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문답 - 시대의 이상과 운명에 답한 조선의 자화상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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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자 누구인가

안견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1447년 안평대군은 꿈에 박팽년과 더불어 복숭아밭에서 노닌 황홀한 꿈을 꾸고 안견에게 이를 이야기해주면서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하였다

 

그림은 38.7× 106.5cm 비단 바탕의 수묵담채화로 보통의 동양화 두루마리와는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왼쪽은 현실 세계이고 오른쪽은 꿈 속의 도원 세계인데 현실 세계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그렸고, 도원의 세계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현실 세계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린 듯한 느낌이고, 왼편의 도원 세계는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안평대군의 발문부터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서거정, 최항, 이개, 성삼문 등 당대 최고의 사대부 20여 명의 찬문(칭찬하는 글)이 친필로 붙어있다. 이로 인해 이 [몽유도원도]는 그림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학과 서예적 성취를 알게 하여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안평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최고의 명필로 꼽혔다. 조선 초에는 그의 서체가 큰 유행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몽유도원도 발문이 있다

 

1453(단종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이때 안평대군도 지지기반을 잃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받아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안견 화원 출신으로 세종 때 도화원(圖畵院) 6품인 선화(善畵)에서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하였다. 조선시대 화원은 최고 종6품까지 올라가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이것을 깬 최초의 인물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1447(세종 29)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고 이듬해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를 그렸다.

 

안견은 1464년에 아직도 화원으로서 세조조에 기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안평대군이 사사된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해로부터 11년 뒤의 이야기이다. 안견이 이후로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안소희(安紹禧)에 관한 기록에 의거해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아들 안소희는 정6품직인 성균관의 전적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화원의 아들이기 때문에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공적에 힘입어 원칙적으로 사대부 가문 출신에게만 열려 있던 문과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안견은 안평대군의 사후에도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몸담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런 지장 없이 활동을 계속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계유정난을 당하여 안평대군은 공자의 귀한 몸으로서, 문화(文華)를 크게 아끼고 한묵(翰墨)을 스스로 좋아하며 당대의 명류들과 널리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를 흠앙하고 부러워하며 뜻을 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안견도 역시 화기(畫技)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정말로 뛰어난 화가로서 안평대군이 특히 그를 아껴 잠시도 그 집 문밖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안평대군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평대군이 북경의 저자에서 용매먹[龍煤墨丸]을 구입하였기로 안견을 급히 불러 그 먹을 적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마침 안평대군이 일어나 안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용매먹이 간 곳 없었다. 안평대군이 종과 시비들을 다그치니 계집종들은 스스로 변명하며 안견에게 혐의를 두는 것이었다.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스스로 밝히려 하였으나 먹이 홀연히 그의 품속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안평대군이 별안간 노하여 그를 꾸짖어 내쫓고 다시는 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있다가 달아나 물러간 후 집에 돌아가 숨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이 드디어 떠들썩하게 일세에 전하여졌더니 조금 있다가 안평대군이 큰 화를 만나서 그의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연루되어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안견만이 홀로 그 화를 모면하게 되었던 것이니 사람들이 비로소 이를 기이하게 여기게 되었다.

 

! 덕을 품고도 행실은 더러워 스스로 세리(勢利)의 화염(禍剡)을 면하였구나. 이것은 고인(古人)들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안견이 홀로 능히 하였다. 이것이 어찌 또한 일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괴이하게 홀로 행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을 내가 들으니 아마도 안견은 비단 그림에 대한 재주만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높은 식견과 멀리 미치는 생각과 가볍게 볼 수 없는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것으로써 이 세상에 놀고 그 예술에 몸담았던 것인지. 이것을 가히 알 수 없도다. 나는 진실로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보니 그 수석(水石)이 푸르고 멀며 풍연(風煙)이 잔잔하고 희미하여 비록 간일(簡逸)하고 소탕(疎蕩)하지만 돌아보건대 스스로 사람들이 쉽게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어찌 또한 그림의 형상도 그 그린 사람이 그러한 때문일까. 이것을 기록하여 여러 호사가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하촌(夏村)의 병우(病寓)에서 쓰.

 

이 기록은 비록 안견이 활동했던 시대보다 약 2세기 뒤의 것이지만 당시에 구전되고 있던 것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만으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짜임새가 있어서 신빙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기록으로 보면 안견은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고 판단하는 기지를 지녔고 머리가 명석하고 두뇌 회전이 빨랐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지와 빠른 판단이 자신을 계유정난에서 구하고 오래도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안견이 이처럼 머리가 좋고 기지가 뛰어났음은 <몽유도원도>의 구성과 표현에서도 엿보인다. 백호전서의 기록에서 또 한 가지 크게 주목되는 것은 안견이 계유정난 전까지 안평대군과 얼마나 가까웠나 하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하여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에 힘입어 더욱 대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계정사 조선 시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세운 정자. 안평 대군이 도원(桃園)에서 놀던 꿈을 꾼 뒤 한양의 북문인 창의문(彰義門) 밖에 이 정자를 세우고, 1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선비들과 시를 짓고 교류함. 안평대군이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은 뒤 이 곳도 폐허가 됨.

 

느낀점 : 안견에게 분명 안평대군은 소중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에 힘입어 더욱 대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릴 때 분명 안견은 그 꿈속에 있는 듯 사흘 동안 그림을 완성하였다. (p38 어쩌면 이 순간이 나의 꿈이 었는지 모르겠다. 꿈을 꾼이는 분면 대군일진대 그 말씀처럼 대군의 꿈을 내가 모두 가져왔을까. 아직도 그의 꿈에 젖은 듯, 스치는 꽃향기가 몽롱했다. 꿈을 꾼자 왕자인가 아니면 그 앞의 한 화가인가) 안평대군을 섬기며 성장해가는 안견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안평대군이 위험해 처한다. 안평대군의 꿈에서 함께 노닐던 사람들은 일찍이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선 신숙주를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고 만다. 안견은 꿈을 함께한 자가 아니라 그저 꿈을 그린자로 그 사건을 비켜 간다. 안견은 끝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살아간다. 안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 또한 안견처럼 그 상황을 빠져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또 자신을 믿고 신뢰하고 성장시켜준 대군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 또 용서를 구하고 싶은 죄책감이 함께 하지 않았을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자신은 그 흐름의 물살을 잘 헤엄쳐갔지만 그 마음은 분명 괴롭고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 그 과거의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지도...

 

 

자아

나는 누구인가

윤두서 [자화상]

현종 9(1668)에 녹우당에서 태어나서, 숙종 41(1715)에 역시 녹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고 호는 공재(恭齋)이다. 숙종 19(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남윤씨는 윤선도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다. 그는 평생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고 선비 화가로 유명해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다.

 

윤두서가 살던 시기는 대략 숙종 재위 기간(1675~1720)과 겹친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동을 거치면서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각성과 모색이 싹트던 때였다. 이 때에 활동한 윤두서였기에, 그의 그림에는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그림 속에 비로소 조선의 인물과 조선의 생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 우리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도사의 옷차림, 시중드는 동자의 머리 모양 등은 거의 중국풍이었고 소 그림에서도 우리나라에 없는 남양 물소가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윤두서의 나물 캐는 여인에 등장하는 아낙들은 바로 수건을 머리에 쓴 조선의 농촌 아낙이고 밭 가는 풍경에서는 예전이라면 신선이나 앉아 있었음직한 산수 속에서 조선 농부가 조선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다. 짚신 삼기에서는 휘늘어진 나무 밑에 도사가 아닌 맨상투 바람의 조선 남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열심히 짚을 엮고 있다. 이 그림들은 18세기 중후반에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하는 풍속화를 예시한다.

 

이 그림들에서도 산수는 여전히 예전의 관념적 화풍을 따르고 있으나, 그 속에 현실을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로써 윤두서의 그림들은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상징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중기의 막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첫 사람이었다.

 

오늘날 윤두서의 이름 앞에 늘 붙어다니는 선비화가라는 수사는 그를 다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선비화가라는 단순한 규정에서 빠져 버리는 그의 모습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이며 실학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있다. 해남 집 유물전시관에 있는 지도나 기하책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옥동 이서 등 자신과 마찬가지로 출세 길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틀에 박힌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윤두서는 옛 책들의 내용을 모두 널리 꿰뚫고 그 극치를 추구하였고” “백가(百家)의 뭇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원리와 응용을 연구하였으며 천문은 각 지방을 두루 답사하고 밤마다 돌아다니며 관찰하여 천체의 이동 현상을 살피었고” “천문을 측량하고 땅을 재는 법을 경험적으로 증명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는 병서(兵書)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패관소설도 모두 읽어 지식을 넓히는 데 도움을 얻었고, 또 중국 지도와 우리나라 지리서의 내용을 모두 간파하고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실학자 성호 이익은 윤두서의 제문을 쓰면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익과 같은 학자가 나오는 데는 윤두서와 같은 선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두서는 그림 그리는 데서도 사실성을 추구했다. 사람이나 동물 등을 그릴 때면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대상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그려내야 만족하는 그의 자세는 자화상(국보 제240)에서 잘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듯 화면 가득히 얼굴만이 그려진 자화상은 양식에서도 전무후무하며 묘사의 기법도 훌륭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그림이 아니고 윤두서 자신이다. 고작 가로 20.5, 세로 38.5의 작은 종이 위에 그 한 사람의 무게가 다 실려 있는 것이다. 화면 밖의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 마주 보는 사람을 송구하게 만드는 강렬한 눈은 그의 내면을 담고 우울하고 강건하게 타오른다. ‘이 사람 속에서는 무언가가 끓고 있구나.’ 이상은 높되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진사가 된 26세 이래 20년 동안 줄창 이어진 집안의 상사(喪事)를 종손으로서 감당하며 그는 그렇게 안으로 타야 했던가 보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광활한 세상으로 휘달리고 싶었음인지, 윤두서는 말 그림을 즐겨 그렸고 또 잘 그렸다. 버드나무 밑에 선 백마」 「뒹구는 말, 중국의 유명한 말들을 그린 팔준마도등 훌륭한 말 그림들이 그의 해남 집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화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는데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그 집안 사람들이 본인이 살아 온 것 같아서 모두 울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인물의 겉모습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의 사람됨까지 그려 냈음[傳神寫照]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1713) 서울 생활을 완전히 털어 버리고 해남 집으로 돌아왔고 2년 후에 48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그의 큰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도 그의 화풍을 이어 그림을 그렸다.

 

p133 행장이 실득을 이야기하더군 생각해보니 내 삶의 지향이 바로 에 있었던가 하오

 

느낀 점 : 윤두서의 자화상은 생긴 그대로 파격적이었다. 화폭에 담긴 얼굴의 크기와 그 세밀한 묘사, 당장이라도 살아서 튀어 나올 것 같은 형상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화선지에 하나 가득 자신의 얼굴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그동안 보았던 전신의 초상화 그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파격에 가까운 새로운 시도로 보였다. 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의아했다. 그의 행적들을 보니 조금씩 이 그림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기하학, 천문학, 병서, 지리학과 패관소설(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까지 그는 현실에 기반한 학문들을 공부하고 실득을 지향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두서는 사실성을 추구했다. 사람이나 동물 등을 그릴 때면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대상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그려내야 만족하는 그의 자세는 태가 지니고 있는 특징, 개성, 사실 등이 파악이 될 때까지 지켜보고 특성을 잡아내고 관찰하고 내면을 완전히 파악한 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삶의 철학이 그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윤두서는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남윤씨는 윤선도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맞서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중국풍의 신선이나 동자가 아니라 조선의 농촌과 아낙네 조선의 소와 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관념적 화풍을 벗어나, 그 속에 현실을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렇게 윤두서는 자신의 자리에 당당하고 기품있게 서 있다. 그의 모습이 그의 자화상이 장대하게 우뚝 선 북한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도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길을 꿋꿋하게 나아가고 싶다.

 

풍경

그 달밤을 보았는가?

김홍도 [소림명월도]

 

p171 산수가 일종의 이상화된 자연이라면, 풍경은 현재 화가 앞에 펼쳐진 특정한 자연에 가깝다. 풍경화와 달리 산수화는 서구적인 원근법으로 따지기 어려운 독특한 시점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산수화 속 화가의 시점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산 위에서혹은 앞에서 혹은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 전체를 화면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p171 진경산수 창작의 기본 역시 산수로서의 접근이었다. 산수 속의 진경은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의 표상이었으며, 그리는 시점 또한 전통적인 방식에 기댄것이었다.

 

p171 [소림명월도]는 전통 회화에서 산수가 아닌 풍경의 시선으로 대상을 마주한다. 그것은 화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었으되 이전까지 누구도 그림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상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달밤을 그림으로 옮겼으니 이야말로 하나의 사건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p172 시점또한 전통적인 산수와 달랐다. 서구의 풍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일시점으로 그려졌다. 이미 절정에 선 화가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새로운 절정을 묻도 있었으리라, 그 달밤을 보았느냐고, 이제 그 달밤이 그림이 될 수 있겠느냐고.

 

p172 화려하지도 장대하지도 않은 화면이건만 단순한 구도를 살려내는 이 유려한 필묵이라니 소품의 매력을 아는 대가다운 면모다.

 

p197 나의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는 붓을 든 자로서의 소망 때문이었던 거야. 내 외로움에 내 스스로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p197 주위가 갑자기 낯설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아무리 이 길을 아름답게 채워넣는다 해도, 내가 만들어낸 길은 아니지 않은가.

 

p204 그저 밤이 내리는 순간을 맞고 있을 뿐이었어. 나를 적신 것은 그 몽롱한 대기의 한숨이었을까. 아니 견딜수 없도록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갈증이었을 거야.

 

나는 그저 달빛에 취해있었지. 제법 아름다운 밤이로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로구나.

 

아무것도 아닌 광경

이 순간을 남기고 싶었어.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이순간은 그저 내 마음의 모습일터이니 달 하나에 나무 몇 그루, 그것으로 족한 밤이 있는 것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여 무엇하겠나. 밤에 취하듯 달에 홀리듯 그렇게 붓을 들었다네.

 

p207 누구든 이름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금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p207 절경을 찾아 금강산을 오르던 발길이야말로 참으로 흥겨운 것이었지. 하지만 어느 밤 내 집앞을 비추던 달빛 또한 그 감흥에 못지않았다네.

 

p213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이였다.

세상은 아직 모를 것이나 언젠가 그 밤이 빚어낸 놀라운 그림 이야기를 알아주는 때가 올 테지.

 

p214 나의 금강은...... 바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고

이제 내가 다시 예전의 산수로 돌아간다 해도 가벼이 걸어갈수 있을 것 같군 그 달밤...... 내가 갈수 있는 길은 거기까지였을 테니까. 다음 시대의 화사들은 또 다른 꿈으로 저마다의 달밤에 이르는 길을 찾겠지.

 

p216 그런데 말이야 나에게는 있으나 겸재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혹시 알겠는가?

바로...... 겸재야.

 

느낀 점 : 성공이란 건 그런 건 줄 알았다. 대단하고 화려하고 누구나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어떤 위치나 명예를 갖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을 이루어야 인생의 성공이고 인생의 목표에 다다르는 길이라 여겼다. 그래서 일상은 늘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너무도 당연해서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어도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날 숨 쉬게 하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는 쪽이 더 맞았다. 하루의 소중한 일상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이루게 된다는 것도 함께 무시되었다. 소림명월도를 보았을 때, 곡운구곡을 보았을 때처럼 아주 소박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행복은 그 모든 과정 안에 있었다. 내가 취하거나 획득해야하는 무엇이 아니었다.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 소중함을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와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 그림을 만난 후,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소림명월도와 같았다. 밝은 달빛, 밝은 가로등, 공원의 들풀, 그곳에서 귀를 팔랑대며 뛰어가는 루이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김홍도의 시선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에 감사하다. 김홍도의 작은 그림 하나로 나의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눈이 떠진다. 이것은 환희이고 기적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이였다.

세상은 아직 모를 것이나 언젠가 그 밤이 빚어낸 놀라운 그림 이야기를 알아주는 때가 올 테지.

 

미감

아름다움이 이유여도 좋을까

조희룡 [홍백매팔폭병]

 

조희룡에 이르러 담담한 묵매 위주의 조선 매화 그림이 비로소 다양한 색채를 입기 시작한다.

조희룡은 당시 예단의 권력인 김정희의 문인화 이론에서 다소 비껴가듯 손의 수련을 중시하는 수예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바람

조희룡(1789~1866)

19세기 혼란스러운 형국-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정치

회화 수준 쇠퇴

18세기 회화의 힘- 사회의 다양한 가능성/ 화가의 자각/ 새로운 시도

 

추사 김정희(1786~1856) ‘완당 바람’ -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청의 학문에 열광적 몰두

文字香書卷氣(문자향서권기) :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

Vs 조희룡의 수예론 : 화가의 재능과 숙련된 기량의 중요성

중인계층의 예술적 자각

신지식유형의 화가 등장- 근대적 의미의 전문화가

전기(1825~1854) 갈필의 산수

김수철-현대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색감

허유(1809~1892) 전통적 느낌의 남종화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저 아름답기만한 그림에 깊이가 있는가. (속됨?)

 

그림의 주제가 감동의 조건이 아니다. 먹이냐 색이냐의 문제도 아와 속을 논하는 본질이 될 수 없다. 핵심은 주제를 대하는 화가의 생각과 기량.

 

조희룡의 [매화도] - 아름다움이 존재의 이유

한 시대의 새로운 미감

 

p257 냉담한 듯 날카로운 것이 그의 눈이 지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p265 그는 나의 속됨을 저어했으나 나는 그의 그림이 이념에 갇힐까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림의 속됨에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속이야말로 그림이 떨어져서는 안될 마계라 여긴다. 하지만 무엇이 아고 무엇이 속인가 한 시대는 그 시대가 지닌 저마다의 색체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속되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그림이 한 시대를 알리는 새로운 고아함으로 사랑받게 될는지 또 어찌 알겠는가.

 

느낀 점 :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취향기와 조희룡의 수예론이 대두된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문자향 취향기를 추구하는 김정희와 화가의 재능과 숙련된 기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희룡이 그 둘이다.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저 아름답기만한 그림에 깊이가 있는가? 아와 속의 기준은 누가 또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둘이 양극단에 서 있다면 서로의 양끝을 주장하는 팽팽한 대결은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분명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예술적인 감각과 기교 그 예술에 불어넣는 정신 어느 것 하나 놓을 수는 없다. 김정희의 불이선란이란 작품에서 기교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둔탁한 글씨와 단조로운 난의 모습에서 놀랍게도 그의 기개와 고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듯하다. 조희룡의 홍백매팔폭병은 정말 아름답다. 그 구도와 꽃잎들이 완벽한 우아함을 자아낸다. 그 안에 담긴 정신따윈 잊게 될만한 아름다움이다. 어느 한 쪽에서든 그 탁월함은 그 반대의 것을 잊게만들만큼 훌륭하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불이 둘이 아니고 또 다르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 커다랗고 든든한 양쪽의 기둥을 둔 웅장한 집이 결국 하나이듯 김정희와 조희룡이 결국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대립의 구도로 서있지만 기교의 아름다움이든 정신의 아름다움이든 아름다움으로 우뚝 서서 그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한국의 위인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회고

시대의 끝, 어쩌면 연민이었을까

장승업 [ 귀거래도 ]

 

장승업 (1843 ~ 1897)

장승업(張承業)1843년 헌종 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이리저리 떠돌며 자라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의 본관은 대원(大元)이며 선조는 무반(武班)이었고,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의 오원(吾園)으로 스스로 칭할 만큼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장승업은 20대 무렵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는 이응헌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며 기거하게 되었다. 어릴 적에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자를 못 배운 그는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다. 이응헌은 중국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을 지닌 여항 문인이었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 있는 원명 이래의 명인들의 서화를 접하고 그림에 눈이 트이게 되었다. 우연히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의 천재성을 확인한 이응헌은 비록 천한 신분의 하인이지만 장승업의 숨어 있는 재능을 아끼고 지속적으로 그를 후원했다.

 

장승업은 조선 초기의 안견, 후기의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불린다. 후기의 정선까지 합쳐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로 쇠락해가는 국가의 운명을 지켜보며 화가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 활동한 안견, 그리고 조선 후기 영조·정조 연간의 문화적 황금기에 활동한 김홍도와 정선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들 대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력과 고도의 세련미 넘치는 미감을 보여 주었다.

 

장승업의 명성은 궁궐에까지 알려져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제수받고, 고종의 명령으로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어디에 매이는 것을 극히 꺼려했던 그는 엄한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궁을 빠져나와 황제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민영환이 왕에게 간곡히 청하여 위기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밖에 한성부 판윤이었던 변원규,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오세창, 오경연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를 후원했다.

 

장승업의 신운이 넘치는 작품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에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의 승리였다. 그의 회화는 자칫 빈약할 뻔했던 조선 말기의 회화사를 풍성하게 살찌웠고, 우리 민족사의 어두웠던 한 시기를 정신적, 예술적으로 환하게 밝힌 빛이었다. 장승업은 1897년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느낀 점 : 장승업은 불운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고아였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좋은 주인을 만났고 좋은 스승을 만났고 그를 도와주고자 하는 좋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풍성했다. 그는 천재로 인정받고 스스로 오원이라는 호를 칭할 만큼 나름의 자부심도 컸다. 그는 왕의 총애까지 얻었지만 그런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듯하다. 그의 자유로운 기질이 그의 작품에 왕성한 창작력과 고도의 세련미 넘치는 미감과 개성으로 활개치 듯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덕분에 암울한 19세기 후반의 시대를 그의 찬란한 예술혼으로 환하게 밝혔다. 천한 신분임에도 그의 천재성을 알아봐 주고 그를 후원한 훌륭한 스승과 문화계의 인사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덕분에 그는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장승업을 보면서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를 알아봐 주고 도와주려는 주변의 인물들이 빛난다. 우리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인연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또 사라진다. 장승업의 삶을 보며 장승업 하나의 인물을 보기보다는 전체를 바라보게 된다. 그 한 인물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인연들이 만나 서로 돕고 상생해간다. 나는 누구를 진실로 알아봐주고 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고 싶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고라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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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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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서론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한다.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관점으로 삼고자 한다.

고전 강독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한다.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를 걸어놓고 진행한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

우리가 걸어 놓은 화두는 관계론이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 (실체성 부여/자신을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 자기 증식 운동 /자본 운동/배타적 독립성/ 개별적 정체성)

동양 사회 구성원리 관계론-관계망으로서 존재/ 관계론적 구성원리(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이다.

 

서양의 근대문명은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한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한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

 

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 자연 인간 인간관계 등)

동양사고는 현실주의적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소중한 가치.

 

도는 글자 그대로 이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

(진리: 일상적 삶 속에)

서양철학 지혜를 사랑하는. (진리 ; 사색에 의해 터득)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 (self-so)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

자연은 생기의 장-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생주 이멸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음.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짐.

고도성장과 과잉축적이 생각의 장을 파괴.

 

인성이란 무엇인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이 아님.

덕성이 곧 인성. (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봄)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구조. ( 관계 = 존재 )

인성을 고양 시킨다는 것 기르는 것으로 시작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

-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 ( 成人之美)

인성의 고양이 사회성의 고양.

 

오래된 시와 언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 사실성과 진정성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소박한 민중의 삶과 소망)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줌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냄 (시야를 열어줌)

자신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시경]의 정신은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줌.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이 우리 삶의 진정성)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있게 합니다. (무일 無逸- 편안하지 않음)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깨달음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

 

[어부] 굴원의 시-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갈등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 비타협적 엘리트 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 재조명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 과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 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

 

느낀점: 시경은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로 소박한 민중의 삶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민중의 삶의 애환 시경의 정신은 피상적이거나 허구적이지 않다. 현실에 발이 닿아있다. 삶의 정서와 공감을 기초로 하는 사실성과 진정성에 마음을 울린다. 또한 시적관점은 광범위한 관계망을 드러내면서 시야를 열어준다. 나의 협소한 체험을 세계를 부단히 넓혀가고 싶다. 또한 무일이라는 단어가 내게 필요하다. 편안하지 않음(무일), 그동안 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더 많이 더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무일을 조금씩 실천해가고 싶다.

 

 

 

주역의 관계론

[주역] 수 천 수 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법칙성

동양 사고의 보편적 형식

판단형식이 관계론적

(관상과 수상),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 사주팔자), (선택과 판단)

대동(大同)-점괘와 백성들의 의견 조정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

춘추전국시대의 산물 (부국강병의 국정목표)

 

()과 전()

()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의 해설(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

[주역]의 경은 8, 64괘와 괘사 효사 4가지.

괘와 효는 고대문자,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

8괘를 소성괘라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

() 와 괘()

():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

(): 걸어놓고 본다는 뜻.

 

[주역] 읽기의 기초개념

양효()는 하늘 또는 남자

음효 (--)는 땅 또는 여자

==> 3개의 효로 한 개의 괘를 만듬(소성괘) ==> 소성괘 두개가 대성괘

 

8= 건괘/태괘/감괘/이괘/ 진하련/ 손하절/ 간상련/ 곤삼절/

양효가 홀수이면 양괘 , 음효가 홀수이면 음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

 

()와 응()

()- 자리 1 3 5 양효자리/ 2 4 6 음효자리 ==> 득위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실위)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김.-->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70%의 자리 강조/ 30정도의 여유

개체의 능력은 그 개체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대성괘를 이루고 있는 효중에서 2효과 5효가 이다.)

 

():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

1효와 4/ 2효와 5/3효와 6효의 음양 상응 관계를 보는 것

위의 개념이 개체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뤄내는 관계론

응은 위보다 상위개념 (ex>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이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

 

[주역]은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형태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느낀 점: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 나의 삶의 크기는 얼마만큼 일까? 아주 작고 협소하다. 그동안 작은 방구석에서 작은 거울로 나만 쳐다보고 살아온 것만 같다. 이 책에서는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또한 이 세상의 아주 작은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주역에서는 개별적 존재의 능력보다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시시 때때로 변화하고 운명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또한 좋아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빠도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 끝에는 나빠질 수도 또 나쁨이 좋아짐으로 바뀔 수 있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또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욕심을 낸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질 수 있으니 70% 정도의 자리를 강조한다. 자기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였다. 중간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늘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최고를 선호하는 나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설정해 놓은 나의 세계를 조금씩 키워가도록 노력하고 싶다.

 

[논어] 인간관계론 보고

춘추전국시대의 특징

1. 철기의 발명- 2의 농업 혁명기

2. 사회 변동기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전환

3. 제자백가의 백화제방(갖가지 학문이나 예술이 함께 성함)의 시기.

 

배움

학이시습지 습은 실천의 의미 / 시의 의미도 때때로가 적절한 시기로 읽어야./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된다.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익혀야)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만 면하려고 할 뿐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의 논리-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는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

지와 애는 함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 ()하되 사() 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 (경험적 사고)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 (현장성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뜻.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고라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지와 우에 대해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하였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의 형태.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진다.

겸손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欲) 과 무사(無私)이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 할 수도 없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을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를 안겨주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된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형식이라보다는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

 

느낀 점: 배우고 그것을 적절한 때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 또한 명심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주위 사람들은 나보다 명석하다는 것을 잊지않고 늘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맹자의 의()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

민본사상이 핵심-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

여민동락 사상(왕이 백성과 더불어 낙을 같이 나눔)-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무지.

 

성선설이 표명된 구절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의 싹이다.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

맹자는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함.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또한 성인의 문하에서 학문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진다.

 

느낀 점: 함께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더 쌓아가자. 인의예지는 내가 가져야 하는 기본 덕목이다. 측은해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모두 결여된 듯싶다. 차근차근 키워가야겠다.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근본은 자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

자연의 생성변화가 곧 도()

일체의 인위적 규재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반문화 사상.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움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는 사상.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핵심 개념은 무와 유가 같은 것이라는 선언(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

무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

 

인위는 거짓입니다. (인위, 작위 자체가 거짓: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

무위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은 것)

미와 오 선과 불선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

노자 사상의 체계에서 대립적인 것은 없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

 

유무, 난이, 고저, 장단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있다.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실천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물이 최고의 선

1. 만물을 이롭게 한다.

2. 다투지 않는다. (작위하지 않는다)

3.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

 

비어있음이 쓰임이 된다.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의 배후로써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장의 철학)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눌변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

 

()보다는 정(), (滿)보다는 허(), ()보다는 졸(), ()보다는 자()를 그리고 진()보다는 귀()를 더 높은 가치로 봄

 

느낀 점: 노자의 사상은 파격적이기도 하다. 더 낮게 더 비우며 더 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싶다.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하라는 말에서 요즘 컵을 볼 때 컵이 아닌 것을 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이 아닌 것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대상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볼펜을 보면 플라스틱 +스프링+ 잉크 등 각각은 볼펜이 아닌 것이 모여 볼펜이라는 대상이 생겨난다. 또한 플라스틱을 만드는 사람들. 잉크를 만드는 사람들. 스프링을 만드는 사람들 등 하나의 볼펜 속에 수많은 부속물들과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하나의 볼펜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인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존재를 볼펜이라 이름 붙였다. 유의 배후로써 무를 드러내는 노장 사상. 보이지 않는 무속에 신묘함을 유로써는 그 드러남을 보아야 한다. 수많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더 낮아지고 겸허지고 싶다. 신영복 선생님의 겸허함이 내게도 물드는 것만 같다. 또한 신묘한 세상을 즐기고 싶다.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 된 상태를 의미한다. 대상에 합일되어 매 순간을 몰입하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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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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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나답게 - 인생은 느슨하게 매일은 성실하게, 개정판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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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하찮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된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그게 인생이라는 것.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살아가면서 배웠다.

 

p23 에세이는 이토록 시시콜콜한 일들을 쓰는 것이로구나. 그것을 진심을 가득 담아 쓰는 것이로구나.

 

p89 나는 여전히 혼자 밥을 잘 먹는다. 내가 계속 혼자 밥을 잘 먹는 이유는 혼자 먹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가족도 있고 친구들도 있다. 그러니까 점심 정도야 혼자 먹는다고 해서 비참할 이유가 없다.

 

p99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고 어느 쪽을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은 쪽을 책임지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이 선택의 문제라면 인생은 이를테면 자장면과 짬뽕처럼 중국집의 메뉴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데 살아보면 알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생은 그냥 닥치는 건지 모른다. 닥치고 수습하는 일의 반복이다.

 

p101 내게 재능이 있는 걸까.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것 하나는 알았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접는 것이 낫다는 것. 이쯤에서 접자니 어쩐지 좀 더 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걸 시작한다고 해도 이것보다 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며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면 무얼 해야 할까.

 

p112 냉철한 현실감각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환상의 색채를 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p117 지금은 안그래도 된다는게 너무 좋다. 하루 종일 굶어서 당이 떨어진 채로 마트에 들어가면 입구에서부터 야수처럼 먹을 것들을 쓸어 담게 되지만 배가 부를 때는 새 모이처럼 먹는 여자인 듯 도도하게 쇼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p118 나이들어 가장 좋은 것은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기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전전긍긍할 이유도 줄었다. 물론 지금도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괴로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필사적인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남편이 있고 애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있는그대로 의 나 좋아하고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말이다.

 

p125 펜만들면 아름다운 문장이 빵처럼 구워진다고? 그런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이 세상의 작가들은 모두 온갖 유혹과 괴로움과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 수 있는 불굴의 의지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가지 쓰고 또 쓸수 있는 사람들, 엉덩이가 지독하게 무거운 사람들이라고.

 

p126 우리는 사실 별로 잘하는 것이 없는 인간들인지도 몰라.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없을거고 대단한 사람이 될수도 없을 거야. 그래서 순간순간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p133 아낄 줄 모르는 마음은 자꾸만 새것을 찾게 만든다. 무얼 얻어내도 기쁘지가 않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p170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리는 당장에 무언가를 이루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될 턱이 없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려고 뜨겁게 도전하다 보면 각자가 가진 능력과 개성 자기 안의 힘이 크게 꽃피는 날이 반드시 온다.

 

p197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p197 완벽한 시간과 완벽한 장소를 기다리다면 모 아니면 도의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p199 글을 쓰기에 완벽한 장소는 없다. 단지 글을 쓰기에 완벽한 시간이 있을 뿐이다.

 

p225 다시 특별할 것도 없이 평범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추스렸다. 내가 나인 것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나는 떠났던 것이다.

 

p227 나는 이제 이것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 자신을 발견하기보다는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려나가고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애쓴다.

대신 나는 움직이지 않는 여행을 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상을 영위하며 조용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살아갈 때 나는 여러 가지 자극들에 좀 더 민감해지는 것 같다. 매일 똑같은 것들을 매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거대한 세상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의기소침해진 채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런 일이야말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니까.

 

p245 나는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 뭐든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게 인생이다.

 

p251 그냥 그런 말들은 언젠가 살갗 깊숙이 박혔던 가시처럼 혈관을 타고 떠돌아다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심장을 찌른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했거나 연인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세상 누구에게도 사랑받거나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 때 말이다.

 

p275 꽂혔다고만 하면 끝장을 보는 이 남자의 열정은 별로 부담스럽지가 않다. 세상에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그냥 즐거워서 좋아서 신나서 하기 때문이다.

 

p281 세상에는 뭔가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

 

p282 우리가 부단히 노력해 이룰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 아닐까. 그건 어떤 변명이나 무례가 아니라 일종의 무겁고도 홀가분한 체념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p309 내가 좋은 어른이었을 때는 어디까지나 내가 그러고 싶을 때일 뿐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나쁜 어른이 되었다.

 

p324 그래서 두려워도, 힘들어도, 귀찮아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p328 미련이나 후회는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감정이다.

 

하찮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된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그게 인생이라는 것. 그 하찮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즐거워질 수도 비참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살아가면서 배웠다.

 

한수희의 온전히 나답게 에세이는 세상에 작고 하찮기만 해보이는 것들이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밝게 빛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는다. 그녀가 털어놓은 글들이 누군가에게 흉이 되거나 스스로가 바보처럼 보일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무런 평가없이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안다. 그런 그녀가 멋지다. 그녀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또 세상 살이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하나의 렌즈로 바라보지 않는다. 삶의 모든 단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만 같다. 그녀는 가볍고 유쾌하다. 어떤 겉치례 없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이 그녀처럼 평범한 우리에게 잔잔한 위로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함몰되지도 어떤 처량함의 넋두리도 없다. 그녀에겐 삶이 그저 여러 면의 장면일 뿐이다. 까매서 막막하고 회색이어서 우울하고 노랑이어서 신나고 밝지만도 않다, 그녀는 자신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너무 비참하게 내몰지도 또 자신을 과장하지도 않지만 가끔은 도도하고 가끔은 찌질해서 웃음이 난다. 그녀의 찌질함도, 도도함도 순간의 진실된 감정일 뿐 어떤 과장됨이 없다. 그녀의 숨길 수 없는 매력이다. 그런 담백한 그녀와 그녀의 글이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담백한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녀처럼 관점은 열려있고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 세상 우울한 이야기도 저렇게 가볍게 풀어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나도 당장 공책을 꺼내 뭐라도 긁적거려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다. 그녀 덕분에 용기 내어 다시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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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피천득 수필집
피천득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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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수필집

 

<찰스램> p39

나는 그저 평범하고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 동정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곧잘 수줍어하고 겁많은 사람, 순진한 사람, 아련한 애수와 미소 같은 유머를 지닌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비원> p42

비원은 창덕궁의 일부로 임금들의 후원이었다. 그러나 실은 후세에 올 나를 위하여 설계되었던 것인가 한다. 광해군은 눈이 혼탁하여 푸른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앟았을 것이요, 새소리도 귀담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숙종같이 어진 임금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아 그 향기로운 풀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였을 거다.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비원은 정말 나의 비원이 될 것이다.

 

<> p62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은만은 못하다.

 

<오월> p64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

p80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반사적 광영> p87

나는 범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치듯, 이탈리아의 플로렌스가 아테네의 문화를 받아 빛났듯이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한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 될 것이다.

 

<이야기>

p93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남의 말을 정성껏 듣는 것도 말을 잘하는 방법인데 남이 말할 새 없이 자기 말만 하여서 얼마 되지 아니하는 바닥이 더 빨리 드러나는 것이다.

 

이해관계 없이 남의 험담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답답한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남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람은 위선자가 틀림없다.

 

<>

p100 눈같이 포근하고 안개같이 아늑한 잠, 잠은 괴로운 인생에게 보내온 아름다운 선물이다. 죽음이 긴 잠이라면 그것은 영원한 축복일 것이다.

<플루트 연주자>

p124 토스카니니가 아니더라도 어떤 존경받는 지휘자 밑에 무명의 프루트 연주자가 되고 싶은 때는 가끔 있었다.

 

<송년>

나는 반세기를 헛되게 보내었다. 그것도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일주일 일주일을 한해 한해를 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았다.

<장수>

p148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의 과거를 다시 사는데 있는가 한다.

 

<만년>

p149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여성의 미>

p153 아무리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도 청춘의 정기를 잃으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여 나는 사십이 넘은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드물게 본다. ’원숙하다또는 곱게 늙어간다라는 말은 안타까운 체념이다. 슬픈 억지다. 여성의 미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약방문은 없는가 보다. 다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그런 것들이 미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선물>

p154 선물은 뇌물이나 구제품같이 목적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싶어서 주는 것이다. 구태여 목적을 찾는다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선물은 포시아가 말하는 자애와 같이 주는 사람도 기쁘게 한다.

 

<서영이>

내가 서영이 아빠로서 미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첫째 내 생김생김이 늘씬하고 멋지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따라서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지 못하였던 것이 미안하다. 젊은 아빠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보수적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가 커서 그것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

 

<딸에게>

이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산>

p176 지도자일수록 과학적 정확성과 예술적 정서를 가져야 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연민, 작고 소박한 것들에 대한 사랑, 순수함과 자연스러움 그리고 작은 행복과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는 글과 삶이 같았다. 아니 어쩌면 글보다 삶이 더 따뜻하고 순수하고 소박했으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신 분이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 서영이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중나가던 자상한 아버지, 훌쩍 커버린 서영이의 자리를 대신하는 곰인형과 난영이가 잠들지 못할까봐 안대를 해주고 이웃 주민들이 시끄러워 할까봐 박지 못한 액자가 벽 아래 놓여져 있는, 착한 소 시민이자 동물과도 교감을 나누던 성프란치스코의 마음을 가진 독실한 천주교인, 학문에 있어선 누구 못지않게 열정으로 많은 후학들에게 학문의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준 학자이셨다. 그는 98세까지 장수하시면서 세상 모든 것과 소중한 인연을 맺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감수성으로 순수하고 맑게 살아가신 듯하다. 글 안에서는 그가 겸손하다못해 아주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위신이나 명예보다는 다른 사람의 공적을 찬양하고 누구든 늘 좋은 모습으로 그려주신다. 자신의 인품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염치없어 하셨다. 엄마에 대한 사랑에서 딸에 대한 사랑으로 또 다시 손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는 정말 사랑하며 살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사셨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비원은 정말 나의 비원이 될 것이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 될 것이다.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나는 반세기를 헛되게 보내었다. 그것도 호탕하게 낭비하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일주일 일주일을 한해 한해를 젖은 짚단을 태우듯 살았다.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지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피천득 선생님 엄마의 죽음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다.

아기소가 엄마소 옆에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는 말이 애잔하다.

 

나에게 죽음은 왜 아무렇지도 않을까?

오히려 기다리는 무언가이거나 그냥 그런 무언가이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퇴직 후 할아버지를 모시며 이렇게 세월이 길어질 줄 몰랐다. 10년이 지나고 또 15년이 지났다. 할아버지는 100세를 넘었고 아빠도 할아버지처럼 노인이 되었다. 책임감으로 시작한 일이 세월이 길어지면서 아빠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고 아빠의 몸과 마음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빠를 안타깝게 여기거나 고마워하지 않는다. 100세까지도 자신만 생각하는 할아버지다. 오히려 아들을 귀찮아하거나 미워한다. 그래서 아빠는 그런 희생을 치루고 있음에 어떤 보람을 느끼시긴 어려웠다. 엄마는 아빠를 위로하려는지 사람이 늙으면 빨리빨리 죽어야 해, 안 죽고 살아있는 것도 못할 노릇이야.’ 이런 말을 꺼내면 아빠는 그저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아빠의 노년이 시작되었고 아빠의 괴로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우리는 한 노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죽음에 대한 무감각이 자라게 된 건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내게 죽음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이다. 적어도 기다리는 그 분의 다음 세대이니 나의 엄마 아빠는 천년만년 오래오래 살아 계실 것만 같다. 설사 돌아가신다해도 내 마음은 무덤덤하다, 살아 생전에 원 없이 효도를 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 따위도 없다. 그냥 인간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 꽃이 피었다 사라지듯 인간의 삶이 그렇게 가치 있거나 그렇게 안타깝게 여겨지지 않는다. 얼마 전 귀 뒤에 갑자기 작은 혹이 하나 생겨서 내심 깜짝 놀라 남편에게 두려움 섞인 볼멘 소리로 여보, 나 이거 종양 아니예요? 나 죽는 거 아닌가?“했더니 남편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나무랐다. ”죽으면 죽는거지 죽음이 뭐 대수라고 호들갑이야..“ 집안 내력인지 우리 엄마 아빠도 남편도 죽음은 빨리 헤치우는게 좋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어머니처럼 우리 선생님의 어머니도 선생님이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아직은 보호 받아야 할 나이에 삶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너무도 큰 상처와 아픔을 갖게 된다. 그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아픔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스란히는 착각일 것이다.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다른이가 맞이하는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고 슬프지만 여전의 내 주위의 죽음은 덤덤하다.

 

몇 달 전 시댁에 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은 코로나의 여파로 더욱 썰렁했다.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작은 어머님(부인) 은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딸과 함께 집에 머무르셨고 아들들은 여는 명절과 다르지 않은 표정들이다. 큰아들은 우리 아버지 살아 생전 원하는 거 다 하시고 80세까지 사셨으니 호상이다.“하시며 사람들이 보내온 화환을 다시 돈으로 환급받을 궁리에 빠지셨다. 주위를 둘러봐도 누구도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감정이 사라진 담백한? 장례식도 있구나 하는 생경한 느낌이었다.

 

친구네 집 화분에 오랫동안 아름답게 피어있던 구절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분은 다시 예전처럼 잎사귀로만 무성했다. 원래의 모습이었다. 한때 그렇게 신비로운 꽃을 피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잎만 무성한 화분을 바라보며 얼마 전 피어났던 구철초를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피천득 선생님의 삶과 글을 보며 나를 본다. 세상 무엇에도 무덤덤하게 살아간 나, 관계 속에서도 무관심했던 나, 소박한 것들은 하찮은 것으로, 소중한 것들은 당연한 것들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의 무감각으로 세상과 연결되지 못했다. 피천득 선생님의 그 세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에게 진정과 정성을 다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나도 살고 싶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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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 법정 대표산문선집
법정(法頂) 지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만남

 

p10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은 성장하고 또 형성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간에 만남에 의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만난다는 것은 곧 눈뜸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생명의 줄기가 파랗게 용솟음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일단 자기를 내던짐으로써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만남에는 자기를 버리는 그런 아픔을 치러야 한다.

 

p11 생명의 환희와 감사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은 만남이 아니라 마주치는 것이요, 사교일 따름이다. 만나는 데는 구도적인 엄숙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문제를 지니고 찾아 헤맬 때에만 만남은 이루어진다. 나 하나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이고 뜬눈으로 밝히는 그러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은 그때부터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단수의 고독에서 벗어나 복수의 환희에 설레면서 맑게 맑게 그리고 깊게깊게 승화한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만남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의 이 첫 에세이가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나를 버리는 아픔을 치러야 비로소 진실된 만남이 가능하다. 그런 만남을 통해 복수의 환희에 설레면서 맑고 깊게 승화해 갈 수 있다는 말씀이 지금 나의 상황과 겹쳐지며 작은 위로가 되었다.

나를 버리는 아픔을 치러야 했다. 그만큼인 줄은 몰랐다. 그냥 조금 알면 되고, 조금 수정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나를 내던져야 했다. 열심히 쌓아왔던 나의 허상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했다. 허상이 실재인 줄 알았기에 또 단단했기에 나는 몇 해를 헤매었다. 깊은 만남은 나의 허상을 조금씩 부서뜨리기 시작했다. 아픔과 고통에서 시작된 나는 누구인가?를 직면하며 유리 같은 허상은 수없이 깨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고통과 눈물 그리고 한 줌의 희망 속에서 작은 싹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작고 여리지만 진짜 나였다. 만남에 의해 나는 다시 새 삶을 시작한다. 마음 안에 작은 싹을 잘 돌보고 싶다. 만남은 그렇게 내 인생에 어마어마한 폭풍처럼 다가왔다. 이제 내가 진짜 사람이 되려는가 보다.

 

거꾸로 보기

p13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늘은 호수가 되고 산은 호수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바로 보면 굴곡이 심한 능선이 거꾸로 보니 훨씬 유창하게 보였다. 그리고 숲의 빛깔은 원색이 낱낱이 분해되어 멀고 가까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일어서서 바로 보다가 다시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했었다.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p14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시들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할지라도 선입견에서 벗어나 맑고 깨끗한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들한 관계의 뜰에 생기가 돌 것이다.

 

내 눈이 열리면 그 눈으로 보는 세상도 함께 열리는 법이다.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허심탄회한 빈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 남의 눈을 빌릴 것 없이 자기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대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p15 인격에 고정된 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지닌 좋은 덕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는 내게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p16 일산의 밤가시골 초가집 수도원에서 오늘의 교회와 사원을 바라보는 눈을 나는 그날의 선물로 받아왔다.

 

양생법

p20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분수 밖의 탐욕이 우리들 마음을 산산히 흩뜨려 놓는다. 외부로만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밖으로 쳐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여다 볼 때 자기 분수를 가늠할 수 있다.

 

수본진심 제일정진, 즉 자기 자신의 천진스런 본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신이라고

 

자기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어떤 일에 전념할 때 우리들의 마음은 온갖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가장 투명하고 평온해진다. 이런 상태가 곧 마음의 안정이다.

 

p21 우리들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즐겁고 명랑한 생활을 해야 한다. 즐겁고 명랑한 생활이 곧 삶의 리듬이요, 무게다.

 

우리들은 스스로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마음의 본성에 따른 행동은 즐겁고 그에 거슬린 짓은 즐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합리적인 식사- 자연식 섭취

마음의 안정이나 즐겁고 명랑한 생활에는 먹는 음식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나는 분수대로 살지 못했다. 분수를 몰랐다. 아니 내 분수를 과장했다. 밖으로는 나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눈이 없었고 안으로는 욕심이 넘쳐서 내 분수가 퍽이나 큰 줄 착각했다. 나의 시선은 늘 밖을 향해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나아야 하고 더 나아지고 싶었지만 요 모양 요 꼴인 내가 한심하고 싫었다. 그런 생각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감정은 열등감이나 질투 그리고 불안이었다. 먼저 나의 분수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했다. 외부로의 시선들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와 존재로서 소중하고 가치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분수를 알고 명랑하고 즐겁게 나의 일에 전념하며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한다.

 

물 흐르고 꽃피어난다.

p25 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내게 좋은 말이 있을 턱이 없다.

사람의 말이란 자연에서 치면 한낱 파리나 모기 소리와 같이 시끄러움일 뿐이다.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팔았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p26 그 알량한 말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눈멀어 왔고 귀먹어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닳아지고 관념화되어 꺼풀만 남은 오늘의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다.

 

자기 삶 속에 꽃을 피우고 물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p27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를 두고 딴 데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 그러기 때문에 저마다 지금 바로 그 자리가 자기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남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자신이 길을 가는 사람만이 무위진인이라 불릴 수 있다.

無位眞人이란,

어느 자리도 연연하지 않고, 어떤 모습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상태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를 잘 아는 참사람을 뜻함.

 

입을 다물어야겠다. 수없이 뱉어내었던 과장의 말들! 스스로에게 꽂혀서 혹은 내가 너무 중요해서 귀는 닫고 내가 맞다고 내가 옳다고 떠들어 댔다. 그 작은 관념 안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우겨대던 나의 소리가 부끄럽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는 안중에도 없고 생각없이 뱉어내던 말들이 부끄럽다. 하고 싶은 말을 멈추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언제나 나보다는 상대를 헤아려주고 싶다. 입을 닫고 귀를 활짝 열어야지!

 

버리고 떠나기

p29 잎을 떨치고 빈 가지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도 떨쳐 버릴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p30 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면 선택된 청빈일 것이다.

선택된 청빈은 결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p31 무엇이든지 차지하고 채우려만 하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무디어진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p32 흙을 가까이하면서 나무들을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가지 끝에 열려 있는 하늘을 이따금 쳐다보아야 한다. 하늘은 툭 트인 무한한 우주 공간을 우리에게 안겨줌으로써 어느 일부분에 매달리거나 안주하려는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p33 나무줄기를 쓰다듬으니 거칠거칠한 그 속에서도 여리디여린 부드러움이 있다. 거칠고 살벌한 이 풍진 세상에서도 우리 안에는 원천적으로 여리고 부드러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소식일까.

 

보다 멀리 내다보려면 다시 한충 더 높이 올라가라.

 

여백이 없는 사유는 자칫 환상이나 망상으로 치닫기 쉽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생각 돌이켜 선뜻 버리고 떠나는 일은 새로운 삶이 출발로 이어진다.

 

나무들이 달고 있던 잎을 미련없이 떨쳐버리는 그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p34 우리가 산다는 것은 끝없는 탐구이고 시도이며 실험이다.

 

자연의 리듬은 멈추거나 끝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우리 인간도 먹는 것, 입는 것,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 대인 관계 등에 억지나 과시나 허세가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자연스러움이 곧 건전한 삶을 이룬다.

 

나에게 아직 떨치지 못하는 어떤 집착이 남아있을까?

나는 무엇을 미련없이 버리고 떠나야 할까? 내겐 어떤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까?

루이와 함께 간 공원의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다. 시야가 훤하게 뚫린 느낌이라 뭔가 더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백이 주는 아름다움, 모두 버려야 다시 그곳에 새로움을 채운다. 자연의 순환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에게 아직 어떤 집착이 남아있을까? 욕심은 많이 비워지고 과정을 밀도있게 즐기고 싶은 마음 뿐이다, 더 버릴 욕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기꺼이 비우고 싶다. 깨끗한 도화지에 밝은 크레파스로 명랑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좀 더 신중히, 좀 더 정성을 다하고 싶다.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매사에 뭐든지 그냥 흘려버리는 습관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결단과 용기는 매 순간 나를 알아차리고 멈추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말하기 전에 멈추자. 그리고 신중히 생각해 보고 정성을 다해 행동에 옮기자.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p43 주어진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일상의 우리는 그저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신비를, 그런 고요와 평화를 우리는 한 생애를 통해서 몇 번이나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가.

 

날마다 새날을

p47 진실로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다. 인생만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출가

p51 가지에서 저버린 나뭇잎처럼, 떠나지 않고는 변신이 불가능하다.

 

p55 사람이 주어진 환경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일반 동물이나 다를 게 무엇인가.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하고 몸담아 살고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감으로써 고등 동물의 할 일을 다 할 수 있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출가의 영원한 교훈이다.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본질적인 자신을 털어 버림으로써 본질적인 자신을 크게 일깨우라는 뜻이다.

 

욕망을 버리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p56 버리기 위해서는 맺고 끊을 줄 아는 굳센 의지가 작용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자연의 새와 동물, 꽃과 나무, 산과 바다, 태양과 달과 별 그 모든 것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물들도 마찬가지이다. 티비, 자동차, 비행기 그리고 예술품들 모든 게 신기하고 신비롭고 또 아름답다.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을 잘 누리고 잘 즐기고 싶다. 무엇하나 허투루 보지 않고 무엇하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왔다. 식물로 왔다면 꽃을 피우고 다람쥐로 왔다면 다람쥐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사람으로 와서 사람답게 살아야 이 세상의 부속물로 최선을 다해 나답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다움 안에 사람다움이 함께한다. 고등 동물로서의 삶은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하고 몸담아 살고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감이라고 말씀하셨다. 의지적 노력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움이다. 고등 동물로 태어나서 단세포 동물처럼 살아간다면 나의 본분을 잃은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더 노력하여야 하겠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p59 낮은 밤이 받쳐주기 때문에 밝고, 밤은 낮이 비워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어둠을 이룬다.

 

우주의 커다란 생명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p60 그것들은 삶 속에 묻혀 지낼 뿐 죽음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때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산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p61 이 순간에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한테는 사슬이 없다. 기억의 사슬도 없고 욕망의 사슬도 없다. 시냇물이 흐르듯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에 있다.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p63 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p64 받아들이려면 먼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며 지켜보아야 한다.

 

p66 입 다물고 귀 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데서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p67 먼저 생각하라 그런 다음에 말하라.

p68 우선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2. 당신은 행복한가.

 

일상의 심화

p70 대인의 관계도 어떤 것은 따지고 보면 소음과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불필요한 가지들로 인해서 내 생명의 열매는 알차게 여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뿌리를 살피는 일,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되돌아 보는 일이다.

그리하여도 좋은 비본질적인 곁가지들에 대해서는 미련없이 가지치기를 해야한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쯤은 참고 견뎌야 한다.

 

심화는 곧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매듭이다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자신을 본래적인 나로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한 나를 일단 객관화 시켜야 한다.

 

진공묘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상태에서 오묘한 존재 혹은 오묘한 작용이 나올 수 있다

 

문제는 무슨 일에 있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이다.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맑은 기쁨

 

p79 밤 시냇물 소리, 그것은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소리다.

 

청빈의 향기

p80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는 빈 가지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에 방석만 한 장 달랑 방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의 방은 그대로가 커다란 침묵이다.

 

그 이름을 알고 실물을 대했을 때와 이름을 모른 채 실물과 마주했을 때의 그 감흥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마치 별자리의 이름을 알고 밤하늘을 우러를 때와 같다.

 

흐린 물에 섞이다 보면 스스로도 흐려지게 마련이다. 설득이 불가능 할 경우에는 그 흐림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그의 방 처마 끝에 달아 두고 듣던 조그만 풍경을 한 도반이 그 맑은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이는 것을 보고 그는 넌지시 그 풍경을 떼다가 도반의 거처에 달아 주었다.

 

반백살이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작은 동굴 안에서 나만 보며 살았다. 더 화려하게 더 편하게 더 행복하게 내 맘대로 나만 생각하며 살았다. 지나온 세월들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철렁하다. 말도 안 되게 오만하고 교만했던 날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 행동했던 날들이 부끄럽고 사람들에게 준 상처와 피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나는 분명 죄인이다. 이제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봐야지. 이 세상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느끼고 누릴 것이다. 가까운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꽃의 이름을 알아주고 하늘을 더 많이 올려다보고 소중히 아주 소중히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또 이젠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르게 천천히 정성스레 신중히 조심히 그리고 또 냉철하고 분명하게 세상과 상대를 마주하고 싶다. 오늘 밤이 지나면 2022년이 된다. 2022년 한 해는 나에게 뜻깊은 해가 될 것이다. 오늘 밤부터 나는 이미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행운을 빈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

p84 유유상종, 살아있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하는 그 상대가 그의 한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가.

 

물소리 바람 소리

p89 세월이 흐르는 소리라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시간에 대한 관념이 새로워진다.

 

한없이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혼자서 유별나게 살았으니 이제는 또 여럿 속에 섞여 그 그늘 아래 묻혀서 살고 싶다.

 

인생은 어떤 목표나 완성이 아니고 끝없는 실험이요, 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金 更無時節), 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는 말.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살라는 이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기운이 솟는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시냇물은 흐르고 또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

 

사막의 교부들

p96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락과 허영심은 정신을 좀 먹는 암이다.

 

그대 눈에 지금 보이는 바를 행하게

종교란 말 끝에 있지 않고 당장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p104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만이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한다.

 

산승의 편지

p117 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꽃처럼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야 합니다.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닦음이고 닦지 않으면 더럽히니까 항상 전진하는 것이오.

 

될 수 있는 한, 말 적게 하고, 잠 덜 자고, 음식 덜 먹는 것이 수도 생활을 기쁨과 축복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새벽에 귀를 기울이라.

p120 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지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

곰곰이 헤아려보면 자기 존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자신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나는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라.

 

시간 밖에 살다.

p125 나는 비로소 시간 밖에서 살 수 있었다.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에 팔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순간순간을 알차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시간 밖에서 살 수 있다.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급히 서두리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

안팎의 사정이 달라지는 수가 많다.

 

3장 단순하고 간소한 삶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p130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인간은 평범한 일상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모험과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자기답게 살고자 한다.

 

지혜로 깊어지려면 거기에는 어떤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상을 객관화시켜 되돌아보는 일.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해 자각하는 일이다.

진공묘유라는 말은 텅 빈 것에 오묘한 것이 있다. (본성은 공 하지만 작용은 있다.)

 

본질적인 스승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책임과 긍지가 있다. 외부의 것은 나에게 다만 자극을 줄 뿐이다.

 

지혜로 깊어지고 싶다. 매일 하루 나를 돌아보고 매 순간 나를 응시하고 나의 존재를 자각해야 한다. 외부의 것은 다만 자극을 줄 뿐 본질적인 스승은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더 깊이 더 명료하게 깨어서 나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 존재에 대한 나의 책임은 매일 빛나게 닦아 주는 일이다.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닦음이고 닦지 않으면 더럽히니까 항상 전진하는 것이오.

매일 닦아 주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소중히 정성스레 매일을 살아보자.

 

겨울 숲

143 제상(諸相)과 비상(非相), 즉 현실과 본질을 함께 볼 수 있다면 비로소 우주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바로 인식하려면 드러난 단면만 보지 말고 그 배후까지도 함께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내 나름의 질서가 없으면 내 삶은 자주적인 삶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단 한번 뿐인 새로운 삶이다.

 

단순하고 검소한 삶

p177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 조용히 지켜보라. 자신의 걸음걸이 먹는 태도 말씨 잡담 미움과 시새움 들을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다면 그것이 명상의 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자신의 신체 동작이나 언어습관 그리고 내면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살피고 있을 때 마음은 저절로 안정을 이룬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맑고 투명해지는 것이 곧 명상의 세계다.

 

우리는 언젠가 낙엽처럼 나뒹굴 그런 존재 아닌가.

 

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지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내면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살피고 있을 때 마음은 저절로 안정을 이룬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맑고 투명해지는 것이 곧 명상의 세계다. 마음의 수다가 점점 잠잠해진다. 또 이러다 언제 다시 시끌시끌해질지 모를 일이지만 요즘 같아선 따로 시간을 내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필요성이 사라진다. 생각은 비워지고 당장 할 일에 빠져있는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이 명료하게 깨어있지 못하는 때는 식사 시간이다. 식탐에 취해서 정신없이 들이키다 보면 어느덧 접시는 바닥나 있다. 그제서야 내가 또 알아차림을 놓쳤구나 깨닫는다. 올 한해 나를 잘 지켜보고 싶다. 주위의 세심한 관찰도 필요하지만 나에 대한 관찰도 시급하다. 오감 전체가 무뎌진 느낌이다. 잘 날을 세워 더 민감하게 나와 세상을 낱낱이 살피고 싶다.

 

4장 내가 사랑하는 생활

풍요로운 감옥

 

p206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p208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은 무엇보다도 사람 그림자를 전혀 볼 수 없는 점과 만날 그저 그렇고 그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미치지 않는 점이었다. 나는 근래에 와서 사람을 그리워해 본 적이 전혀 없다. 앞에서사람 그림자라는 표현을 썼지만 보다 솔직한 표현을 쓴다면 사람꼴이라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처지라 사람꼴 안보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뒷날 산을 내려와 배달된 신문을 펼쳐보니 솔직히 말한다면 이건 시끄러운 소음이요 쓰레기더미구나 싶었다. 내 정신과 몸에 얼룩이 묻기 전에 얼른 방으로 그 신문을 밀쳐 버리고 말았다.

 

법정스님의 이런 솔직함?에 반감이 들었다. 사람 꼴 안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는 말씀이나

신문은 시끄러운 소음이요 쓰레기더미라 하시니 그래서 밀쳐버렸다니 그 마음 씀이 세상 다 꼴보기 싫어 은둔하고 있는 괴팍한 노인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꼴 보기 싫어 더 더 깊이 파고 산골로 들어가 그리고 즐겁게 자연을 누리시고 즐기시니 요즘 티비에 나오는 자연인 같기도 했다. 저 분은 자연인과 무엇이 다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요즘은 내가 나의 개인적인 관심보다는 세상의 이야기와 사람들과의 관계에 더 중점을 두는 터라 마음의 저항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것은 다 한 목숨이다.

p221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한 목숨이라는 우주 생명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라, 남을 해치는 일이 곧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유혹에도 넘어짐 없이 사람의 자리를 지켜라.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p230 1. 고집이 없다 물에는 고정된 모습이 없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습을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난 모습을 한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곳에서는 증기가 되고 차가운 곳에서는 얼음이 된다. 이렇듯 물에는 자기 고집이 없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의 뜻을 따른다.

2. 늘 새롭다. - 살아 있는 물은 멈추지 않고 늘 흐른다. 강물은 항상 그곳에서 그렇게 흐른다. 같은 물이면서도 늘 새롭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거죽은 비슷하지만 실재는 아니다. 오늘의 나는 새로운 나다. 살아있는 것은 이와같이 늘 새롭다.

 

물처럼 살고 싶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가 되어준다. 증기가 되고 얼음이 된다.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며 멈추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내가 된다.

 

오두막 편지

실패가 없으면 안으로 눈이 열리기 어렵다. 실패와 좌절을 거치면서 새 길을 찾게 된다. 그렇기때문에 전 생애의 과정에서 볼 때 한때의 실패와 좌절은 새로운 도약과 전진을 가져오기 위해 딛고 일어서야할 디딤돌이다.

 

불편함을 이겨나가는 것이 곧 도 닦는 일임을 알아라.

입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배 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5장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침묵의 눈

p238 목격전수(目擊傳受) 입 벌려 말하지 않고 눈끼리 마주칠 때 전할 것을 전해 준다는 뜻.

자기 자신을 안으로 다스리는 맑고 고요한 수행자의 눈이었다. 진실한 수행자의 눈은 안으로 열려 있다.

 

오늘 하루 내 살림살이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은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함이다. 따라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현 존재다.

 

순간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 간다.

 

무엇을 들었는가?

무엇을 먹었는가?

어떻게 말했는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나는 친구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매일 빵을 먹고 루이와 얘기하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것이 지금의 나다. 열심히 듣고 좀 더 가볍게 먹고 신중하게 말하고 좀 더 차분히 행동하고 싶다. 많은 욕망들이 가라앉은 듯 하지만 여전히 식욕은 왕성하다. 야채나 밥보다는 빵이나 고기를 찾게 된다. 식습관은 여전히 바꾸어가야 할 숙제다.

 

수첩을 펼치면서

p247 연말이면 행사처럼 아궁이 앞에 앉아 편지도 태우고 사진도 불태워 없애고 불필요한 기록들도 불 속에 던져 버린다. 기록이란, 특히 우리처럼 단순 명료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인 연장은 불필요하다. 태워버리고 나면 마치 삭발하고 목욕하고 난 뒤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솟아난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거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

찾을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이 마음을 어디에 매어 두어야 한단 말인가. 찾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텅텅 비워 버려야 한다. 텅 빈데서 메아리가 울린다. 어디에도 집착이 없는 빈 마음이 훨훨 날 수 있는 자유의 혼을 잉태한다.

또 저항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 무심함과 무관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무엇이든 쉽게 잘 버리곤 했다. 어떤 물건에도 소중함이나 애정이 깃들지 않았다. 당장은 필요나 욕심으로 장만했다가도 금세 질리고 시큰둥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을 쫓는다. 그래서 무엇이든 잘 없애버린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깨끗하고 후련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무성의하고 상대를 무가치하게 취급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자각하는 중이라 법정 스님의 이런 후련한? 정리가 왠지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음으로 느껴진 것 같다. 그래서 쌤에게 이 문구들을 공유하고 받은 카톡 내용

그보다는 (인연이든 과거든)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 (기억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의미를 두려는)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겠네요.

개인적인 욕망을 떨치고 지금 여기에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의 자유로운 혼의 정신을 나의 미천한 수준으로 끌어 내렸던가 보다.

 

좋은 친구란 서로가 빈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서로의 빈 마음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사이여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입 관념을 가지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p254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주재하는 이는 누구일까. 또 나를 다스리고 나를 뒤흔드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는 누구인가?

 

물속에 물만 있지 않고 하늘에 하늘만 있지 않은 것처럼 내 안에 나만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 그들을 곁에 두고 그리워하며 살고 싶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렇게 귀하게 그들을 소중히 대하고 싶다.

 

- 주요 느낀 점-

1. 내 분수를 알고 명랑하고 즐겁게 나의 일에 전념하며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2. 입 다물고 귀를 활짝 열기! 말하기 전에 멈추자. 그리고 신중히 생각해 보고 정성을 다해 행동에 옮기자.

3. 고등 동물로서의 삶을 살자-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하고 몸담아 살고 있는 환경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감

3.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상을 객관화시켜 되돌아보는 일- 매일 하루 나를 돌아보고 매 순간 나를 응시하고 나의 존재를 자각해야 한다날을 세워 더 민감하게 나와 세상을 낱낱이 살피고 싶다.

4. 물처럼 살기-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가 되어준다. 증기가 되고 얼음이 된다.

늘 낮은 곳으로 흐르며 멈추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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