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퀸 클레오파트라
스테이시 시프 지음, 정경옥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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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라는 여성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지구의 모든 표면이 변했을 것이란 말을 남긴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미모가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를 칭송하는 많은 언급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녀의 모습은 그 어떤 유물로도 남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았기에 더욱 신비에 싸인 채 후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부정확한 추측들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라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한 여인이 영웅을 통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상대를 추락하게 만드는 희대의 요부,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강하게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진 그녀의 이미지는 실패한 왕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 기억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구체적 근거보다는 그녀가 가진 여성성과 성적인 매력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으로서 해냈던 수많은 일들을 깎아내리고 마치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남성들의 업적을 방해한 것 마냥 부정적인 인식을 심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방법은 매우 잘 먹힌 듯 하다.

왜곡된 기록을 토대로 검증없이 내보낸 수많은 대중매체들을 통해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는 널리 퍼졌고, 그대로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접했던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록을 떠올려보니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내 기억 속의 클레오파트라는 늘 여인으로 존재했을 뿐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은 거의 없었다.

그저 시대의 영웅인 카이사르,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모두 빠져들 만큼 뛰어난 매력의 소유자였던 그녀가 자신의 매력을 십분 활용해 권력을 쥐었고 종국에는 그녀 자신 또한 몰락의 길을 걸었던 비운의 팜므파탈 ...이 정도가 내가 평소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하면떠오르는 대강의 것들이었다. 진짜 클레오파트라를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못해 잘못된 인식이 심어져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우스13세와 결혼 한 뒤 ( 그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혈연간의 결혼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한 가장 쉬운 수단이었기에 남매간의 결혼 혹은 사촌 간의 결혼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집트를 함께 다스리던 중 왕위에서 쫓겨난 그녀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카이사르를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정치적 목적 없이 사랑의 감정을 느껴 그와 함께 한 것인지는 저자 역시 확신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렇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그녀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을 모두 내려놓고 여왕 클레오파트라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로마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이집트의 왕가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어려서 부터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왕위를 잇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아왔고 여기에 그녀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 형제들과의 지리한 권력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배움을 멀리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왕도 시도하지 않았던 어려운 이집트어를 배워 통역 없이 소통했고 뿐만 아니라 수개국어를 익혀 외교에 있어서도 커다란 수완을 발휘했다. 통역 없이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그녀의 모습이 상대국의 믿음과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타고난 용모와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좌중을 아우르는 분위기와 듣는 이를 압도하는 연설실력은 당대의 영웅들을 사로잡기 충분했으며 뛰어난 판단력과 지략의 소유자였던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능력 또한 탁월했다.

 

이렇듯 책에 담긴 클레오파트라의 여왕으로서의 면모는 기존에 가졌던 희대의 요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고 그녀의 삶과 사랑을 통해 그간 알지 못했던 지도자의 고뇌와 비탄을 느낄 수 있었다. 긴 시간에 걸친 고증을 통해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은 클레오파트라. 저자의 오랜 노력 끝에 진짜 그녀의 본 모습을 만날 수 있음이 다행스러웠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삶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인 클레오파트라'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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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포칼립스
대니얼 H. 윌슨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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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길 원했던 로봇, 인간 몰살 프로젝트를 실행하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겨난 수많은 기계들이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은 기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무사히 종족을 보존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닌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로봇들로 인해 인류가 위험에 빠진다는 상상. 불가능해보일지 모르지만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저 그런 흔한 공상과학소설로 치부해 버리기엔 다가올 미래의 모습과 닮아있어 그저 즐길 수 만은 없었다.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위해 보다 나은 성능의 기계를 선보이려 기를쓰는 우리의 행보가 어느 순간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경고, 인간의 욕심이 언젠가는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 모른다는 불안함. 그 불안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은 잊을만 하면 우리 앞에 나타난다. 사실 인간의 자만으로 벌어진 다른 종과의 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은 늘 있어왔다. 동물과 인간의 전쟁, 로봇과 인간의 전쟁.. 단지 반목의 대상만 달라졌을 뿐 그 속에 담긴 경종의 의미는 변함이 없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지금껏 봐왔던 비슷한 류의 이야기들과 비교했을때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도 매우 흡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루할 새 없이 흥미롭게 읽히는 까닭은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라는 상상의 바탕에 로봇공학분야를 전공한 작가의 해박한 전문성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만 나열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했을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작가의 세세한 묘사 덕분에 흥미를 더해가며 독자를 몰입하게끔 한다.

 

패스트푸드가게에 요거트를 사러 온 평범한 로봇 하나가 무자비하게 점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투 끝에 살아남은 다른 점원은 믿기 어려운 말을 한다. 로봇의 눈에서 살의를 봤다는 것이다. 로봇이란 본디 인간의 조종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할 뿐인데 로봇의 눈빛에 살의가 담겨있었다는 것은 기계에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오작동이나 시스템오류가 아니라 살의 그 자체였다는 생존자의 진술은 사실이었다. 마치 이것이 시작이라는 듯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로봇의 인간 습격 사건은 다가 올 전쟁을 위한 신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뒤덮으며 서로를 향해 돌진하고, 자동차와 엘리베이터는 더이상 인간의 안전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오히려 살상의 무기가 되어 인간을 살해하는 온갖 기계들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골로 숨어든다.

그러나 기계로부터의 도피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영역을 넓혀간 로봇들이 숨어있는 인간들까지 찾아내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고 간 것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철저히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다. 심지어 인간의 신체 일부를 잘라내고 기계로 대신하는 수술까지 이루어진다. 수술실로 들어갔던 인간들이 신체의 일부가 절단 된 채 흉측한 기계를 달고 돌아온 것이다. 빛나는 눈동자가 있던 공간에는 뻥뚤린 기계가,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선으로 연결된 로봇의 팔,다리가 채우고 있었다. 인간의 뇌를 비롯해, 근육과 피부까지 마음대로 조작한 로봇은 어린 소녀의 눈마저 기계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한 어머니의 용기있는 행동과 소녀의 지혜가 인간 대 로봇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될 줄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로보포칼립스에서 인류를 딛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대상은 로봇이다.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 노예로 전락한 인간. 이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휴대폰 없이는 잠시도 견딜 수 없고, 문명의 이기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현재의 인간들은 이미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미래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은 부분들을 기계에 의존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집집마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로봇은 물론이고 심부름과 아이를 봐주는 로봇이 주부의 자리를 대신 하는 가운데, 마트는 최첨단 시스템을 자랑하는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러 온 로봇들로 가득찬 풍경이 그려지지 않는가. 사야할 목록이 저장된 장바구니는 입력된 물건이 제대로 담기고 있는지 알아서 체크하고, 임무를 완수한 뒤 무인계산기 앞에 줄을 서 바구니를 올려놓기만 하면 자동으로 계산이 되거나 혹은 계산용 로봇이 점원의 역할을 대신할런지도 모른다. 지능화된 자동차는 핸들에 손을 대지 않아도 입력된 경로만으로 목적지에 안전히 데려다 주고, 책 속에서 처럼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동차면허증이 필요없는 세상을 살게되지는 않을까..

 

로보포칼립스는 이같은 일들이 일상이 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어느날 패스트푸드점에 가정용 로봇한대가 들어와 사람을 습격한다는 설정부터 반란을 꿈꾸는 로봇과 이에 맞써 싸우는 용감한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 그리고 후반부 인간의 편에서 협력하는 로봇의 등장까지..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지니는 모든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캐릭터의 설정 자체가 영화나 책에서 늘 등장하는 인물들과 너무도 닮아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섬세한 묘사가 평이한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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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364일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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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돌아 볼 만큼 눈부신 외모에,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주는 부유한 부모님.

세상의 모든 십대들이 바라는 꿈 같은 삶을 누리던 엘리자베스는 열여덟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죽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을 딴 보트 엘리자베스호에서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벌이고 있었는데,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호숫가에 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니....이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관한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사실이다. 허나 기억이 나지 않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물 속에 누워있는 소녀는 엘리자베스, 그녀가 분명했다. 자신이 죽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 엘리자베스의 눈 앞에 있는 그녀의 육신이 말해주고 있었다. 길고 빛나는 금발머리는 물결에 너울거리고 발에는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주신 화려한 보석장식의 부츠가 신겨져 있다. 런던의 패션쇼장에서 바로 공수된 그 부츠, 지금 자신의 발에도 그 부츠가 신겨져 있다. 머리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칠때 쯤  엘리자베스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어딘지 낯이 익는 그 소년의 이름은 알렉스다. 자신과 유치원때 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알렉스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음은 그만큼 엘리자베스와 알렉스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 속에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던 엘리자베스는 알렉스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알렉스는 그저 아무일 없이 하루가 지나길 바라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하루를 보내곤 했다. 1년 전 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

엘리자베스에게는 죽음의 순간은 물론,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녀는 과거를 거슬러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알렉스는 엘리자베스의 곁에서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지켜보며 때론 잘못된 행동에 비난을 퍼붓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겪었던 과거의 일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의 과거를 통해 점차 엘리자베스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에 가득차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가 실은 내면의 상처를 잔뜩 껴안고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 애 써야했음을...

 

 

엘리자베스는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알렉스와 함께 지나간 기억을 되짚어보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와중에 과거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는 알렉스가 왜 그토록 자신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대하는지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된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녀 자신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뛰어난 외모를 지녔지만 지나치게 외모에 치중했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게다가 친구가 아닌 이들에겐 배타적으로 대했고, 그것이 지나쳐 무례해 보이기도 했다. 과거의 엘리자베스는 적극적으로 친구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방관했고, 자신을 떠받드는 주위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겉모습을 치장하느라 바빠 다른 것엔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엘리자베스. 자신의 몸을 떠나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녀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지금 그녀는 죽어 있고,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들을 바로 잡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확인한 냉혹한 현실에 좌절한다. 자신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은 평온하기만 하고, 사랑했던 이들이 그녀의 죽음 뒤에 보여 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영원토록 슬퍼할 줄 알았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자매인 조시는 엘리자베스의 장례식날 그녀의 남자친구 리치와 키스를 나누고,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가 죽기 전부터 리치와 몰래 만났던 사이라 이야기한다. 게다가 믿었던 친구들마저도 자신의 방에서 옷과 물건들을 가져가기 바쁘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일들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도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알렉스의 도움으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흩어진 단편과도 같았던 기억들을 주워모아 퍼즐을 완성한 엘리자베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직면한다.

엘리자베스가 찾아낸 기억의 조각들은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일들이었지만 그녀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된 그녀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지 이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이 책은 로맨스소설의 탈을 쓴 추리소설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철부지 소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청소년소설 같기도 했다. 또한 책을 읽는 내내 재미난 하이틴 영화를 보는 듯 하면서도 죽음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어 그런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마디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라고 표현하면 설명이 될까. 나는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 외적으론 완벽한 어른에 가깝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내면의 인물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때문에 소설 속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혀를 차다가도 연민에 사로잡혀 그녀의 앞날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길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엘리자베스의 과거로의 여행에 동참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 다니다보니 어느덧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스와 알렉스, 나  셋이 함께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책을 덮고 난 뒤 부담없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것 같으면서도 약간의 여운이 남았던 까닭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난 반전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추리소설도 아니었고 애초에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읽는 동안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이에 대한 실망은 없었다. 이 소설을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가 돌아 본 삶의 모습에서 독자가 무언가 발견하길 기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 엘리자베스의 비밀에 한걸음 가까워 질 수록 가슴이 먹먹해졌으니 말이다.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즐거움 못지 않게, 많은 생각이 들었던 이야기 '열일곱,364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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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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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나를 확 끌어당겼던 이 책은 사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허나 책을 읽기도 전에 멋대로 상상한 것도 나요, 추측했던 것도 난데 책을 탓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내 뻔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혼자만의 착각을 황당해할 수 밖에..

그러나 책을 받아들었을 때 적잖게 당황했던 기분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긴 했지만 미셸투르니에의 사유는 분명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것들을 담고 있었다. 이 작고 얇은 책 한권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이 500페이지 분량의 장편소설을 읽을때와 맞먹었다면 설명이 될까 모르겠다.

 

나는 늘 상상을 갈구한다. 때문에 상상력의 대가로 불리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야기들을 읽고나면 재미와 감동보다 신기함과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담아 매끄럽게 풀어내는 그 능력. 나는 죽었다 깨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능력에 질투를 느낄 정도다. 상상력이란 능력은 갈고 닦아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란 것을, 날 때부터 금숟가락을 물고태어나는 사람들처럼, 상상력 또한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능력임을 몇몇 작가들을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싶어 애를 써봐도 쉽지가 않다. 다양한 책을 읽고자 노력하고,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의 고리를 잡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생각의 잔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끄적거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심지어 잠자리에 들때는 녹음기를 옆에 준비해두기까지 한다. 실제로 꿈을 통해 얻는 소재들이 깨어있을때 쥐어짜내는 상상보다 건질 게 많았기에 나로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은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내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이란 제목에 홀딱 반해 마치 상상력을 키워주는 마법의 상자라도 발견한냥 들떴음은 더 말해 무엇할까.

이렇듯 엄청난 기대 속에 책을 받아든 나는 생각보다 작은 사이즈에 한번 놀라고, 첫 장을 펼쳐들었을때 내 상상을 빗나간 그 내용에 또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쪽집게 상상력기르기 과외 정도를 기대했던 내 바람을 비웃는 듯 이 책은 철학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바보같은 기대였는지... 나는 진귀한 음식을 입 안 가득 떠먹여 주길 바랐던 거다.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스스로 사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만 하면 생각의 상자가 뿅하고 열리기라도 기대한 건가 싶어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기가 죽었다.

 

책 속에서 미셸투르니에는 116가지의 닮음과 다름꼴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행동과 정열, 시와 산문, 순수와 순결,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과 같은 식의 나열이다. 과연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는 저자다운 발상이다. 서로 대립하는 쌍을 만들어 그 속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는 모양이 마치 다른 해석 찾기라도 하는 듯 느껴졌다. 이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각각의 단어와 문장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쌍을 이루어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는 듯 하다. 하나의 짝이 완벽한 존재를 이루기 위해 다른 하나가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함을 상기시키 듯 미셸투르니에는 하나에 빗대어 다른 하나를 표현하고 정의 내린다. 그가 내린 정의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도 분명 있었다. 내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여실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상상력 기르기보다 생각 기르기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참신한 방식으로 이야기에 접근하고 싶다거나 새로운 의미의 해답을 찾고 싶을 때 한번 쯤 들추어 볼 만한 책이다.

 

 

 

<말과 글>

말은 좁은 공간을 벗어난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지워져버린다.

이에 비해 글은 시간과 공간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여행한다.

말은 살아 있는 것이며, 글은 죽어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말 없이 글은 생생해질 수 없다.

.....(중략)

위대한 작가란 작품의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그 목소리가 들려와 독자들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작가이다.

그는 글 속에 말을 용해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P.140~141

 

 

<고양이와 개>

사람들은 개에게 스스로 문을 열고 바깥을 정복하러 떠나는 충동을 기대한다.

...(증략)

반면 고양이는 집 안에 남아 난로가나 등잔 아래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꾸벅꾸벅 졸기 위해서가 아니라 싶은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다.

고양이가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기 때문이다.

개가 일차적 동물이라면 고양이는 이차적 동물이다.

P.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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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유물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7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7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찬차'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악녀의 유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찬차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작가의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저 두 글자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된 순간 충격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뜻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는 어감의 단어가 실은 사람의 머리를 말려서 만든 미라를 뜻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말린 머리, 찬차...간단한 설명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작가의 친절함? 덕분에 찬차를 만드는 과정부터 그 끔찍한 모습까지, 너무도 상세하게 묘사된 글을 읽고나자 마치 내 눈으로 본 것 마냥 그 형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뿐이 아니다. 습지미라의 괴기스런 모습은 또 어떠한가. 정말이지 책 표지에 리얼리즘 공포미학이라는 문구가 괜히 써있는게 아니었다. 대체 작가는 어떻게 이런 눈뜨고 보기 힘든 것들을 조사해서 글에 담아낼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대단하다는 말로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보스턴의 한 박물관 지하에서 미라 한 구가 발견된다. 이집트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미라는, 그것을 싸고 있는 고대의 리넨 헝겊을 분석한 결과  2천년 된 유물로 밝혀져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된다. 마담 X로 불리는 이 미라를 박물관에 전시하기에 앞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분석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저히 2년 천 된 미라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금속물질이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총알. 고대 입트에 총알에 있었을리 만무하다. 충격에 휩싸인 이들은 미라를 시체 안치소로 보내 부검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마담X의 정체는 2천년 된 미라가 아닌 25년 전에 죽은 여인의 시체로 밝혀진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이 여인이 총알이 박힌 채로 2주가 넘게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살인마는 상대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부상을 입혀 어둠 속에 가두어 놓고는 서서히 고통 속에 죽였다. 그런 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행하던 방법에 따라 시체를 미라로 만들고 박물관에 유기했다. 고고학자 조차 감쪽같이 속인 정교한 솜씨로 ... 마담X의 시체를 싸고 있던 헝겊을 벗겨내자 시체의 입은 마치 영원한 침묵을 고하는 듯이 굳게 꿰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입속에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의문의 메시지가 발견된 순간 공포에 사로잡힌 한 여인이 있었다. 자신을 찾아내려 혈안이 된 악마를 피해 다섯번이나 이름을 바꾸고 매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의 끝에서 살아온 조세핀 펄시로는 또다시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이 괴기스런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라의 모습으로 유기된 시체 한구를 시작으로, 공포는 서서히 조세핀의 목을 조여온다.

마담 X가 발견되었던 크리스피 박물관 지하에 또다른 시체가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감지한 형사들은 수사에 착수하고 그 결과 그들의 추측을 뛰어넘는 시체가 발견된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쪼그라든 머리 세 개.

 

P.96

마우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찬차인 것 같아요." "말린 머리."

마우라는 제인을 보며 다시 말했다.

"진짜 같아요."   ....(중략)

"그냥 오래된 소장품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어둠 속에서 마우라가 제인을 보았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최근 것일 수도 있고요."

 

P.108

"난 그 머리가 어디서 난 건지 도통 모르겠어. 누가 왜 그 벽 안에 갖다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마우라는 눈과 입술이 영원히 봉해진 머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누군가가 나름대로 수집을 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고대 이집트의 미라를 재현한 시체 한 구와 남아메리카 부족이 인간의 머리를 잘라서 말린 찬차의 방식을 따라 살해한 세 개의 머리.

그리고 또다른 미라가 발견된다. 앞 서 발견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기이한 모습은 그에 못지 않았다...

 

P.129

지금 이 혼다 트렁크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이런 인간의 형상은 정말이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순간 마우라는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타르처럼 새까만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주름 하나하나, 알몸의 미세한 선 하나하나가 마치 청동으로 만든 듯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죽어가는 표정 그대로 보존된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진 상태였다. 입은 영원히 비명을 멈추지 않을 것처럼 벌어져 있었다.

 

 

이 모든 시체들이 가리키고 있는 다음 희생자는 너무도 명백했다. 죽은 여인들의 생전 모습이 마치 현재의 조세핀을 보는 듯 닮아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수집하는 괴물의 정체는 대체 누구인가.

 

이 책은 결코 독자의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쉬어갈 틈도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몰아가는 이야기와 거듭 발견되는 새로운 사건은 뒤로 갈 수록 점점 온 몸의 신경을 자극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숨을 내쉬게 만든다.

이런 스릴러 소설은 본 적이 없다. 작가의 정확하고도 섬세한 묘사는 상상으로 비현실적인 사건에 현실감을 부여했는데 이는 전직 의사였던 테스게리첸이었기에 택할 수 있는 직설적인 방식이었다. 이집트 고대 유물  미라, 찬차, 토탄 습지, 캄비세스의 사라진 군대... 이 새로운 소재들에 인간의 끔찍한 집착이 더해져 악녀의 유물을 만들어냈다.

중독이라는 건 이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끔찍함과 기이함에 고개를 돌리게 되면서도 결코 멈출 수 없게 만드는 테스 게리첸의 마력. 나는 아마도 그녀의 이야기에 중독된 것 같다.

 

 

 

"태양은 당신을 위해 빛나니...그 영원한 찬란함을 위해,

난 당신을 위한 불멸의 악마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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