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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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디서 타자기를 볼 수 있을까.

배수아의 몇몇 소설에는 타이프라이터가 등장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타자기의 이미지는 장정일의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 전 장난삼아 타자기를 쳐보았던 기억도 있다. 쉽게 수정되지 않는, 탁탁탁 글씨가 찍히는 소리와 한 줄을 완성하고 다음줄로 넘기는 그 순간이 좋아 시도 베끼고 친구에게 보낼 편지도 썼는데.

타자기 시대가 가고 워드프로세서,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도 폴 오스터는 이 타자기만을 고집한다. 노랑이라고, 원시인이라고, 보수적이라고 핀잔을 들었지만 그는 이렇게 응수할 뿐이다.

"그들에게 좋은 것이 반드시 내게도 좋은 법이라고는 없는데, 무슨 이유로 내가 있는 그대로도 완전히 행복할 때 변화를 해야 할까?"

폴 오스터가 사반세기를 함께한 서독 출신의 올림피아 타자기란 친구에 대한 이 짧은 글은 샘 메서의 인상적인 그림으로 한결, 아니 전적으로 돋보인다.

왜냐하면 샘 메서는 단지 '물건'이었던 타자기에 '개성과 품격'을 부여해서 '나름대로의 기분과 욕구'를 가지도록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샘 메서에게 타자기는 무어라 말을 했고, 결국 아름다운 인격체로 거듭났다.

글을 '너무' 짧지만 결코 허무하지 않다. 한 대의 타자기가 페이지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그 그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달의 궁전' 같은 작품도 이름으로 갖고, '핑크 올림피아' '사치'처럼 섹시해지기도 했다. 파리, 도쿄, 로스앤젤레스, 뉴욕, 애리조나 등 많이 옮겨다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분이 묘했던 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폴 오스터의 소설 '거대한 괴물' '뉴욕 3부작' '폐허의 도시'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가 바로 이 올림피아가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나의 타자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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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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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이 연출해서 화제가 된 영화 <빅피쉬>의 원작 <큰 물고기>를 먼저 읽다.

 

영화에는 악동 팀 버튼의 시각적 상상력이 아주 충분히 반영되었다면 원작은 시적이고 여운이 많다.

 

가족, 특히 부모자식 간의 감정만큼 복잡 미묘한 게 있을까. 가장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애정만큼 증오도 강력하고 때로는 질곡이 되기도 하고 삶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이 소설의 아버지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보기 힘든 유형인 듯하다. '유머러스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데-다소 영웅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의한 것이므로-방랑벽(우리 식으로 말하면 '역마살')을 가진 그는 결코 비장하지 않다.

 

누구의 아버지는 '종'이었고, 누구의 아버지는 '신(神)'이며 누구의 아버지는 부재하고, 또 누구의 아버지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윌리엄에게 아버지 에드워드는 어떤 존재였을까. 조금은 허황되고 사람만 좋을 뿐 비현실적인 사람이었겠지. 삶의 모범이긴 보다는...

 

사실 이 작품은 아버지나 가족의 사랑을 테마로 했다고 읽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잠시 인간의 육체를 빌려 이 세상에 왔다가 본연의 모습을 돌아가 그 무엇의 이야기라는 편이 적당할 것 같다.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랫동안 소통을 하지 않던 부자가 생의 마지막 순간 앞에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나로서는 곧 닥칠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역시 젊은 시절엔 매일 아침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갔을 것인가. 그리고 에드워드처럼 어딘가로 돌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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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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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품들은 대개 외롭고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빠지곤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억지스럽거나 거북스럽지 않다. 오히려 더욱 현실적인 상황이 되기도 하고 삶의 우연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는 갑자기 사라진 사람에 대한 책(헥터 만에 대한 짐머의 연구서)과 죽음을 담보로 담긴 회고록(샤토브리앙)과 세상에 나타나지 못하고 불타버린 원고(엘머가 쓴 헥터 만의 자서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기록한 책(바로 이 책. 그러나 짐머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허구이자 현실이며 환상이자 실체가 된다.

실존과 사라짐, 삶과 죽음에 대한 폴 오스터의 깊어진 통찰이 엿보이고 어느 한순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올해 이 작품으로 시작하게 되어 행복하다.

'사람들은 곤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샤토브리앙 회고록에서 다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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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인은 유혹에 약하다 - 위기를 맞은 커플들의 현명하고 아름다운 선택
한스 옐로우셰크 지음, 신혜원 옮김 / 열대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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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를 넘어서면 이십대 때와는 달리 남녀 관계, 연애가 다소 무거워지고 심심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더 성숙해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은 또 아닌 듯싶다. 여전히 관계는 '사랑'과는 별도로 어렵고 버거운 일이다.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이 책을 서슴없이 집어들어 내용을 훑어보았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선정적이거나 지나치게 가볍게 '외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다양한 '인간 관계'를 말하는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하는 내 친구들에게 권할 수 있는 책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책에는 세 가지 타입의 커플-'삼각관계'에 들어선-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전 동거를 거친 신세대, 전통적인 부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들로 우리가 직간접으로 겪을 수 있는 모든 관계의 총체이다. 이들이 어떤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어떤 식으로 삼각 관계에 들어섰으며 어떤 식으로 고통을 받았고 어떻게 해결(?)했는지가 전개된다.

시쳇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다른 커플들의 삼각 관계나 '바람난 사람'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본인들에겐 굉장한 혼란이자 어려움일 것이다. 일부일처제라는 다소 배타적인 제도 안에서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또다른 사랑을 꿈꾸는 것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 이 책은 '용감하게' 위기 상황에 뛰어든 이 세 커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가장 인상 깊게 읽고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4장 '삼각 관계와 성장 스토리'였다. 마마보이와 파파걸, 사랑스러운 소년과 영웅, 공주와 유능한 여자 등 내 자신이기도 하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을 통해 우리가 상처 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다른 관계에 뛰어들게 되는 배경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자신을 돌아보고 미처 알지 못했던 잠재적인 상처를 깨우치게 한다.

이 책은 도덕적인 교훈을 주지 않는다. '순간의 잘못을 뉘우치고 안정된 가정으로 돌아가라'고도, '주체적인 사랑이 중요하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라'고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자기 몫이니. 다만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신을 사랑하고 그만큼 상대방을 사랑하여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금물인 것도 물론이다.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파트너와 건강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함께 읽을 만한 책이다. 서로 생채기만 남기게 되는 관계를 미연의 방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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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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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이라니, 그것을 믿지 않은지 오래다. 하지만 나 역시 가끔은 그 판타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꿈꾸기도 할 것이다.

젊은 작가의 첫 창작집을 읽었다. 대체로 스피디한 진행, 도발적이라 할 만한 소재, 신선한 문체가 쉽게 읽힌다. 물론 다소 구태의연하고 이전 선배들에서 크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면도 눈에 띄지만 이후 작품을 기대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집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다. 그들은 남성적이고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되바라지고 순결하지 못하고 나쁜' 여자들이지만, 충분히 위협적이고 위험한, 그래서 '바람직하다'.

역시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제일 좋았다. [순수]나 [무궁화]는 좀 식상하다 싶었고 [소녀 시대] 등은 그저 그랬지만 [신식 키친]이나 [이십세기 모단 걸] [홈 드라마]는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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