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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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신영복

 

서론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한다.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관점으로 삼고자 한다.

고전 강독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한다.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를 걸어놓고 진행한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

우리가 걸어 놓은 화두는 관계론이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 (실체성 부여/자신을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 자기 증식 운동 /자본 운동/배타적 독립성/ 개별적 정체성)

동양 사회 구성원리 관계론-관계망으로서 존재/ 관계론적 구성원리(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이다.

 

서양의 근대문명은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한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된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한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

 

동양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 자연 인간 인간관계 등)

동양사고는 현실주의적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소중한 가치.

 

도는 글자 그대로 이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

(진리: 일상적 삶 속에)

서양철학 지혜를 사랑하는. (진리 ; 사색에 의해 터득)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 (self-so)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

자연은 생기의 장-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생주 이멸의 순환과정 속에 놓여있음.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짐.

고도성장과 과잉축적이 생각의 장을 파괴.

 

인성이란 무엇인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이 아님.

덕성이 곧 인성. (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봄)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구조. ( 관계 = 존재 )

인성을 고양 시킨다는 것 기르는 것으로 시작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

-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 ( 成人之美)

인성의 고양이 사회성의 고양.

 

오래된 시와 언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 사실성과 진정성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소박한 민중의 삶과 소망)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줌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냄 (시야를 열어줌)

자신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시경]의 정신은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줌.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이 우리 삶의 진정성)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있게 합니다. (무일 無逸- 편안하지 않음)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 정신을 깨어있게 하는 깨달음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

 

[어부] 굴원의 시-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갈등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 비타협적 엘리트 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 재조명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 과 비판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 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

 

느낀점: 시경은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로 소박한 민중의 삶과 소망을 이야기한다. 민중의 삶의 애환 시경의 정신은 피상적이거나 허구적이지 않다. 현실에 발이 닿아있다. 삶의 정서와 공감을 기초로 하는 사실성과 진정성에 마음을 울린다. 또한 시적관점은 광범위한 관계망을 드러내면서 시야를 열어준다. 나의 협소한 체험을 세계를 부단히 넓혀가고 싶다. 또한 무일이라는 단어가 내게 필요하다. 편안하지 않음(무일), 그동안 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더 많이 더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무일을 조금씩 실천해가고 싶다.

 

 

 

주역의 관계론

[주역] 수 천 수 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법칙성

동양 사고의 보편적 형식

판단형식이 관계론적

(관상과 수상),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 사주팔자), (선택과 판단)

대동(大同)-점괘와 백성들의 의견 조정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

춘추전국시대의 산물 (부국강병의 국정목표)

 

()과 전()

()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의 해설(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

[주역]의 경은 8, 64괘와 괘사 효사 4가지.

괘와 효는 고대문자,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

8괘를 소성괘라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

() 와 괘()

():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

(): 걸어놓고 본다는 뜻.

 

[주역] 읽기의 기초개념

양효()는 하늘 또는 남자

음효 (--)는 땅 또는 여자

==> 3개의 효로 한 개의 괘를 만듬(소성괘) ==> 소성괘 두개가 대성괘

 

8= 건괘/태괘/감괘/이괘/ 진하련/ 손하절/ 간상련/ 곤삼절/

양효가 홀수이면 양괘 , 음효가 홀수이면 음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

 

()와 응()

()- 자리 1 3 5 양효자리/ 2 4 6 음효자리 ==> 득위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실위)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김.-->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70%의 자리 강조/ 30정도의 여유

개체의 능력은 그 개체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대성괘를 이루고 있는 효중에서 2효과 5효가 이다.)

 

():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

1효와 4/ 2효와 5/3효와 6효의 음양 상응 관계를 보는 것

위의 개념이 개체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뤄내는 관계론

응은 위보다 상위개념 (ex>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이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

 

[주역]은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형태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느낀 점: 우리의 삶이란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객관적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 나의 삶의 크기는 얼마만큼 일까? 아주 작고 협소하다. 그동안 작은 방구석에서 작은 거울로 나만 쳐다보고 살아온 것만 같다. 이 책에서는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또한 이 세상의 아주 작은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주역에서는 개별적 존재의 능력보다는 상황과 처지에 따라 시시 때때로 변화하고 운명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또한 좋아도 좋은 것이 아니고 나빠도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 끝에는 나빠질 수도 또 나쁨이 좋아짐으로 바뀔 수 있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또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욕심을 낸다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질 수 있으니 70% 정도의 자리를 강조한다. 자기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였다. 중간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늘 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최고를 선호하는 나를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설정해 놓은 나의 세계를 조금씩 키워가도록 노력하고 싶다.

 

[논어] 인간관계론 보고

춘추전국시대의 특징

1. 철기의 발명- 2의 농업 혁명기

2. 사회 변동기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전환

3. 제자백가의 백화제방(갖가지 학문이나 예술이 함께 성함)의 시기.

 

배움

학이시습지 습은 실천의 의미 / 시의 의미도 때때로가 적절한 시기로 읽어야./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된다.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익혀야)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덕으로 이끌고 예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만 면하려고 할 뿐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의 논리-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는다. 타자란 없으며 모든 타자와 대상은 사실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참된 지()는 사람을 아는 것-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사실

지와 애는 함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애정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 ()하되 사() 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사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 (경험적 사고)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 (현장성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뜻.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고라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지와 우에 대해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하였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의 형태.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욕심이 없어야 겸손할 수 있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진다.

겸손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욕(無欲) 과 무사(無私)이다.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 할 수도 없다.

사회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구조도 아니며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있으며 사랑과 증오가 함께 존재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을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를 안겨주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된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형식이라보다는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

 

느낀 점: 배우고 그것을 적절한 때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지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것 또한 명심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주위 사람들은 나보다 명석하다는 것을 잊지않고 늘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맹자의 의()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

민본사상이 핵심- 민에 의한 혁명의 논리

여민동락 사상(왕이 백성과 더불어 낙을 같이 나눔)-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 무지.

 

성선설이 표명된 구절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의 싹이다.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

맹자는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함.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또한 성인의 문하에서 학문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진다.

 

느낀 점: 함께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더 쌓아가자. 인의예지는 내가 가져야 하는 기본 덕목이다. 측은해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모두 결여된 듯싶다. 차근차근 키워가야겠다.

 

노자의 도와 자연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근본은 자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

노자는 근본적으로 반문화적 체계.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계몽주의든 합리주의든 기존의 인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건축적 의지를 해체)

자연의 생성변화가 곧 도()

일체의 인위적 규재를 재앙으로 규정하고 자연이라는 근본적 질서를 회복할 것과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주창하는 반문화 사상.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움

무위와 관조라는 동양적 사유의 근저를 이루는 사상.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핵심 개념은 무와 유가 같은 것이라는 선언(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

무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

 

인위는 거짓입니다. (인위, 작위 자체가 거짓: 자연에 대한 거짓인 셈)

무위 (자연에 따라 행하고 인위를 가하지 않은 것)

미와 오 선과 불선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

노자 사상의 체계에서 대립적인 것은 없다.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이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체계.

 

유무, 난이, 고저, 장단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있다.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의 실천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물이 최고의 선

1. 만물을 이롭게 한다.

2. 다투지 않는다. (작위하지 않는다)

3.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

 

비어있음이 쓰임이 된다.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

한 개의 상품의 있음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의 배후로써 무를 드러내는 것이 노장의 철학)

서툰 글씨가 명필입니다.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눌변이 청자의 연상 세계를 확장해준다.

 

()보다는 정(), (滿)보다는 허(), ()보다는 졸(), ()보다는 자()를 그리고 진()보다는 귀()를 더 높은 가치로 봄

 

느낀 점: 노자의 사상은 파격적이기도 하다. 더 낮게 더 비우며 더 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싶다.

모든 현상의 숨겨진 구조를 주목하라는 말에서 요즘 컵을 볼 때 컵이 아닌 것을 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이 아닌 것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대상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볼펜을 보면 플라스틱 +스프링+ 잉크 등 각각은 볼펜이 아닌 것이 모여 볼펜이라는 대상이 생겨난다. 또한 플라스틱을 만드는 사람들. 잉크를 만드는 사람들. 스프링을 만드는 사람들 등 하나의 볼펜 속에 수많은 부속물들과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하나의 볼펜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인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존재를 볼펜이라 이름 붙였다. 유의 배후로써 무를 드러내는 노장 사상. 보이지 않는 무속에 신묘함을 유로써는 그 드러남을 보아야 한다. 수많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더 낮아지고 겸허지고 싶다. 신영복 선생님의 겸허함이 내게도 물드는 것만 같다. 또한 신묘한 세상을 즐기고 싶다.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 된 상태를 의미한다. 대상에 합일되어 매 순간을 몰입하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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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