찰을 기록해둔 메모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조니의 메모는 소녀들을 납치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또다른 범인이 경찰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독자를 몰아간다. 조니가 찾아다닌 범죄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는가 하면 어느새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의혹의 눈길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의심을 거둬들이는 순간 화살은 곧바로 다른 이를 지목한다. 한명씩, 혐의가 벗겨지기가 무섭게 또다른 심증을 제시하며 어쩌면 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의 추측을 낳게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이 추리는 독자를 지치게 만들지도, 지루하게 하지도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조니의 일상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고작 열세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처한 상황에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팠고, 비열한 어른들의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조니 가족을 짓누르던 앨리사의 실종에 얽힌 비밀이 밝혀진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니의 가족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건의 시작이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앨리사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건 처음부터 짐작했었다. 그럼에도 조니의 간절한 모습에 나 역시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슬프긴 해도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실수가 실수에서 그쳤더라면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됐다. 한 순간 사라져버린어린 딸이 그런 상황에 처했던 이유만 알았더라도 조니의 가족이 이처럼 무너지지는 않았을 터이다. 만약 그랬다면 남은 가족들은 끔찍한 범죄가 아닌 안타까운 실수를 이해하고 슬프지만 현실로 돌아와 가정이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루 아침에 닥친 납득하기 힘든 현실 앞에 그저 무력하게 주저 앉아 곁에 있는 아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이로 인해 벌어질 모든 상황을 어린 조니가 떠맡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범인으로 밝혀진 이가 추악한 소아성애자였다면 이토록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범인은 자신의 가족이 저지른 잘못이 행여 가족의 행복을 망칠까봐 실수를 범죄로 만들었다. 단지 자기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조니의 가족을 이토록 처참한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어린 소년이 잃어버린 삶의 행복은 안중에도 없이,철저히 본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다양한 스릴러 소설을 접했지만 라스트 차일드처럼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책을 읽었는데, 책장을 덮은 후에도 머릿속에서 조니가 떠나질 않았다. 힘겨운 고통에서 비로소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조니라는 아이가 내 이웃에 살고 있기라도 한 듯....아마도 당분간은 이 어린 소년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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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행자 - 마리캣 그림에세이
마리캣 글.그림 / 미디어샘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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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읽지?'

 바보같을지 모르지만 고양이 여행자를 받아든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아깝긴 뭐가 아까워!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막상 자신의 손에 들린 빨간 책을 바라보면 이런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보는 것도 아깝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싶은 책이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지만.. 책을 쫙~ 펼칠 엄두도 못내고, 행여 지문이라도 묻을까 엄지와 검지 끝을 이용해 

조심조심 보고 있자니.............우리 냥이가.......고맙게도... 그냥 편하게 읽으라며 침을 발라 주셨다 ㅠ0ㅠ ㅋㅋ)

 

'이봐~집사! 독서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구!'

 

고양이와 함께 살고 부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애정을 쏟고 있는 게 바로 '고양이 책'이다.

고양이 사진집은 물론이고 고양이를 소재로한 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고양이와 별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일단 고.양. 이. 란  석자가 등장하면 일단 읽어야 직성이 풀리니

이만하면 출구없는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한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마리캣의 그림이 가득 담긴 고양이 여행자를 만났으니

그 흥분과 감격은 더 말해봐야 입만, 아니 손가락만 아플 뿐이니 사진으로 대신하련다.

Thank you~!

 

책 표지나 그림에 치중한 책을 두고

내용이 아닌 겉모습만 신경 쓴 책에 알맹이가 있겠어?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림에세이의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

사실 마리캣의 그림이야 캐릭터로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야기가 곁들여진 책이라면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을 무색케 하듯 책장을 한 장씩 넘길때마다

오로지 마리캣만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림과 글에 금세 빠져들었다.

 마리캣의 그림이 화려하고 신비롭다면 마리캣이 들려준 이야기는 따뜻하고 담백했다.

그래선지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에 어우러진 담백한 글들이 더없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자 본인이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기에 일상에서 경험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으리라

 

 

한장한장 정성이 듬뿍 담긴 그림 속 고양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마리 한마리가 저마다 각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마리캣의 손끝에서 생명을 얻은 고양이들은 바구니 속에서 단잠에 빠지기도 하고 주인몰래 초밥쟁탈전을 벌인다.

때로는 집사가 되어 맛있는 파이도 구워주고, 동화 속 공주로 다시 태어났다가, 날개를 달고 여행을 떠나기도한다.

얼룩무늬 고양이와의 만남으로 작가는 마리캣이란 이름을 얻었고, 수많은 고양이들이 그로인해 탄생했으니

이처럼 멋진 일이 어디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의 눈을 무섭다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고양이들의 눈동자가 좋아,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집 냥이와 본의 아닌 눈싸움을 벌이곤 한다 .

그 동그란 눈망울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노란 호박보석이 콕 박혀 있는 듯한데

이 책에 담긴 그림에는 그런 고양이의 눈동자가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렇듯 화려한 색감생동감 넘치는 표현,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이 바로 마리캣이다

고양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눈빛을 비롯해 윤기나는 털까지..

이처럼 섬세한 묘사가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생동감을 느껴지게 하는데

이는 내가 마리캣고양이를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고양이 여행자에는 작가와 고양이와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마리옹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

기르던 고양이와의 이별을 비롯해 길고양이와의 인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스코티쉬폴드와 노르웨이 숲, 러시안 블루, 아비시니안 등

작가가 그림으로 재탄생시킨 다양한 고양이들은

'고양이 화보'를 방불케 한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고양이와의 동거생활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우아하게 앉아있다가 한순간 돌변해 사고를 치고,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앉아 모른척 딴청을 피우는 모습들이

얄밉기는커녕 못견디게 귀여우니...도저히 혼을 낼 수가 없다.  

비록 고집불통 사고뭉치 고양이일지라도 그런 모습들까지 웃음이 터져나와 미워할 수 없는 게 바로 고양이란 존재다.

 이 사랑스런 고양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엿보고 있자니

 마치 우리 냥이를 보는 것 같아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많은 작가들이 이 작고 새침한 동물이 뿜어내는 묘한 매력에 홀려

고양이를 소재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또 그림을 그린다.

때문에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책들이 저마다 각자의 특색을 뽐내는데 

작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마리캣의 그림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가 고양이를 키우며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의 미소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를 선물할 것이다.

추운 겨울 도란도란 나누는 고양이들이 대화를 귀를 기울이듯 고양이 여행자에 빠져드는 시간...

  정말이지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 

 

 

P. 57

고양이의 다정함은 감동적이다.

곁을 주지 않던 새초롬한 녀석이 조심스레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말랑말랑한 발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걸어올 때의 느낌은 특별하다.

요란한 애정 표현은 아니지만, 그 조용한 대화 신청은 매우 다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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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 - 마음이 외로운 당신을 위한 따뜻한 위로
A.G 로엠메르스 지음, 김경집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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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는 언제까지나 어린왕자일 거라고..아니 어린왕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어린왕자가 자라서 청소년이 되고 더 나이가 들어 아저씨가 되고 또,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내 마음 속 어린왕자는 그저 늘 같은 자리에서 작은 별의 장미 한 송이를 돌보며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기다림 끝에 책을 받아든 내 눈에 비친 어린왕자의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 그 떄문인 듯 하다. 표지에 그려진 어린왕자의 훌쩍 자란 뒷모습은 더이상 내 기억 속 어린왕자가 아니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에 자그마한 키를 가진 귀여운 소년은 어느새 훌쩍 커버려 청년의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면서 혹시나 훌쩍 자란 키만큼 순수했던 마음까지 변해버렸으면 어쩌나 하는 어리석은 우려를 잠깐 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린왕자의 내면은 그 옛날 '어렸던 어린왕자'였을 적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해 폭풍 질문을 쏟아내며, 자신이 한 질문에 답변을 듣기전까지는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던 그 호기심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안도했고 또 기뻤다. 몸이 커가는 속도에 뒤질세라 마음까지 변해가는 우리들과 다르게 어린왕자는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변화가 순수함 대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거라면 어린왕자의 변화는 말그대로 '성장'이었다. 몸의 성장과 마음의 성장... 그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소년이 아직 순수한 내면을 간직하고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순수함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느낀 후 더욱 마음이 놓였다.

 

저자는 친구의 결혼식으로 향하던 중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지쳐 잠이 든 천진한 얼굴의 소년을 발견한다. 파란 망토에 반짝이는 검은부츠를 신은 조금 이상한 복장의 소년은 한적한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저자로 하여금 혹시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잠시동안 망설이던 저자는 그냥 둘 수가 없어 소년을 차에 태우고 다시 길을 향한다. 소년이 깨어나길 기다린지 얼마쯤 흘렀을까, 드디어 잠에서 깬 소년은 낯선 어른을 경계하기는 커녕 저자가 건넨 물과 새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우리가 타고 있는 기계가 뭐에요?" 그때부터 소년은 옆자리에 앉은 어른을 향해 많고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질문들은 때론 쉬운 답변에 그치기도 하지만 때때로 저자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을 찾기 위해 지구로 왔다는 소년의 말에 저자는 소년을 도와주고자 그 사람이 사는 곳을 묻고, 이어진 소년의 대답으로 깨닫는다. 상대방을 난감하게 만들 정도로 믿기 어려운 이 순수한 소년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아이였다는 것을.. 날아다니는 기계를 갖고 있으며, 웃는 별들을 선물로 줬던 사람을 찾고 있는 파란망토의 소년! 그는 바로 어린왕자였다. 소년은 자신이 겪고 있는 마음의 슬픔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양으로 알고 있던 존재가 사실은 사진이란 것에 불과했으며, 양이 담겨 있다고 믿었던 상자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잡초가 알려준 순간 어린왕자의 세상이 무너지고 말았음을.

그 날은 어린왕자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고 그 후 어린왕자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처음 산타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때 받는 충격은 실로 큰 것이다. 보이는 대로 믿고 들려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이 믿어마지 않던 존재가 사실은 거짓이었고, 더군다나 그 거짓을 말한 이가 자산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절대적인 존재,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부모님 이라는 사실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충격일 것이다. 어린왕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친구가 건넨 선물에 대해서 잡초가 들려준 이야기가 어린왕자에게는 세상을 무너뜨릴만큼 커다란 슬픔이었다. 어린왕자는 잡초로 인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빠진다. 때로는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다 모르는 채 사는게 나을 때가 있다. 속임수와 거짓도 그 중 하나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이야기들을 잡초는 마치 성경 속 뱀과 같이 어린왕자에게 일러준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들은 가혹해보였다. 결국 소년은 친구를 만나 왜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는지 물어보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지구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것만이 더이상 웃지 않는 자신의 별들을 다시금 웃게 만들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그러한 이유를 안고 돌아온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저자와 어린왕자는 여행길을 함께 한다. 그것은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 힘겨운 여행과도 같다. 자신을 흔드는 문제로부터 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 결국에 어린왕자는 살아오면서 처음 겪게 된 어려움 앞에서 자신의 마음에 닥친 슬픔을 스스로를 이겨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 같았다.

 

이 책에는 인생에 닥친 많은 어려움과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어린왕자와 저자의 대화를 빌어 말하고 있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고 있지만 어렵게 풀지 않고 담백하게 이야기 한다. 어린왕자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처럼. 그렇게 많은 대화를 주고 받던 중 저자의 긴 설명 앞에 어린왕자는 말없이 옳은 행동을 보여줌으로 그의 설명을 무색케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범하는 모순을 어린왕자는 비난하기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으로 상황을 변화시킨다. 강아지 날개와의 만남이 그러하다. 저자와 어린왕자가 타고 있던 차에 치어 목숨을 잃게 된 하얀 개를 두고 저자는 대부분의 어른들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하고 자리를 떠나려다 개의 주인을 보고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사과를 구하기 앞서 지갑을 먼저 꺼내 든 것이다. 그러나 어린왕자는 떨고 있는 커다란 개를  보듬어 안으며 눈물 흘린다. 그러자 어린왕자의 눈을 올려다보던 개의 눈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개의 주인은 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한다. '이건 그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오' 이것이 어른의 마음과 아이의 마음인 듯 하다. 간혹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어른도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은 자신이 벌인 문제와 자신 앞에 놓인 문제들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늘상 입으로는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개를 잃은 주인은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의 목숨을 잃게 했음에도 오히려  어린왕자에게 작은 새끼 강아지를 안겨주며 새로운 생명을 선물한다. 진실한 마음이 통한 것이다.

 

P.107

그것은 사랑의 기적이었고 어린왕자가 내게 가르쳐 준 첫 번때 교훈이기도 했어. 나는 말로만 떠들면서 내 경험을 어린 왕자에게 나눠 줬지만 어린왕자는 마치 선생님처럼 내게 침묵의 지혜를 보여 준 거야. 사랑의 기술에 대한 백 권의 책이 한 번의 입맞춤에 미치지 못하고, 사랑에 대한 백 번의 연설도 단 한 번의 행동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되외었어

 

어린왕자의 마음이 변화시킨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가 사는 동안 범하는 수많은 실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노력해야하는 가를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의 순수함으로 하나 둘 상황을 변화시키며 길을 가던 어린왕자는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을 발견하고 저자와 안녕의 인사를 나눈다. 저자가 어린왕자와 함께 했던 사흘 간의 동행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듯 나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많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누구나 어린시절 간직한 추억의 한 켠에 어린왕자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갈매기의 꿈, 꽃들에게 희망을.. 이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린왕자는 내 마음 속 가장 훌륭한 서랍에 담겨 있고, 지금도 가끔 꺼내보곤 한다. 앞으로도 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린왕자가 더 나이를 먹어 아저씨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어도 어린왕자는 영원히 소년의 마음 그대로를 간직한 채 우리를 찾아 올테니 말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작은 노력이 많은 것을 변하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세 번째, 네 번째...언제까지나 계속 되지 않을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지구별의 어른들에게 어린왕자가 일깨워준 작은 바람은 물결처럼 번져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좋은 방향으로.. 다시 찾아올 어린 왕자를 기다리며 내 마음 속 어린왕자의 서랍에 두번째 이야기도 담아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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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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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서진의 이야기를 읽은 건 처음이 아니다. 전작의 강렬함 덕분에 내 기억 속에 그는'신선한 이야기꾼'이라는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었던 웰컴 투더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서진'이라는 작가에 궁금증이 생겼었다면, 이번 작품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그의 이야기 세계에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처음 '하트브레이크호텔'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었는데 너무 늦지 않게 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던게 참으로 다행이지 싶다. 만약 서진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토록 수많은 상상이 응집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은 형식을 구분하기가 참 애매하다. 8개의 이야기 속에 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니 단편이라고 해야하나 싶다가 이야기가 모두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 연작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장편의 범주에 속하는 건가 고민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장르를 구분 짓는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쓴 작가 본인이 장편도 아니고 연작도 아닌 그저 야한 소설 혹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소설 이라 칭했으니 그걸로 됐다 싶다.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모호한 형식만큼이나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책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시간을 내서 이야기 하나하나에 촉을 곤두세우고 집중력을 총동원해 읽을 책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세상의 모든 곳과 연결 된 하트브레이크호텔을 통해 자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드는게 커다란 틀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작가의 기발한 상상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온갖 상상의 집합소인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을때와 비슷한 느낌도 받았다. 장르적 상상력과 공학적 구성으로 경계를 횡단하는 새로운 세대의 문학이라는 다소 거하게 느껴졌던 책 소개도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니 이해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전혀 과한 소개가 아니었구나 싶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일곱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목차에 나와있는대로 구분하자면 여덟개로 나뉘어야겠지만 이야기의 중추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황령산 드라이브'는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 이야기의 초입과 말미에 두번 등장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품게되는 궁금증은 마지막 황령산드라이브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 된다. 이야기에 몰입할 수록 머릿속에 차오르던 희뿌연 안개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걷히는 듯 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결국 책을 덮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숨어있는 연결고리들을 마저 찾아보았고 그제서야 인물들을 모두 되짚어 볼 여유가 생겼다.
 
황령산 드라이브에서는 여교수와 여제자의 동성애가 등장한다. 첫 이야기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독자들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다지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닌지라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여교수의 안내로 그녀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인데 거기서 이야기는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두 번째 허니문으로 넘어간다. 삶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남지 않은 한 노인이 죽음을 맞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데 그 곳을 마지막 장소로 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행복한 기억이 머문 장소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샌프란시스코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에서 미리 구입해둔 알약을 입에 넣고 과거의 기억속으로 떠난다.
 
P. 45
아내는 5년 전에 죽었다. 이다음에,라는 말처럼 허망한 약속은 없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 많은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는 이다음은 결코 오지 않는다. 사람의 탄생이나 죽음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 하면 되겠지. 하고 미뤘던 일들 중 지금와 생각해보면 제대로 해냈던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자신이 미뤘던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아내와 함께 할 날들은 앞으로 셀 수 없이 많을테고 그러니 아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 또한 다가올 '셀 수 없이 많은 날들 중 언젠가' 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결국 혼자가 되고 나서야 노인의 몸으로 죽기 전 그곳에 갈 마음을 먹게되리란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의 인생에 많은 부분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는 현재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뜨끔한 마음이었다.
 
이어지는 단편들은 각각 도쿄와 마이애미, 워싱턴DC, 라스베가스,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마지막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황령산드라이브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이야기들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독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릿속의 핸드폰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인지 그의 머릿속과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벨소리가 울리고 나아가 전화를 건 상대와 통화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요즘같은 세상에서도 휴대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나로써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세세하게 그려지는 상황들이 보통의 현대인들이라면 '그럴 법' 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번쨰 이야기인 '미래 귀환 명령'이 가장 흥미로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서진의 이야기 구성과 넘치는 상상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데다 미래귀환명령을 비롯한 몇몇 이야기들은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엮여져 있는 듯 하다는 평론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작가 스스로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없는 이야기라고 했 듯 마지막 이야기인 황령산드라이브가 어쩌면 계속되는 이야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또다른 사연을 품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찾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읽는 이에게 잠시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작가 서진의 이야기. 앞으로도 나는 그가 들려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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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인생
제이시 두가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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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현실로 내팽개쳐진다면, 그리고 악몽의 시간들이 18년동안 계속된다면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아마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살기 위한 노력보다는 죽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제이시가 견뎌낸 일들은 지옥 그 자체였다. 내게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공간과 시간이 제이시에게는 틀림없는 현실이었음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책장을 덮어버리고 한참 후에야 다시 펼쳐들었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등교길. 평범했던 그 아침에 11살 제이시는 납치를 당한다. 그 순간 제이시는 자신에게 닥쳐온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인사를 나눈 가족을 다시 만나고, 늘상 다니던 이 길을 걷기까지 18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P. 41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나는 울면서 깨어났다. 무서운 꿈 때문에 울면서 깬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악몽은 현실이다.

p.43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다시 눈을 떠야 할까? 잠들었다 깨어나면 내 침대에 있을 거고 이건 그냥 나쁜 꿈일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다시 망각 속으로 빠져든다.

 
제이시를 납치한 것은 사람이 아닌 악마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
마약에 찌들어 살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으로 어린 제이시를 납치한 필립과 그런 필립을 제지하기는 커녕 방관하며 오히려 돕기까지 한 부인 낸시.
이들이 악마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악마라는 단어 만큼 그들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것은 없는 듯 하다.  제이시는 악마가 자시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세운 악마의 성과도 같은 뒤뜰의 비밀 공간에서 18년동안 성노예로 살아간다. 어린 제이시는 강간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어린 소녀에게 그들은 너무도 잔인했다. 

 
제이시는 14살에 첫 아기를, 열일곱에 또다시 둘째 아기를 낳는다. 엄마가 가장 절실히 필요할 나이에 자신이 엄마가 되어버린 제이시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기 어려울만큼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차분히 해냈다. 갓난 아기를 돌보고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야할 나이가 되자 스스로 교육자료를 만들어 두 딸을 공부시켰다. 제이시가 탈출에 성공한 후에, 자신을 버티게 한 것은 언젠가 엄마를 볼 수 있다는 희망과 두 딸이었다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딸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강한 엄마였기에 제이시가 자신의 삶과 두 딸의 인생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리라. 


책 속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스스로 도둑맞은 인생의 단편이라 칭한 사진 속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무게를 독자가 더 절실히 느끼길 바라는 듯 하나같이 해맑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너무도 예쁘게 웃고 있는 제이시의 미소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추악한 상황들과 맞물려 더욱 가슴을 조여온다. 무언가에 잔뜩 골이 나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덟살의 제이시부터 처음 눈사람을 만들고 기쁨에 겨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시, 그리고 납치되었던 그 해, 앞으로 일어날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수줍게 웃고 있는 열한살의 제이시까지.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 속에 머물러있는 추억들이 너무도 평범해 더 가슴 아팠다. 또래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누렸을 어린 소녀의 귀중한 시간들이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이웃들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주어지고 신은 이겨낼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지만 어린 제이시에게 주어진 고통의 무게와 상처의 크기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피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겨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와 죽을만큼 고통스러웠던 날들로부터 도망쳤던 날 그녀의 나이는 29이었다.

 
제이시의 눈 앞에 서 있는 숙녀가 바로 그녀의 사랑스런 갓난쟁이 동생이란 사실은 제이시가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긴 세월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훌쩍 자란 동생의 키는 그녀가 도둑맞은 인생의 증거인 셈이었다. 자그마치 18년이 흘렀다.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 그리고 아기였던 자신의 동생이 어엿한 숙녀로 자랄 동안 누렸던 모든 행복의 순간에 그녀는 없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 갇혀 두 딸을 위해 필사적이었던 제이시는, 자신에게 닥쳐온 악몽의 순간부터 탈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끔찍했던 시간들을 너무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그녀 자신이 대신했을 뿐이라는 듯, 원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되찾은 자유에 행복해하고 다시금 주어진 시간에 감사한다. 시간이 그녀를 고통 속에 몰아놓었을지는 몰라도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강했고 또 특별했다. 

 

 

"나는 나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난 살아남았다."

 

 

P. 27

    회상

세상 밖으로 나온 후 나는 솔방울을 모으고 있다....솔방울은 필립에게 납티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닿았던 것이다.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솔방울은 18년 동안 감금당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꽉 쥐었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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