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문답 - 시대의 이상과 운명에 답한 조선의 자화상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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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꾼 자 누구인가

안견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1447년 안평대군은 꿈에 박팽년과 더불어 복숭아밭에서 노닌 황홀한 꿈을 꾸고 안견에게 이를 이야기해주면서 그림을 의뢰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들은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하였다

 

그림은 38.7× 106.5cm 비단 바탕의 수묵담채화로 보통의 동양화 두루마리와는 다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왼쪽은 현실 세계이고 오른쪽은 꿈 속의 도원 세계인데 현실 세계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그렸고, 도원의 세계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현실 세계는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린 듯한 느낌이고, 왼편의 도원 세계는 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안평대군의 발문부터 김종서,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서거정, 최항, 이개, 성삼문 등 당대 최고의 사대부 20여 명의 찬문(칭찬하는 글)이 친필로 붙어있다. 이로 인해 이 [몽유도원도]는 그림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학과 서예적 성취를 알게 하여 그 역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안평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최고의 명필로 꼽혔다. 조선 초에는 그의 서체가 큰 유행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몽유도원도 발문이 있다

 

1453(단종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이때 안평대군도 지지기반을 잃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받아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안견 화원 출신으로 세종 때 도화원(圖畵院) 6품인 선화(善畵)에서 정4품 호군(護軍)으로 승진하였다. 조선시대 화원은 최고 종6품까지 올라가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이것을 깬 최초의 인물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1447(세종 29) 그를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고 이듬해 대소가의장도(大小駕儀仗圖)를 그렸다.

 

안견은 1464년에 아직도 화원으로서 세조조에 기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안평대군이 사사된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해로부터 11년 뒤의 이야기이다. 안견이 이후로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안소희(安紹禧)에 관한 기록에 의거해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아들 안소희는 정6품직인 성균관의 전적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화원의 아들이기 때문에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아버지의 공적에 힘입어 원칙적으로 사대부 가문 출신에게만 열려 있던 문과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본다면 안견은 안평대군의 사후에도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몸담게 되었을 정도로 아무런 지장 없이 활동을 계속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계유정난을 당하여 안평대군은 공자의 귀한 몸으로서, 문화(文華)를 크게 아끼고 한묵(翰墨)을 스스로 좋아하며 당대의 명류들과 널리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를 흠앙하고 부러워하며 뜻을 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안견도 역시 화기(畫技)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정말로 뛰어난 화가로서 안평대군이 특히 그를 아껴 잠시도 그 집 문밖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안평대군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평대군이 북경의 저자에서 용매먹[龍煤墨丸]을 구입하였기로 안견을 급히 불러 그 먹을 적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마침 안평대군이 일어나 안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용매먹이 간 곳 없었다. 안평대군이 종과 시비들을 다그치니 계집종들은 스스로 변명하며 안견에게 혐의를 두는 것이었다.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스스로 밝히려 하였으나 먹이 홀연히 그의 품속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안평대군이 별안간 노하여 그를 꾸짖어 내쫓고 다시는 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묵묵히 있다가 달아나 물러간 후 집에 돌아가 숨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이 드디어 떠들썩하게 일세에 전하여졌더니 조금 있다가 안평대군이 큰 화를 만나서 그의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연루되어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안견만이 홀로 그 화를 모면하게 되었던 것이니 사람들이 비로소 이를 기이하게 여기게 되었다.

 

! 덕을 품고도 행실은 더러워 스스로 세리(勢利)의 화염(禍剡)을 면하였구나. 이것은 고인(古人)들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안견이 홀로 능히 하였다. 이것이 어찌 또한 일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괴이하게 홀로 행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을 내가 들으니 아마도 안견은 비단 그림에 대한 재주만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높은 식견과 멀리 미치는 생각과 가볍게 볼 수 없는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것으로써 이 세상에 놀고 그 예술에 몸담았던 것인지. 이것을 가히 알 수 없도다. 나는 진실로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보니 그 수석(水石)이 푸르고 멀며 풍연(風煙)이 잔잔하고 희미하여 비록 간일(簡逸)하고 소탕(疎蕩)하지만 돌아보건대 스스로 사람들이 쉽게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어찌 또한 그림의 형상도 그 그린 사람이 그러한 때문일까. 이것을 기록하여 여러 호사가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하촌(夏村)의 병우(病寓)에서 쓰.

 

이 기록은 비록 안견이 활동했던 시대보다 약 2세기 뒤의 것이지만 당시에 구전되고 있던 것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만으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짜임새가 있어서 신빙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기록으로 보면 안견은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내다보고 판단하는 기지를 지녔고 머리가 명석하고 두뇌 회전이 빨랐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지와 빠른 판단이 자신을 계유정난에서 구하고 오래도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안견이 이처럼 머리가 좋고 기지가 뛰어났음은 <몽유도원도>의 구성과 표현에서도 엿보인다. 백호전서의 기록에서 또 한 가지 크게 주목되는 것은 안견이 계유정난 전까지 안평대군과 얼마나 가까웠나 하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하여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에 힘입어 더욱 대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계정사 조선 시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세운 정자. 안평 대군이 도원(桃園)에서 놀던 꿈을 꾼 뒤 한양의 북문인 창의문(彰義門) 밖에 이 정자를 세우고, 1만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선비들과 시를 짓고 교류함. 안평대군이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은 뒤 이 곳도 폐허가 됨.

 

느낀점 : 안견에게 분명 안평대군은 소중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古畵)들을 섭렵하면서 화풍을 익혔고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에 힘입어 더욱 대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릴 때 분명 안견은 그 꿈속에 있는 듯 사흘 동안 그림을 완성하였다. (p38 어쩌면 이 순간이 나의 꿈이 었는지 모르겠다. 꿈을 꾼이는 분면 대군일진대 그 말씀처럼 대군의 꿈을 내가 모두 가져왔을까. 아직도 그의 꿈에 젖은 듯, 스치는 꽃향기가 몽롱했다. 꿈을 꾼자 왕자인가 아니면 그 앞의 한 화가인가) 안평대군을 섬기며 성장해가는 안견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안평대군이 위험해 처한다. 안평대군의 꿈에서 함께 노닐던 사람들은 일찍이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선 신숙주를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고 만다. 안견은 꿈을 함께한 자가 아니라 그저 꿈을 그린자로 그 사건을 비켜 간다. 안견은 끝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 살아간다. 안견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 또한 안견처럼 그 상황을 빠져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또 자신을 믿고 신뢰하고 성장시켜준 대군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 또 용서를 구하고 싶은 죄책감이 함께 하지 않았을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자신은 그 흐름의 물살을 잘 헤엄쳐갔지만 그 마음은 분명 괴롭고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또 그 과거의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지도...

 

 

자아

나는 누구인가

윤두서 [자화상]

현종 9(1668)에 녹우당에서 태어나서, 숙종 41(1715)에 역시 녹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의 증손이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고 호는 공재(恭齋)이다. 숙종 19(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남윤씨는 윤선도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다. 그는 평생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고 선비 화가로 유명해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다.

 

윤두서가 살던 시기는 대략 숙종 재위 기간(1675~1720)과 겹친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동을 거치면서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각성과 모색이 싹트던 때였다. 이 때에 활동한 윤두서였기에, 그의 그림에는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그림 속에 비로소 조선의 인물과 조선의 생활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 우리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도사의 옷차림, 시중드는 동자의 머리 모양 등은 거의 중국풍이었고 소 그림에서도 우리나라에 없는 남양 물소가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윤두서의 나물 캐는 여인에 등장하는 아낙들은 바로 수건을 머리에 쓴 조선의 농촌 아낙이고 밭 가는 풍경에서는 예전이라면 신선이나 앉아 있었음직한 산수 속에서 조선 농부가 조선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다. 짚신 삼기에서는 휘늘어진 나무 밑에 도사가 아닌 맨상투 바람의 조선 남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열심히 짚을 엮고 있다. 이 그림들은 18세기 중후반에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하는 풍속화를 예시한다.

 

이 그림들에서도 산수는 여전히 예전의 관념적 화풍을 따르고 있으나, 그 속에 현실을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로써 윤두서의 그림들은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상징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중기의 막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첫 사람이었다.

 

오늘날 윤두서의 이름 앞에 늘 붙어다니는 선비화가라는 수사는 그를 다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선비화가라는 단순한 규정에서 빠져 버리는 그의 모습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이며 실학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있다. 해남 집 유물전시관에 있는 지도나 기하책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옥동 이서 등 자신과 마찬가지로 출세 길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틀에 박힌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윤두서는 옛 책들의 내용을 모두 널리 꿰뚫고 그 극치를 추구하였고” “백가(百家)의 뭇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원리와 응용을 연구하였으며 천문은 각 지방을 두루 답사하고 밤마다 돌아다니며 관찰하여 천체의 이동 현상을 살피었고” “천문을 측량하고 땅을 재는 법을 경험적으로 증명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는 병서(兵書)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패관소설도 모두 읽어 지식을 넓히는 데 도움을 얻었고, 또 중국 지도와 우리나라 지리서의 내용을 모두 간파하고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실학자 성호 이익은 윤두서의 제문을 쓰면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익과 같은 학자가 나오는 데는 윤두서와 같은 선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윤두서는 그림 그리는 데서도 사실성을 추구했다. 사람이나 동물 등을 그릴 때면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대상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그려내야 만족하는 그의 자세는 자화상(국보 제240)에서 잘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떠오른 듯 화면 가득히 얼굴만이 그려진 자화상은 양식에서도 전무후무하며 묘사의 기법도 훌륭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그림이 아니고 윤두서 자신이다. 고작 가로 20.5, 세로 38.5의 작은 종이 위에 그 한 사람의 무게가 다 실려 있는 것이다. 화면 밖의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 마주 보는 사람을 송구하게 만드는 강렬한 눈은 그의 내면을 담고 우울하고 강건하게 타오른다. ‘이 사람 속에서는 무언가가 끓고 있구나.’ 이상은 높되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진사가 된 26세 이래 20년 동안 줄창 이어진 집안의 상사(喪事)를 종손으로서 감당하며 그는 그렇게 안으로 타야 했던가 보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광활한 세상으로 휘달리고 싶었음인지, 윤두서는 말 그림을 즐겨 그렸고 또 잘 그렸다. 버드나무 밑에 선 백마」 「뒹구는 말, 중국의 유명한 말들을 그린 팔준마도등 훌륭한 말 그림들이 그의 해남 집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화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는데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그 집안 사람들이 본인이 살아 온 것 같아서 모두 울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인물의 겉모습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의 사람됨까지 그려 냈음[傳神寫照]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1713) 서울 생활을 완전히 털어 버리고 해남 집으로 돌아왔고 2년 후에 48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그의 큰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도 그의 화풍을 이어 그림을 그렸다.

 

p133 행장이 실득을 이야기하더군 생각해보니 내 삶의 지향이 바로 에 있었던가 하오

 

느낀 점 : 윤두서의 자화상은 생긴 그대로 파격적이었다. 화폭에 담긴 얼굴의 크기와 그 세밀한 묘사, 당장이라도 살아서 튀어 나올 것 같은 형상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화선지에 하나 가득 자신의 얼굴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그동안 보았던 전신의 초상화 그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파격에 가까운 새로운 시도로 보였다. 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을까? 의아했다. 그의 행적들을 보니 조금씩 이 그림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기하학, 천문학, 병서, 지리학과 패관소설(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소설)까지 그는 현실에 기반한 학문들을 공부하고 실득을 지향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두서는 사실성을 추구했다. 사람이나 동물 등을 그릴 때면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대상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그려내야 만족하는 그의 자세는 태가 지니고 있는 특징, 개성, 사실 등이 파악이 될 때까지 지켜보고 특성을 잡아내고 관찰하고 내면을 완전히 파악한 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삶의 철학이 그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윤두서는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남윤씨는 윤선도 때부터 골수 남인 집안이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맞서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중국풍의 신선이나 동자가 아니라 조선의 농촌과 아낙네 조선의 소와 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관념적 화풍을 벗어나, 그 속에 현실을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렇게 윤두서는 자신의 자리에 당당하고 기품있게 서 있다. 그의 모습이 그의 자화상이 장대하게 우뚝 선 북한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도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길을 꿋꿋하게 나아가고 싶다.

 

풍경

그 달밤을 보았는가?

김홍도 [소림명월도]

 

p171 산수가 일종의 이상화된 자연이라면, 풍경은 현재 화가 앞에 펼쳐진 특정한 자연에 가깝다. 풍경화와 달리 산수화는 서구적인 원근법으로 따지기 어려운 독특한 시점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산수화 속 화가의 시점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산 위에서혹은 앞에서 혹은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 전체를 화면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p171 진경산수 창작의 기본 역시 산수로서의 접근이었다. 산수 속의 진경은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의 표상이었으며, 그리는 시점 또한 전통적인 방식에 기댄것이었다.

 

p171 [소림명월도]는 전통 회화에서 산수가 아닌 풍경의 시선으로 대상을 마주한다. 그것은 화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었으되 이전까지 누구도 그림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일상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달밤을 그림으로 옮겼으니 이야말로 하나의 사건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p172 시점또한 전통적인 산수와 달랐다. 서구의 풍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일시점으로 그려졌다. 이미 절정에 선 화가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새로운 절정을 묻도 있었으리라, 그 달밤을 보았느냐고, 이제 그 달밤이 그림이 될 수 있겠느냐고.

 

p172 화려하지도 장대하지도 않은 화면이건만 단순한 구도를 살려내는 이 유려한 필묵이라니 소품의 매력을 아는 대가다운 면모다.

 

p197 나의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는 붓을 든 자로서의 소망 때문이었던 거야. 내 외로움에 내 스스로 답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p197 주위가 갑자기 낯설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아무리 이 길을 아름답게 채워넣는다 해도, 내가 만들어낸 길은 아니지 않은가.

 

p204 그저 밤이 내리는 순간을 맞고 있을 뿐이었어. 나를 적신 것은 그 몽롱한 대기의 한숨이었을까. 아니 견딜수 없도록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갈증이었을 거야.

 

나는 그저 달빛에 취해있었지. 제법 아름다운 밤이로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이로구나.

 

아무것도 아닌 광경

이 순간을 남기고 싶었어. 무엇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이순간은 그저 내 마음의 모습일터이니 달 하나에 나무 몇 그루, 그것으로 족한 밤이 있는 것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여 무엇하겠나. 밤에 취하듯 달에 홀리듯 그렇게 붓을 들었다네.

 

p207 누구든 이름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금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p207 절경을 찾아 금강산을 오르던 발길이야말로 참으로 흥겨운 것이었지. 하지만 어느 밤 내 집앞을 비추던 달빛 또한 그 감흥에 못지않았다네.

 

p213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이였다.

세상은 아직 모를 것이나 언젠가 그 밤이 빚어낸 놀라운 그림 이야기를 알아주는 때가 올 테지.

 

p214 나의 금강은...... 바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고

이제 내가 다시 예전의 산수로 돌아간다 해도 가벼이 걸어갈수 있을 것 같군 그 달밤...... 내가 갈수 있는 길은 거기까지였을 테니까. 다음 시대의 화사들은 또 다른 꿈으로 저마다의 달밤에 이르는 길을 찾겠지.

 

p216 그런데 말이야 나에게는 있으나 겸재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혹시 알겠는가?

바로...... 겸재야.

 

느낀 점 : 성공이란 건 그런 건 줄 알았다. 대단하고 화려하고 누구나 시선을 주목하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어떤 위치나 명예를 갖게 되는 것, 그런 것들을 이루어야 인생의 성공이고 인생의 목표에 다다르는 길이라 여겼다. 그래서 일상은 늘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너무도 당연해서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어도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날 숨 쉬게 하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소중함을 모르고 있다는 쪽이 더 맞았다. 하루의 소중한 일상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이루게 된다는 것도 함께 무시되었다. 소림명월도를 보았을 때, 곡운구곡을 보았을 때처럼 아주 소박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행복은 그 모든 과정 안에 있었다. 내가 취하거나 획득해야하는 무엇이 아니었다.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 소중함을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와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 그림을 만난 후,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소림명월도와 같았다. 밝은 달빛, 밝은 가로등, 공원의 들풀, 그곳에서 귀를 팔랑대며 뛰어가는 루이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김홍도의 시선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에 감사하다. 김홍도의 작은 그림 하나로 나의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눈이 떠진다. 이것은 환희이고 기적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이였다.

세상은 아직 모를 것이나 언젠가 그 밤이 빚어낸 놀라운 그림 이야기를 알아주는 때가 올 테지.

 

미감

아름다움이 이유여도 좋을까

조희룡 [홍백매팔폭병]

 

조희룡에 이르러 담담한 묵매 위주의 조선 매화 그림이 비로소 다양한 색채를 입기 시작한다.

조희룡은 당시 예단의 권력인 김정희의 문인화 이론에서 다소 비껴가듯 손의 수련을 중시하는 수예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바람

조희룡(1789~1866)

19세기 혼란스러운 형국- 정조 사후 (순조- 헌종- 철종)-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세도정치

회화 수준 쇠퇴

18세기 회화의 힘- 사회의 다양한 가능성/ 화가의 자각/ 새로운 시도

 

추사 김정희(1786~1856) ‘완당 바람’ -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청의 학문에 열광적 몰두

文字香書卷氣(문자향서권기) :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

Vs 조희룡의 수예론 : 화가의 재능과 숙련된 기량의 중요성

중인계층의 예술적 자각

신지식유형의 화가 등장- 근대적 의미의 전문화가

전기(1825~1854) 갈필의 산수

김수철-현대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색감

허유(1809~1892) 전통적 느낌의 남종화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저 아름답기만한 그림에 깊이가 있는가. (속됨?)

 

그림의 주제가 감동의 조건이 아니다. 먹이냐 색이냐의 문제도 아와 속을 논하는 본질이 될 수 없다. 핵심은 주제를 대하는 화가의 생각과 기량.

 

조희룡의 [매화도] - 아름다움이 존재의 이유

한 시대의 새로운 미감

 

p257 냉담한 듯 날카로운 것이 그의 눈이 지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p265 그는 나의 속됨을 저어했으나 나는 그의 그림이 이념에 갇힐까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림의 속됨에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속이야말로 그림이 떨어져서는 안될 마계라 여긴다. 하지만 무엇이 아고 무엇이 속인가 한 시대는 그 시대가 지닌 저마다의 색체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속되다고 말하는 이 시대의 그림이 한 시대를 알리는 새로운 고아함으로 사랑받게 될는지 또 어찌 알겠는가.

 

느낀 점 : 추사 김정희의 문자향 취향기와 조희룡의 수예론이 대두된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문자향 취향기를 추구하는 김정희와 화가의 재능과 숙련된 기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희룡이 그 둘이다.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저 아름답기만한 그림에 깊이가 있는가? 아와 속의 기준은 누가 또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둘이 양극단에 서 있다면 서로의 양끝을 주장하는 팽팽한 대결은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분명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예술적인 감각과 기교 그 예술에 불어넣는 정신 어느 것 하나 놓을 수는 없다. 김정희의 불이선란이란 작품에서 기교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둔탁한 글씨와 단조로운 난의 모습에서 놀랍게도 그의 기개와 고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듯하다. 조희룡의 홍백매팔폭병은 정말 아름답다. 그 구도와 꽃잎들이 완벽한 우아함을 자아낸다. 그 안에 담긴 정신따윈 잊게 될만한 아름다움이다. 어느 한 쪽에서든 그 탁월함은 그 반대의 것을 잊게만들만큼 훌륭하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불이 둘이 아니고 또 다르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 커다랗고 든든한 양쪽의 기둥을 둔 웅장한 집이 결국 하나이듯 김정희와 조희룡이 결국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대립의 구도로 서있지만 기교의 아름다움이든 정신의 아름다움이든 아름다움으로 우뚝 서서 그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한국의 위인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회고

시대의 끝, 어쩌면 연민이었을까

장승업 [ 귀거래도 ]

 

장승업 (1843 ~ 1897)

장승업(張承業)1843년 헌종 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이리저리 떠돌며 자라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의 본관은 대원(大元)이며 선조는 무반(武班)이었고, 조선 후기의 화가 단원 김홍도를 의식하여 "나도 원이다"라는 뜻의 오원(吾園)으로 스스로 칭할 만큼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장승업은 20대 무렵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는 이응헌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며 기거하게 되었다. 어릴 적에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자를 못 배운 그는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다. 이응헌은 중국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글씨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력을 지닌 여항 문인이었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 있는 원명 이래의 명인들의 서화를 접하고 그림에 눈이 트이게 되었다. 우연히 장승업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의 천재성을 확인한 이응헌은 비록 천한 신분의 하인이지만 장승업의 숨어 있는 재능을 아끼고 지속적으로 그를 후원했다.

 

장승업은 조선 초기의 안견, 후기의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불린다. 후기의 정선까지 합쳐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로 쇠락해가는 국가의 운명을 지켜보며 화가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조선 초기 세종 연간에 활동한 안견, 그리고 조선 후기 영조·정조 연간의 문화적 황금기에 활동한 김홍도와 정선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승업은 이들 대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은 왕성한 창작력과 고도의 세련미 넘치는 미감을 보여 주었다.

 

장승업의 명성은 궁궐에까지 알려져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제수받고, 고종의 명령으로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어디에 매이는 것을 극히 꺼려했던 그는 엄한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궁을 빠져나와 황제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민영환이 왕에게 간곡히 청하여 위기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그밖에 한성부 판윤이었던 변원규,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오세창, 오경연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를 후원했다.

 

장승업의 신운이 넘치는 작품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에 시대를 밝히는 찬란한 예술혼의 승리였다. 그의 회화는 자칫 빈약할 뻔했던 조선 말기의 회화사를 풍성하게 살찌웠고, 우리 민족사의 어두웠던 한 시기를 정신적, 예술적으로 환하게 밝힌 빛이었다. 장승업은 1897년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느낀 점 : 장승업은 불운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고아였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좋은 주인을 만났고 좋은 스승을 만났고 그를 도와주고자 하는 좋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풍성했다. 그는 천재로 인정받고 스스로 오원이라는 호를 칭할 만큼 나름의 자부심도 컸다. 그는 왕의 총애까지 얻었지만 그런 명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듯하다. 그의 자유로운 기질이 그의 작품에 왕성한 창작력과 고도의 세련미 넘치는 미감과 개성으로 활개치 듯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덕분에 암울한 19세기 후반의 시대를 그의 찬란한 예술혼으로 환하게 밝혔다. 천한 신분임에도 그의 천재성을 알아봐 주고 그를 후원한 훌륭한 스승과 문화계의 인사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덕분에 그는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장승업을 보면서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를 알아봐 주고 도와주려는 주변의 인물들이 빛난다. 우리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인연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또 사라진다. 장승업의 삶을 보며 장승업 하나의 인물을 보기보다는 전체를 바라보게 된다. 그 한 인물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인연들이 만나 서로 돕고 상생해간다. 나는 누구를 진실로 알아봐주고 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고 싶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고라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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