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금요일에는 공교롭게 일이 없어 쉬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게 보통이다. 미뤄둔 책도 끌어당기고 더러 TV도 보면서 소일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으레 전화가 없기 마련인데(사실 걸려온 전화도 고의적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난 금요일에는 모두 합쳐 세 통의 수신을 치렀다(?).


첫 번째 통화는 가족 여행 차 2주 동안 중국에 다녀오신 선생님이 점심이나 들자며 불러내는 내용이었다. 무슨 바람이 나서 점심까지 사주신다고 부러 불러내시나 했더니 중국가기 직전에 선생님이 연구 논문을 쓰실 때 자료 조사와 허드렛일을 몇 차례 도와드렸던 게 못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 일이 연구원 보조금이 어느 정도 지원이 되는 사업이어서 나도 의무감 반, 아르바이트 하는 마음 반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내가 그러모은 자료가 시원찮았는지 아니면 중간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연구원 보조금이 출납이 안 돼 나는 그저 손을 털고 일어나야했다. 약간의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 사정 쯤 이해 못할 것도 없어 기억에서도 지워두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내내 마음이 쓰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성북동인지 삼청동인지 모르겠지만 한 상 반듯하게 나오는 식당에서 정식을 얻어먹었다. 선생님은 밥을 먹으며 여행 다녀오신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으셨고 나는 곁에서 추임새나 몇 마디 거들며 낯선(?) 음식들을 바지런히 집어 먹었다. 밥을 먹고 난 뒤 선생님은 예고도 없이 나를 차를 태워 서울산성 꼭대기까지 데리고 올라가 자판기 커피가 아닌 노점에서 아주머니들이 좌판을 차려놓고 파는 커피까지 사주셨다. 아까 한정식 집 차림표에 ‘찌개’가 ‘찌게’로 잘못 적혀있었다는 둥 당신은 학기보다 방학이 훨씬 더 좋다는 다 알만한 말씀도 싱긋싱긋 웃으며 건네는 둥 그럭저럭 괜찮은 점심 풍경이었다.


두 번째 통화는 예전에 내가 잠깐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모르는 번호였다면 받질 않았을 텐데 예전에 내 전화기를 가져가 이것저것 눌러대더니 그때 자기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천재지아ㅋ’라는 수신자가 화면에 뜨는 걸 보고 뜬금없었지만 반갑게 받았다. 아이는 곧 설인데 잘 지내시느냐는 기특한 말을 건네왔다. 그예 나도 이제 고3이 되어 한참 힘들 것 같아 "공부 열심히 하고 힘내"라는 다소 뻔한 말을 하던 참이었다. 내가 연이어 “지금 학원 다니고 있니?”라고 묻자 아이는 눈치 챌 만큼 목소리가 흔들렸다. 실수였다.

가르치면서도 흐뭇한 마음이 들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고 명민했는데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 전에 다니던 학원도 그만둘 정도였단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천성이 밝은 아이였지만 넉넉하던 집안이 갑자기 스러져 요즘 아이로서는 어울리지도 않는 장녀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을게 분명했다.

“학원은 다니지 않는데... 방학 보충수업 비가... 굉장히... 비싸요. 논술만 해도 한 달에... 20만원이고 몇 과목 더... 들으면 웬만한... 학원비와 맞먹는 걸요.” 라는 짧은 문장 속에 몇 번의 침묵과 훌쩍거림이 섞여들었다. 공부도 잘해 집은 강남이 아니었지만 학교는 강남 사립고를 다니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지만 강남 쪽은 학교 보충수업비도 만만찮은 모양이었다.

그 전날 나는 희한하게도 우는 꿈을 꾸었다. 처음이었다. 원래 꿈을 잘 꾸지 않는데다가 그날은 꿈속에서도 이게 꿈이라는 건 알겠는데(나는 간혹 꾸는 꿈 속에서도 ‘이건 꿈이야’라고 인지한다) 내가 왜 우는 줄을 모르겠는 거다. 꿈 값 치고는 뼈아픈 전화였다.     


세 번째 통화의 수신자는 ‘울지말고강해져’였다. 나는 ‘레터링’이라는 이동통신사의 무료서비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건 내가 저장해 놓은 이름이 아닌 발신자가 정해놓은 이름이 화면에 뜨기 때문이다. 자주 통화를 하는 사이면 금방 누군지 알겠지만 낯선 레터링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일례로 짓궂은 친구 녀석의 레터링은 ‘노량진경찰서’였다. 

여자 후배였는데 대뜸 하는 일이 고되다는 푸념이었다. 원래 그런 내색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이었던 데다가 사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눌 만큼 그 후배에게 나란 존재가 앞 차례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오죽이나 했으면 나한테까지 전화를 꾹꾹 눌렀겠냐는 생각을 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일이 힘들고 사는 것 자체가 두려운 사람이 한 둘이겠냐 마는 곁의 사람들만은 나쁜 것들이 조금 비껴갔으면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울지말고강해져’라는 문구 속에는 더 많은 말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말을 적어 넣기 까지 겪었을 수많은 고초를 헤아려 보니 ‘레터링’을 덮어놓고 싫어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자신의 심사를 명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없겠다.


밥과 꿈과 일에 관련된 전화 세 통 덕분에 모처럼 쉬는 금요일 하루를 말끔하게 소진해버리고 말았다. 팔과 다리가 부러지면 병원에 가듯 마음이 패이면 전화 통화가 약이 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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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2-1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네요.
그래도 레터링은 참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나비80 2007-02-10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심한 맛이겠지요^^

짱꿀라 2007-02-1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아주 친근감 있게 저에게 다가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역시 글을 쓰시는 분이라서..... 저는 오늘 보문산성 답사를 갔다가 저녁 9시쯤에 들어왔습니다. 오랫만에 큰 지역을 돌고 와서 그런지 힘이 드네요. 주말 잘 보내시고요.

나비80 2007-02-1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 답사는 한 나절쯤 걸리시더니 오늘은 많이 늦어지셨군요.
날씨도 추웠는데 고생스러우셨겠습니다.
그래도 고깟 추위가 산타님의 눈과 마음의 뿌듯함을 당해낼리 있겠습니까.^^

마노아 2007-02-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갈한 느낌이 드는 글이었어요. 제 마음도 차분하게 정리가 되네요. 주말 잘 지내고 계시죠?

로드무비 2007-02-1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터링이란 게 있군요.
'울지 말고 강해져' 같은 제목은 좀 거시기하지만
재밌네요.^^

나비80 2007-02-1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 저렇게 금요일을 보낸 대가로 지금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님/ 역시 구세대시군요.ㅋㅋ 별게 다있답니다. 가장 최근에 본 엽기적 레터링은 어느 여성분의 '공주님의대화신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