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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364일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누구나 돌아 볼 만큼 눈부신 외모에,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주는 부유한 부모님.
세상의 모든 십대들이 바라는 꿈 같은 삶을 누리던 엘리자베스는 열여덟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죽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름을 딴 보트 엘리자베스호에서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벌이고 있었는데,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호숫가에 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니....이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죽음에 관한 아무런' 기억'도 없다는 사실이다. 허나 기억이 나지 않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물 속에 누워있는 소녀는 엘리자베스, 그녀가 분명했다. 자신이 죽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 엘리자베스의 눈 앞에 있는 그녀의 육신이 말해주고 있었다. 길고 빛나는 금발머리는 물결에 너울거리고 발에는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주신 화려한 보석장식의 부츠가 신겨져 있다. 런던의 패션쇼장에서 바로 공수된 그 부츠, 지금 자신의 발에도 그 부츠가 신겨져 있다. 머리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칠때 쯤 엘리자베스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어딘지 낯이 익는 그 소년의 이름은 알렉스다. 자신과 유치원때 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알렉스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음은 그만큼 엘리자베스와 알렉스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 속에 주목받는 삶을 살아왔던 엘리자베스는 알렉스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달리 알렉스는 그저 아무일 없이 하루가 지나길 바라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하루를 보내곤 했다. 1년 전 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까지..
엘리자베스에게는 죽음의 순간은 물론,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녀는 과거를 거슬러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알렉스는 엘리자베스의 곁에서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지켜보며 때론 잘못된 행동에 비난을 퍼붓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가 겪었던 과거의 일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의 과거를 통해 점차 엘리자베스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에 가득차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가 실은 내면의 상처를 잔뜩 껴안고 그 상처를 감추기 위해 애 써야했음을...

엘리자베스는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알렉스와 함께 지나간 기억을 되짚어보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와중에 과거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엘리자베스는 알렉스가 왜 그토록 자신을 경멸에 찬 시선으로 대하는지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된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녀 자신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뛰어난 외모를 지녔지만 지나치게 외모에 치중했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게다가 친구가 아닌 이들에겐 배타적으로 대했고, 그것이 지나쳐 무례해 보이기도 했다. 과거의 엘리자베스는 적극적으로 친구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방관했고, 자신을 떠받드는 주위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늘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겉모습을 치장하느라 바빠 다른 것엔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지난 날의 엘리자베스. 자신의 몸을 떠나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녀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지금 그녀는 죽어 있고,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들을 바로 잡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확인한 냉혹한 현실에 좌절한다. 자신 없이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던 세상은 평온하기만 하고, 사랑했던 이들이 그녀의 죽음 뒤에 보여 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영원토록 슬퍼할 줄 알았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의자매인 조시는 엘리자베스의 장례식날 그녀의 남자친구 리치와 키스를 나누고,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가 죽기 전부터 리치와 몰래 만났던 사이라 이야기한다. 게다가 믿었던 친구들마저도 자신의 방에서 옷과 물건들을 가져가기 바쁘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이 모든 일들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도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진 엘리자베스는 알렉스의 도움으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흩어진 단편과도 같았던 기억들을 주워모아 퍼즐을 완성한 엘리자베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직면한다.
엘리자베스가 찾아낸 기억의 조각들은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일들이었지만 그녀는 이제 더이상 예전의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된 그녀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지 이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이 책은 로맨스소설의 탈을 쓴 추리소설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철부지 소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청소년소설 같기도 했다. 또한 책을 읽는 내내 재미난 하이틴 영화를 보는 듯 하면서도 죽음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어 그런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한마디로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라고 표현하면 설명이 될까. 나는 청소년 문학을 좋아한다. 외적으론 완벽한 어른에 가깝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내면의 인물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때문에 소설 속 엘리자베스의 모습에 혀를 차다가도 연민에 사로잡혀 그녀의 앞날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길 간절히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엘리자베스의 과거로의 여행에 동참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 다니다보니 어느덧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마치 엘리자베스와 알렉스, 나 셋이 함께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책을 덮고 난 뒤 부담없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것 같으면서도 약간의 여운이 남았던 까닭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청난 반전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추리소설도 아니었고 애초에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읽는 동안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이에 대한 실망은 없었다. 이 소설을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가 돌아 본 삶의 모습에서 독자가 무언가 발견하길 기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 탓일까. 엘리자베스의 비밀에 한걸음 가까워 질 수록 가슴이 먹먹해졌으니 말이다.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즐거움 못지 않게, 많은 생각이 들었던 이야기 '열일곱,364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