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대의 차가운 손

 

인상 깊은 구절

 

p61 그들 중에 누구라 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나와 똑같이 비겁했을 뿐이다. 나와 똑같이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거짓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모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진실만을 환멸했다.

 

p62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으며 - 소화해내야만 하며 - 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p73 더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눈가에 번쩍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마치 낯선 이물질을 보듯 그 눈물을 올려다 보았다. 눈물 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임을 그때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p88 조각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간단히 손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두 손으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주무르는 순간만은 모든 것의 껍질을 꿰뚫어보기 위한 집요한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열띤 신체적 몰입을 필요로하는 그 예민한 작업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빚어내는 삼차원의 견고하고 육체적인 형태를 통해서만 간신히 이 세상과 연결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들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마치 그것들을 체득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종의 최면요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168 네 손이 성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돼.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p240 못을 빼도 못 자국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야. 다 극복했다 해도 그 자린 여전히 남아있게 마련이지. 한데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과거가 사라지는 것 같더란 말야. 이를테면 내가 언제나 추구해왔던 상태, 현재 속에서 충만한 상태가 되더란 얘기야. 과거의 힘이 완전히 정지된 느낌 속에서 그 우아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그 여자의 말할 수 없이 특별한 개성들이 내 못 자국을 가만히 덮어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p315 정말 꺼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네가 날 꺼냈고.... 또 난 널 꺼낸건가?

만일 우리가 꺼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다시 들어갈 수 없다면......저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나는 그녀의 알몸을 거기 반쯤 포개어진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내 눈이 뜨거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집요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일생의 긴장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느낀 점

조각가 장운형은 어려서부터 기만적인 주위 사람들을 관찰해왔다. 잘린 손가락을 숨겨왔던 외삼촌,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집안의 재산을 보고 결혼한 교수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운형은 진실이란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예술 활동을 통해 진실을 찾고자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던지는 뚱뚱한 L양의 손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고 그녀의 석고로 뜬 몸을 안식처로 느낀다. 완벽해 보이는 E도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관심을 갖는다. 운형은 그녀의 몸에 석고 작업을 하던 중 손을 감추려던 그녀가 화가나 어릴 적 손가락이 여섯 개여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사실을 폭로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꺼내졌음을 느낀다. 장운형도 E가 그의 몸에 석고를 부어 상처를 입으며 그 틀에서 나온다. 둘은 자신의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진다. 장운형은 E의 손가락이 제거된 자리를 정성스럽게 품어주고 따뜻한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둘은 어디론가 실종된다.

 

진실은 누추하고 공허하다고 느끼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이 숨겨온 진실을 밝히며 서로에게 치유된다. 자신의 그림자, 숨기려고만 애쓰던 어두운 부분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수용될 때 치유되고 한 단계 성장한다. 자신의 어둠을 함께 들여다보고 기꺼이 안아줄 그 한 사람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주
김소윤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상깊은 구절

22. 난주는 경헌의 이마에 찬 볼을 댔다. 곧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더 이상은 떠난 임을 그리워하며 애통해하거나 부질없는 요행을 바라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견디어내는 것만이 그들에게 남은 삶이었다.

 

27. 천하고 귀한 것은 다 우리 마음 안에 있답니다. 저는 천한 종이지만 아씨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질 않나요. 이 마음은 천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머무는 제 몸뚱이도 그저 천한 것만은 아니라고 믿어요. 반명에 심술궂고 악한 마음이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저 귀하다고만은 못 하겠지요.

 

천한 것 안에도 귀한 것이 머물 수 있다는 것뿐예요. 사랑하는 마음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하늘이 뜻도 같을 테니까요.

 

고난 중에 만난 주모의 따뜻한 배려야 말로 귀한 사랑이 아니던가.

난주는 무엇보다 어떤 일도 그저 좋고 그저 나쁜 일은 없다는 순덕 어멈의 말에 위안을 받았다. 사람과 사람 속에 어우러져 살아가다 보면 막막하기만 한 남은 날들도 실낱같은 빛이 보이리라. 그러한 믿음조차 없다면 그야말로 스스로 택한 지옥을 사는 셈이다.

 

31. 바느질을 할 때는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함께 엮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한땀 한땀 정성과 복이 붙는다고 했다.

 

74. 난주는 오랜만에 가슴을 꼿꼿하게 폈다. 몸서리치게 아프고 난 뒤에 오히려 발걸음을 가볍게 느끼는 것은 죽음의 경계를 다녀온 자만이 알 수 있는 산 자의 기꺼운 착각이다. 오랜만에 들이마신 겨울의 신선한 냉기와 마른 가지 타오르는 뿌연연기, 눅눅한 풀 내가 뒤섞인 아침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처음 대한 듯 낯설고 경이로웠다. 산 사람은 살게된다. 잔혹한 현실이다. 죽음 끝에 다시 만난 삶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천주를 위한 것이든 아들을 위한 것이든 난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83. 난주는 종이 되어 사는 동안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지 보았고, 살을 직접 뜯어가지 않을 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은 것이라곤 살아있다는 비극적인 사실뿐임을 알았다.

 

145 관례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행동입니다.

 

179 천한 집 어린 자식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다고 우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배곯아 죽을 지경에도 제 몫의 죽을 할망이나 아우에게 양보하면서 눈물 한 방을 내놓지 않는다오.

 

185. 유모는 두렵지 않을지라도 우리들은 두렵소. 유모를 능멸하는 것은 우리를 능멸하는 것이며, 유모를 아프게 하는 일은 또 우리를 아프게하는 일이오.

 

189 모든 축복과 악운이 하나이며 고결한 천주의 뜻과 비루한 인간의 속내가 하늘과 땅차이가 아니라 실은 하나인 것 같기도 했다. 고락이 손바닥 뒤집듯 하나이고, 행불행이 또한 그렇지 아니 할까

 

210 무당이란 신의 말을 받아 세상에 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자들이니, 그 역()이 약한 게 아니라 그 말에 기대는 이들의 나약함이 약하다. 무당이 쓴 말에 벌벌 떨고 단 말에 휘어 잡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 부부 또한 두려움을 기대는 값이 수백 냥이요. 입맛에 맞는 점괘를 얻는 데 수백냥이라.

 

215 난주는 경헌을 생각했고, 흰 꽃같은 계모와 태산같은 아비를 생각했으며, 깊은 한숨과 눈물로 어미를 근심할 어린 딸 보말을 생각했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악착스레 살아남아야 할 때가 있다. 222. 예순여섯의 난주에게는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 소중한 인연들이 비슷한 무게로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218 마음으로써 순응하는 것과 억지스러운 것은 분명 다를 것이다. 자신이 떠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란 생각에서였다. 하 이방이나 여홍개나 미움과 증오로 괴로운 누구든 마음의 지옥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부질없는 열정이나 바람 또한 훌훌 털어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난주 자신을 위한 기도였다.

 

224. 이제부터 닥쳐올 고난이 오롯이 혼자의 것임에 적이 안심한다. 혼자만 아는 고통은 비록 상처는 깊더라도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되새기지 않아서 좋다.

 

269 고비를 건너면 또 고비, 가시밭길을 건너면 또 가시밭길, 그래도 간간이 햇살이 나리고 부드러운 풀밭이 위안해주니 살아갈 만한 세상이다.

 

310 오늘처럼 태연자약하게 능멸하는 것을 난주는 분하게도 또 가엾게도 여겼다. 그러나 누군들 온전한 악인이고 선인이랴. 황림에게 잔혹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난주일 것이다.

 

320 죽음을 목적에 두었을 때 뼈마디마디 시려오는 한기와 허기로 쪼그라진 위장보다도 외로움이란 맹독은 더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난주는 설사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해도 의연할 수 있었다. 깊은 연을 맺어온 사람들과 자식들은 물론, 올레길 한 곳 담장 한 쪽에도 숱한 시간과 기억이 난주의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322 제주는 형벌의 땅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340. 악함과 선함이 공존하고 고귀함과 비열함이 함께하며 때론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 혼란한 세계 속에서도 어떤 선한 결과(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향상시킬 만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느낀점: 명문가의 맡딸로 젊은 나이에 진사에 합격하여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황사영의 아내로 살아가던 난주는 천주교 박해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남편 황사영은 순조 1년 신유박해 동안 북경의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담은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형을 당하고 난주는 관노비가 되어 제주로 이송된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지만 제주로 가는 길 추자도에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난다. 자신의 아들마저 노비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이를 두고가는 어미의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 아픔과 함께 나는 자문했다. 난주는 더 이상 삶을 살아내야할 이유가 있을까? 난주를 지켜보는 내내 죽음을 생각했다. 노비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당하며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한 어머니의 모정인 것을 깊이 공감했다. 아무 죄없는 아이를 살리기위해 어머니도 살아야했다. 하지만 추자도에 아이를 두고오는 순간 난 또다시 난주의 삶을 이어갈 명분을 찾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난주는 주위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우며 그녀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점점 확장된다. 난주를 겁탈하려는 나졸로부터 구해준 강노인을 양아버지로 모시고 자신에게 온 인연을 소중히 여겨고 돌보아 연이라는 양아들과 보말이라는 양딸을 두었다. 상집과 상윤이라는 양반댁 자제를 유모로 정성스레 길러냈다. 한양 할망이라 불리며 숱한 수양자식이 있었다. 구휼소를 차려 거리에 버려지다 싶이한 환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돌보았으며 온갖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매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녀는 비록 노비의 삶이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거친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악함과 선함이 공존하고 고귀함과 비열함이 함께하며 때론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 혼란한 세계 속에서도 어떤 선한 결과(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향상시킬 만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고 사람을 보배 다루듯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기에 난주의 귀천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빛났고 그 빛으로 주위 사람들이 따뜻하게 살아갈 힘이 되었다. 노비의 삶으로 사느리 차라리 죽음이 낫겠다는 생각은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언제나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나의 세속적인 관점의 한계였다. 그녀의 이타적 삶과 나눔은 곁에서 보는 내내 따뜻했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비록 허구적인 부분이 많으나 그녀의 영향력은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건재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얼빈 (30만 부 기념 에디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상 깊은 구절

14 공의 노고가 컸다....메이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메이지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이것은 의례적인 덕담이 아닐 것이라고 이토는 생각했다......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은을 데려온 정치공작의 성공을 치하하는 것인지....혼란한 정세를 놓고 꾸짖는 말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메이지가 하려는 말은 이것이었구나.

이토는 메이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말 이면의 의미를 찾으려고 계속 유추하고 예상하고 가늠해본다.

 

63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내밀한 죄들을 다들 깊이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 죄는 마음에 사무치고 몸에 인 박여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성찰하거나 고백할 수 없을 것임을 빌렘은 알고 있었다.

246 고해성사 때마다 마을의 죄는 풍토병처럼 거듭되었다. 똑같은 죄는 자고 새면 날마다 생겨나서 일상화 되었다.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서 다시는 죄를 짓지마라.

자신의 의식 수준 안에서만 성찰 가능하다. 진정한 성찰은 어렵겠구나.

 

64 빌렘은 마음이 다급할 때 느리게 움직였다.

급할수록 더욱 천천히

68 성정이 고우면 속마음이 더 힘들다.

92 우리는 적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105 이번 여행으로 경의 시심이 맑아지지길을 바란다. 풍류 속에서 경륜이 무르익겠구나.

.... 폐하의 당부대로 망가진 시심을 회복하려 한다.

시와 풍류의 중요성

121 강인한 정신은 반듯한 외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몸을 바르게 하라. 지금 처해있는 자리가 인간의 근본이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강인한 정신은 반듯한 외양으로 나타난다.

172 순종의 슬픔의 의전은 화려하고 엄숙했다. 그 슬픔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가식이라 하더라도 가식이 지극하면 진짜 슬픔과 구별하기 어려웠고,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니 마음이 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를 위하기보다는 내 마음 편함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다.

189 유리한 정황을 들이대지 않았고 불리한 정황을 아니라고 우겨대지 않았다.

234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안중근의 군더더기 없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담백함, 이 담백함은 자신의 유리함을 떠나 있으므로 가능하다.

211 나는 이토를 반드시 죽일 결심으로 우라지에서 하얼빈까지 왔지만 경계가 엄중해서 죽일 수 없으면 발포만이라도 해서 나의 의견을 말하고 자살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다. -우덕순- 우덕순의 신념과 소신

 

248 자신의 입으로 나가는 말을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 말이 통제되지 않는 위기를 느꼈다. 긴말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 조이면서 빌렘은 강독을 끝냈다.

빌렘의 자의식

252 안중근은 선고를 받기 전부터 자신의 일대기인 안응칠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217일부터 동양 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마지막 정리와 성찰들

이 모든 것은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

 

303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304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즐거움은 잠깐뿐이고 연필을 쥐고 책상에 앉으면 말을 듣지 않는 말을 부려서 목표를 향해 끌고 나가는 노동의 날들이 계속되지만, 이런 수고로움을 길게 말하는 일은 너절하다.

 

305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306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느낀점: 김훈의 문장을 처음 읽었다. 익히 최고의 작가라고 들어온 터라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그는 어떻게 안중근의 서사를 풀어가고, 또 어떻게 한 인간 내면의 깊이를 담아낼까? 지난번 안중근의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고 섬세한 묘사 없이 덩어리로 표현된 작품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는 더 컸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메마름을 느꼈다. 이곳에도 등장인물의 감정의 표현이나 내면의 깊은 사고의 흐름은 거의 담겨있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도 하지 않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직감했다. 어떤 미사여구의 형용사나 부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얀 방에 아주 간소하게 최소의 가구들만 덩그러니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그 안에 어떤 미적 감각이나 군더더기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메마른 마음으로 내용을 읽어가다 나는 어느덧 그의 글 패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도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담백한 채소를 먹듯이 한 입 한 입 음미해 갔다. 채소 그대로 본연의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직관적인 앎으로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고 울림이 깊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권총 한 자루로 홀로 맞서 동양의 평화를 외친 그의 살아 숨 쉬는 몸을 함께 느꼈다. 그것이 전부다. 이 단순한 한 줄로 그 깊이와 너비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아직 믿기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p20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

p20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p21 어디든 운 나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p22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p29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마찬가지 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30 펄롱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밖을 나가 외양간으로 가서 울었다. 산타도 아버지도 오지 않았다. 지그소 퍼즐도 없었다.

p31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펄롱은 말구유에 손을 차가운 물에 깊이 담그고 손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었다.

p31 사람들은 말을 하다보면 반드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뭘 아는지 드러내기 마련이다.

p34 아일린은 언제나 힘든 일부터 먼저 처리했다.

p34 그 집 물건들이 펄롱의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미시즈 월슨이 그 물건들을 쓰라고 기꺼이 내주었기 때문이다.

p36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p37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

p37 미시즈 월슨은 마치 자기 자식인 양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렴그날 종일, 그 뒤로도 얼마간 펄롱은 키가 한 뼘은 자란 기분으로 자기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돌아다녔다.

p43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53 너무 오래 제멋대로 살아온 고집 센 조랑말을 떠올렸다.

p54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p54 그런 일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쨌든 간에,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p111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p113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p114 펄롱은 불안한 걸음을 계속 옮겼다. 무언가 흥분에 가까운 기운이 피를 타고 흘렀다.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p119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이 어떤 부분이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p120 펄롱은 미시즈 월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p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p121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느낀점: 펄롱의 열심인 삶, 미시즈 윌슨의 자비로운 삶, 네드의 은근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모여 성당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무모하고도 위대한 일이 벌어졌다. 무엇 하나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펄롱은 이제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고자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일지 모른다. 나와 내 가족을 넘어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까지 손을 뻗고 있는 펄롱의 모습이 벅차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펄롱의 마음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가슴에서 마구 쏟아져 나올 때 나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 가장 좋은 부분을 열어서 그 마음을 깊이 느끼며 살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윌슨 부인의 펄롱에게 보낸 친절과 격려, 말과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펄롱을 좋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준 네드의 행동들이 나날의 은총이었다. 펄롱은 그 은총들로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한다. 작지만 사소한 것들,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지켜나갈까? 세상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은 어떻게 실천해 갈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하루를 잘 몰입하며 매순간 열심히 살 것,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년이 온다.


등장인물: 

동호- 3

시신의 성별과 어림잡은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 매김

갱지 쪽지에 같은 번호를 적어 가슴께 핀으로 꽂아 놓음

유족들에게 신원확인 시켜줌 / 신원확인 된 시신이 상무관으로 옯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

 

은숙 누나 - 수피아 여고 3학년/ 수피아여고 하복 차림/ 조금 튀어나온 눈이 귀염성있게 동그랗고 양갈래로 땋은 곱슬머리

전대 부속병원에 헌혈하러 왔다가 시민자치가 시작된 도청에 일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왔다가 얼결에 시신을 맡음

p26 점퍼 주머니에서 부스럭부스럭 카스텔라와 요구르트를 꺼낸다성당 아줌마들이 나눠주길래 네 것도 받아왔어.- 배려심있고챙겨주고자기 일을 꾿꾿히 해내는


선주 누나 20대 초반 핏기없는 피부, 가는 목, 야무진 눈매, 또렷한 목소리, 연두색 셔츠/ 충장로 양장점 미싱사 / 헌혈하러 왔다가 / 코피가 잘 나는 체질- 침착하고 단단해보임, 배려하고 섬세하기보다는 털털하고 형 같은 느낌.


진수형- 서울에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으로 내려옴

깊게 쌍꺼풀진 눈, 긴 속눈썹이 여자애처럼 예쁘장

장부에 기록한 인적 사항들을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임


정대: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못생긴 정대

단춧 구멍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귀염성이 있어서 사람들을 웃기는 정대

공부보다는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마당에서 배드민턴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천연덕스럽게 누나를 챙겨주려고 칠판 지우개(누나의 학교다닌적 추억)를 책가방에 담던 정대


정미누나: 빠듯한 형편에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이는 정대누나

화 한번 시원하게 내본 적 없을 것처럼 걸음이 가볍고 목소리가 조용한 사람

방직공장에 다님/ 짧은 단발머리

p38 차갑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겹겹이 감싼 것 같은 손끝으로 뭔가를 겁내듯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혹시 너, 1학년 교과서 다 버렸어?......먼지 묻은 교과서들과 참고서 몇 권을 안고 나오자 정미 누나의 눈이 커졌다.....세상에 너는 머시매가 어쩌면 이렇게 착실하냐. 우리 정대는 다 내버렸던데.....정대한텐 말하지 마라. 안 그래도 저 때문에 내가 학교 못 다녔다고 눈치보는데,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할 때까지만 모른 척해줘. 얼굴에서 무슨 풀꽃 같은 게 연달아 피어나는 것처럼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을 너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엄마: 난리 통에도 대인시장의 피혁 가게에 나가 계심

p42 집에 가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섭게 손을 끌어당기는 엄마

군대가 들어 온단다. 지금 집에 가자이. 억센 엄마의 손가락을 마침내 다 떼었다.

해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아빠: 가죽 원단박스를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 안방에 누워계심


큰형: 얼굴이 곱고 체형이 작음/ 서울에서 9급 공무원


작은형: 21/ 어려서부터 공부밖에 몰라 반에서 늘 1

대학시험에선 거푸 실수를 해 삼수하는 형

얼굴이 큰데다 수염 숱이 무성해서 나이들어 보임

p33 작은형이 제 방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줄거리

소년이 온다소년은 동호다.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죽은 중3 동호다.동호는 한집에 살던 정대와 시위에 나갔다가 아수라장 속에서 정대의 손을 놓쳤다. 정대가 옆구리에 총을 맞는 걸 봤다. 모로 넘어진 정대를 뒤로 하고 동호는 달렸고 멀리 숨어서 정대의 하늘색 체육복 바지를 얼핏 본 것 같아, 맨발이 꿈틀거린 것 같아 다시 뛰쳐나가려는 순간 한 아저씨가 어깨를 붙들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동호는 정대를 잃었고 정대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한다. 동호는 시신이 들어오면 인상착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기고 유족들에게 신원확인을 시켜주었다. 수피아여고 1학년 은숙 누나와 양장점 미싱사로 일하던 선주 누나는 시신들을 옮기고 물수건으로 닦고 머리를 정돈한 뒤 냄새를 막기 위해 비닐에 싸는 일을 했다. 진수형은 서울에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으로 광주에 내려와 상무관에서 동호가 기록한 인적 사항들을 도청 정문에 붙이고 전체 관리를 맡았다.


2장은 죽은 정대가 서술해 간다.

정대는 죽었다. 군인들은 시신을 날라다가 어딘지 모르는 공터 뒤 덤불 숲에 시신들을 열십자로 쌓아 올렸다. 정대는 아래에서 두 번째 끼어 납작하게 눌려있었다. 시신들의 무더기는 썩어가고 날파리 떼들이 기어다니고 날아 앉는 걸 지켜보며 정대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누나와 동호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 후로도 가마니에 덮인 몸들의 탑이 늘어갔고 어느 날 군인들이 석유를 부어 시신들을 모두 불태웠다. 정대는 혼령이 되어 동호를 찾아가려 했지만 동호가 죽었다는 걸 느꼈다.

 

3장은 5년이 지난 은숙 누나의 이야기다. 은숙 누나는 출판사에서 일한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오던 그날 은숙 누나는 병원으로 숨어 목숨을 구한다. 도청을 빠져나오며 만난 동호를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걸 후회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아무일 없는 듯 도청 분수에 물이 나오는 걸 참지 못해 민원실에 수시로 전화한다. 은숙은 살아남은 자신을 치욕스럽게 느꼈다. 빨리 늙고자 했다. 수배 중인 번역자를 만났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조서를 받으러 갔다가 일곱 대의 뺨을 맞고 왔다. 그녀는 잊으려 한다. 하루에 한 대, 일주일 만에 잊을 거라 결심하지만 여섯 번째 따귀를 잊어야 하는 날 뺨이 아물어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일곱 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진수형의 이야기는 4장에서 전개되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수형은 감옥에서의 모진 고문으로 인간의 가장 바닥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갈증과 배고픔과 볼펜을 끼워 뼈가 드러나게 하는 고문과 성고문까지. 교도소를 나와서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로 전전하다가 결국 자살한다. 진수형이 죽고 유언장과 사진을 발견하는데 그 사진은 동호와 아이들의 나란히 누운 시신의 사진이었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오던 그날 진수형은 동호가 남은 걸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무조건 숨어있다가 항복하면 죽이지 않을 거니까 항복하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손을 들고 나란히 줄을 서서 나온 항복한 동호와 아이들을 흥분한 장교가 무참히 죽인다.


5장은 20년이 흘렀고 선주 누나의 이야기다. 선주는 열일곱살 공장에서 일하며 성희 언니의 옥탑방에서 한문을 외우고 노동법을 공부했다. 성희 언니는 자주 우리는 고귀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고 총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간첩지령을 받았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석방되고도 그녀는 평온한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녀는 죽고자 광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카톨릭 외벽에 학생들이 붙여 놓고간 사진을 발견한다. 그 사진에서 동호의 죽음을 본다. 그녀는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으로 분노의 힘으로 다시 살고자 한다. 선주도 진수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시달려며 동호의 혼령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6장은 동호 어머니의 진술이다. 동호를 찾으러 작은아들과 도청에 갔지만 둘째 아들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 도청에 들어가려는 아들을 막으며 울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동호가 죽고 삼십년이란 세월동안 어머니는 유족회에 나가 시위를 벌이고 아들을 그리워하며, 미쳤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겨울이면 삭신이 얼고 심장이 차가워졌다. 어머니는 동호의 학생증 사진을 오려 간직하고 틈만 나면 들여다 본다.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와도 땀이 안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한강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살았던 광주의 중흥동 집을 팔고 삼각동으로 이사 가면서 중흥동 집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동호네 식구였다고 동호네는 정대와 정미 누나를 문간방에 세를 주었다고. 소년이 온다는 한강 작가와 아주 가깝고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한강은 12살에 아버지가 숨겨놓은 광주 민주항쟁의 참혹한 사진집을 보았고 그녀의 연한 부분이 소리없이 깨어졌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학원강사인 동호의 작은형을 찾아가 소설을 써도 되는지 허락을 구한다. 그녀는 동호의 무덤을 찾아가 초를 태우고 묵묵히 들여다 본다.

 

소년이 온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동호로부터 시작해 죽은 정대의 목소리 5년 후의 은숙 누나, 10년 후 자살한 진수형, 20년 후의 선주 누나, 30년 후의 어머니 그리고 지금의 한강으로 전해져 온다. 도청에서 죽은 동호는 그렇게 정대를 통해 은숙 누나를 통해 진수형과 선주 누나 그리고 어머니 한강에게로 걸어온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로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강은 깊은 고통 속에서 소년을 이끌고 빛으로 나왔다. 그녀의 소설을 통해 깊은 고통의 슬픔을 우리는 함께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한장 한장 종이를 넘기는 일이 조차 어려운 일을 대체 한없이 약해보이기만 한 한강작가는 어떻게 그 글을 써내려 간 것일까? 압도적인 고통으로 쓴 책이라는, 세줄 쓰고 한시간 울고, 아무것도 못하고 몇시간 정도 가만히 있다가 돌아오고 그랬죠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녀는 위대하다.

 

114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 만큼이나 강렬한 무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5

다음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데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치는 걸 느꼈습니다.....(중간 생략)...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양심과 책임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 남았다. 광주항쟁의 살아있는 인물들의 공통점이었다.

동호의 죽음에 그들 모두가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다. 어쩌면 그들이 당한 고문보다도 동호에 죽음에 대한 죄책감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진수형은 동호의 사진을 유언과 함께 가지고 자살했고 선주 누나는 동호의 죽음을 접하고 그 분노의 힘으로 살고자 했다. 은숙누나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을 치욕스럽게 느끼며 그 고통을 잊지 않고자 했다.

 

나에게 양심과 책임이라는 게 있던가? 나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런 종류의 영화나 다큐에는 저항조차 가지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보수계열이고 어릴 적 아버지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남편 집안도 보수 쪽이라 진보세력의 영화들은 기피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주인공이었던 영화나 화려한 휴가, 택시 운전사 이런 영화들은 일부러 안보기도 했던 것 같다. 이번 책을 덮으며 1980년 이름만 알던 광주항쟁의 일들이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그때의 풍경과 느낌들을 한강이 그랬던 것처럼 사진으로 다큐로 생생히 보고 싶어졌다. 다큐멘터리를 찾았고 오늘 낮엔 송광호가 주연인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봤다.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다큐멘터리와 영화에 그대로 등장했다. 태극기를 싸멘 수많은 시신들, 오열하는 사람들, 피흘리는 사람들, 최류탄, 곤봉을 휘두르는 군인들, 주먹밥을 나르는 사람들, 함께 노래하는 군중들, 아이들, 노인들, 젊은이들, 소녀들이 울고 웃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뒹굴고 있었다. 소설이 이 현실에서 살아 숨쉬며 뒤엉켜있었다. 나는 더이상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 사건들이 그저 나의 생각 안에 있었을 땐, 내 상상 속에 있었을 땐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무서운 일에 왜 연루될까? 죽음을 무릎 쓰는 시위에 왜 뛰어들까? 나는 방안에 꼼짝 않고 숨어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곁을 두지 않는 나를 상상하곤 한다. 혹시라도 누명을 써서 경찰에게 끌려가는 일이 생긴다면 묻기도 전에 이실직고 하는 나를 상상한다. 그 어떤 위험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았다. 어린 동호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일, 진수형이 소녀들을 데려다주고 금세 다시 돌아왔던 일, 선주 누나가 끝까지 남아 총을 메겠다고 자진하던 일을. 동호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친구 정대의 죽음으로 자신만 돌아가 살아남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함께 그것을 느꼈다.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혼자 살아 남는 것보다는 함께 죽어도 좋다는 느낌을, 그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 강렬한 느낌을, 양심이라는 깨끗한 보석을 박은 광휘를 두려움 속에서 선택한 것이다.

 

p95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는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

 

한강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양심과 책임을 가진 선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잔인성과 추악함을 가진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양심과 책임을 가지고 선한 의지를 발휘하며 살아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