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능력과 잊는 능력.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애틋함. 아픔과 수치의 뫼비우스의 띠. 좋은 기억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 스몰월드. 작은 세계. 조그만 세계. 무해하고 상냥한 얼굴로 남아 있는 어떤 단어. 그리고 2022년에 열한 살이었던, 지금은 마흔일곱의 남자.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린 아침 출근길이 매우 특별해진 이유는 이 책 때문이다.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
열한 살의 내 머릿속에는 더 많은 작고 구체적인 사항들, 이를테면 그날 놀이 매트에 남아 있던 스티커 자국, 줄지어 놓여 있던 색색가지 블록들의 순서, 불그스름한 저녁 하늘이 검푸른 밤하늘로 바뀌어갈 때 엄마가 곁에 있는데도 혼자 남은 기분이 들면서 울고 싶어졌던 마음 같은 것들이 압축되지 않은 채 들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찰나라 할 만큼 짧은 순간에 매여 있으면서도 하나하나가 오직 나에게만 존재하는 의미를 엄연하고 묵직하게 품고 있다는 사실을, 열한 살의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 <개인적 기억> 중, 33쪽
이 책에 밑줄 친 부분을 모아보니 이렇다.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려면 위험하게 살아야 해, 키에나.˝ 117쪽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121쪽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꼭 행복해져야지.` 하는 그런 다짐은 했어. 172쪽`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 184쪽
나오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다쓰로를 이 세상에서 제거하고 그것을 은폐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치 추리작가처럼 매일 그 생각에 푹 빠져 온갖 방법을 모색했고 게임처럼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왠지 연애와 비슷하다. 좋아하게 된 사람에 대한 것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과 똑같았던 것이다. - 오쿠다 히데오, [나오미와 가나코]이 두 여자를 내내 응원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난할 수도 없이 조마조마하게 따라다녔다. 후반부는 훅 한숨에 내달리는데 제발 잡히지마 하는 마음뿐.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유머 대신 치밀한 묘사를 장착한 재미있는 소설이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리아케미라는 중국인 여장부가 좀더 부각되지 않을까 상상한다. (다쓰로 얼굴로 왜 정준호나 류시원이 떠오르는 거냐. 싫어서 그런가봐.) 책도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