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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인생
제이시 두가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11월
평점 :
어느날 갑자기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현실로 내팽개쳐진다면, 그리고 악몽의 시간들이 18년동안 계속된다면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아마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살기 위한 노력보다는 죽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제이시가 견뎌낸 일들은 지옥 그 자체였다. 내게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공간과 시간이 제이시에게는 틀림없는 현실이었음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책장을 덮어버리고 한참 후에야 다시 펼쳐들었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등교길. 평범했던 그 아침에 11살 제이시는 납치를 당한다. 그 순간 제이시는 자신에게 닥쳐온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인사를 나눈 가족을 다시 만나고, 늘상 다니던 이 길을 걷기까지 18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P. 41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나는 울면서 깨어났다. 무서운 꿈 때문에 울면서 깬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악몽은 현실이다.
p.43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다시 눈을 떠야 할까? 잠들었다 깨어나면 내 침대에 있을 거고 이건 그냥 나쁜 꿈일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다시 망각 속으로 빠져든다.
제이시를 납치한 것은 사람이 아닌 악마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
마약에 찌들어 살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으로 어린 제이시를 납치한 필립과 그런 필립을 제지하기는 커녕 방관하며 오히려 돕기까지 한 부인 낸시.
이들이 악마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악마라는 단어 만큼 그들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것은 없는 듯 하다. 제이시는 악마가 자시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세운 악마의 성과도 같은 뒤뜰의 비밀 공간에서 18년동안 성노예로 살아간다. 어린 제이시는 강간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어린 소녀에게 그들은 너무도 잔인했다.
제이시는 14살에 첫 아기를, 열일곱에 또다시 둘째 아기를 낳는다. 엄마가 가장 절실히 필요할 나이에 자신이 엄마가 되어버린 제이시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기 어려울만큼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차분히 해냈다. 갓난 아기를 돌보고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야할 나이가 되자 스스로 교육자료를 만들어 두 딸을 공부시켰다. 제이시가 탈출에 성공한 후에, 자신을 버티게 한 것은 언젠가 엄마를 볼 수 있다는 희망과 두 딸이었다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딸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강한 엄마였기에 제이시가 자신의 삶과 두 딸의 인생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리라.
책 속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스스로 도둑맞은 인생의 단편이라 칭한 사진 속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무게를 독자가 더 절실히 느끼길 바라는 듯 하나같이 해맑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너무도 예쁘게 웃고 있는 제이시의 미소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추악한 상황들과 맞물려 더욱 가슴을 조여온다. 무언가에 잔뜩 골이 나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덟살의 제이시부터 처음 눈사람을 만들고 기쁨에 겨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시, 그리고 납치되었던 그 해, 앞으로 일어날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수줍게 웃고 있는 열한살의 제이시까지.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 속에 머물러있는 추억들이 너무도 평범해 더 가슴 아팠다. 또래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누렸을 어린 소녀의 귀중한 시간들이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이웃들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고난은 주어지고 신은 이겨낼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지만 어린 제이시에게 주어진 고통의 무게와 상처의 크기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피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겨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을 괴롭혔던 존재와 죽을만큼 고통스러웠던 날들로부터 도망쳤던 날 그녀의 나이는 29이었다.
제이시의 눈 앞에 서 있는 숙녀가 바로 그녀의 사랑스런 갓난쟁이 동생이란 사실은 제이시가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긴 세월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훌쩍 자란 동생의 키는 그녀가 도둑맞은 인생의 증거인 셈이었다. 자그마치 18년이 흘렀다.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 그리고 아기였던 자신의 동생이 어엿한 숙녀로 자랄 동안 누렸던 모든 행복의 순간에 그녀는 없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 갇혀 두 딸을 위해 필사적이었던 제이시는, 자신에게 닥쳐온 악몽의 순간부터 탈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끔찍했던 시간들을 너무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그녀 자신이 대신했을 뿐이라는 듯, 원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되찾은 자유에 행복해하고 다시금 주어진 시간에 감사한다. 시간이 그녀를 고통 속에 몰아놓었을지는 몰라도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녀는 강했고 또 특별했다.
"나는 나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난 살아남았다."
P. 27
회상
세상 밖으로 나온 후 나는 솔방울을 모으고 있다....솔방울은 필립에게 납티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닿았던 것이다. 딱딱하고 끈적끈적한 솔방울은 18년 동안 감금당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꽉 쥐었던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