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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브레이크 호텔
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평점 :
작가 서진의 이야기를 읽은 건 처음이 아니다. 전작의 강렬함 덕분에 내 기억 속에 그는'신선한 이야기꾼'이라는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었던 웰컴 투더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서진'이라는 작가에 궁금증이 생겼었다면, 이번 작품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그의 이야기 세계에 한 걸음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처음 '하트브레이크호텔'이라는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었는데 너무 늦지 않게 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던게 참으로 다행이지 싶다. 만약 서진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토록 수많은 상상이 응집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은 형식을 구분하기가 참 애매하다. 8개의 이야기 속에 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니 단편이라고 해야하나 싶다가 이야기가 모두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 연작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장편의 범주에 속하는 건가 고민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장르를 구분 짓는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쓴 작가 본인이 장편도 아니고 연작도 아닌 그저 야한 소설 혹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소설 이라 칭했으니 그걸로 됐다 싶다.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모호한 형식만큼이나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책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시간을 내서 이야기 하나하나에 촉을 곤두세우고 집중력을 총동원해 읽을 책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각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세상의 모든 곳과 연결 된 하트브레이크호텔을 통해 자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드는게 커다란 틀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작가의 기발한 상상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온갖 상상의 집합소인 베르나르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을때와 비슷한 느낌도 받았다. 장르적 상상력과 공학적 구성으로 경계를 횡단하는 새로운 세대의 문학이라는 다소 거하게 느껴졌던 책 소개도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니 이해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전혀 과한 소개가 아니었구나 싶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일곱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목차에 나와있는대로 구분하자면 여덟개로 나뉘어야겠지만 이야기의 중추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황령산 드라이브'는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 이야기의 초입과 말미에 두번 등장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품게되는 궁금증은 마지막 황령산드라이브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 된다. 이야기에 몰입할 수록 머릿속에 차오르던 희뿌연 안개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조금이나마 걷히는 듯 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결국 책을 덮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숨어있는 연결고리들을 마저 찾아보았고 그제서야 인물들을 모두 되짚어 볼 여유가 생겼다.
황령산 드라이브에서는 여교수와 여제자의 동성애가 등장한다. 첫 이야기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독자들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야 하나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다지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는 아닌지라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여교수의 안내로 그녀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인데 거기서 이야기는 바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두 번째 허니문으로 넘어간다. 삶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남지 않은 한 노인이 죽음을 맞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데 그 곳을 마지막 장소로 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5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행복한 기억이 머문 장소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샌프란시스코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에서 미리 구입해둔 알약을 입에 넣고 과거의 기억속으로 떠난다.
P. 45
아내는 5년 전에 죽었다. 이다음에,라는 말처럼 허망한 약속은 없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 많은 날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는 이다음은 결코 오지 않는다. 사람의 탄생이나 죽음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중에 하면 되겠지. 하고 미뤘던 일들 중 지금와 생각해보면 제대로 해냈던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역시 자신이 미뤘던 일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아내와 함께 할 날들은 앞으로 셀 수 없이 많을테고 그러니 아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 또한 다가올 '셀 수 없이 많은 날들 중 언젠가' 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결국 혼자가 되고 나서야 노인의 몸으로 죽기 전 그곳에 갈 마음을 먹게되리란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그의 인생에 많은 부분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는 현재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뜨끔한 마음이었다.
이어지는 단편들은 각각 도쿄와 마이애미, 워싱턴DC, 라스베가스,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마지막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황령산드라이브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으로 끝난다. 모든 이야기들이 열거하기 힘들만큼 독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 머릿속의 핸드폰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인지 그의 머릿속과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느날부턴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벨소리가 울리고 나아가 전화를 건 상대와 통화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요즘같은 세상에서도 휴대폰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나로써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세세하게 그려지는 상황들이 보통의 현대인들이라면 '그럴 법' 하게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번쨰 이야기인 '미래 귀환 명령'이 가장 흥미로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서진의 이야기 구성과 넘치는 상상력에 흠뻑 빠질 수 있었던데다 미래귀환명령을 비롯한 몇몇 이야기들은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엮여져 있는 듯 하다는 평론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작가 스스로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없는 이야기라고 했 듯 마지막 이야기인 황령산드라이브가 어쩌면 계속되는 이야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또다른 사연을 품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찾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읽는 이에게 잠시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작가 서진의 이야기. 앞으로도 나는 그가 들려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